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29
929회. 그렇다면 알아봅시다
남궁연이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벽검문의 이름을 듣고 뭔가 떠올리려 애쓰는 그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물론 그녀는 처음 벽검문의 이름이 나왔을 때 알았다.
오래전 남궁세가가 몰락하고 대연상방에 신세를 지고 있을 때의 일이다.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이 연적하에게 유명교와 관계된 산채들의 조사를 부탁했었다.
연적하가 대연상방에 찾아와 그런 말을 할 때 자신도 따라나섰다.
그때만 해도 복수심에 불타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슬쩍 운을 뗐다.
“벽검문에 대해 알려 주면 좀 도움이 되려나?”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낫겠죠?”
연적하가 수긍하자 남궁연은 마치 책을 읽듯 벽검문의 역사를 읊기 시작했다.
“벽검문은 백 년 전 팔상검 한상찬이라는 기인이 세운 문파야. 이 대 문주는 그의 아들 독보검 한자명이고, 삼 대는 한무진. 한무진의 후계자는 장자인 한백인인데, 그가 무영검 백산에게 살해당한 뒤에 둘째인 소상검 한백상이 문주가 됐어.”
“무영검 백산이 한백인을 죽였다고요?”
“응. 대로에서 보란 듯 단칼에 베어 죽였어. 한백인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라, 그의 죽음을 두고 한동안 말이 많았지.”
남궁연은 슬쩍 연적하의 얼굴을 살폈다.
이 정도면 기억이 날 텐데…….
“아! 기억났다.”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영검 백산과 한백인의 이름을 들으니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백산은 한백인이 자신의 처를 겁탈해 그녀가 자결했고, 분노한 그가 한백인을 죽이고 천하를 떠돌다 유명교에 투신했다고 했다.
-한무진은 자식이 저지른 범죄는 숨기고, 복수를 한 나만 괴팍한 살인자로 만들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마인이지만 그날의 진실만은 밝히고 싶다. 나를 대신해서 네가 그 일을 해다오.
-한백인이 죽을 짓 했다는 걸 밝히란 말이야?
-그렇다.
-알았어. 그 정도야 일도 아니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이승에 미련 두지 마.
-고맙다.
이제야 그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유명교와의 전쟁’과 연이어 터진 ‘범천욕계왕재천’의 일로 까맣게 잊고 살았다.
“누님은 알고 있었죠?”
연적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한백인이 여색을 밝혔다’고 하는 걸 보면 진즉부터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나도 방금 알았어. 얼마 전까지 우리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잖아. 그래도 네가 나보다 나아. 나는 벽검문의 이름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거든. 네가 거론하지 않았으면 그냥 흘렸을 거야.”
그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삶의 우선순위에서 멀어진 일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고민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잊고 넘어갔을 터였다.
“백산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있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 노인네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러게.”
남궁연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십두마병이었던 백산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자 새삼 부친이 떠올랐다.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대협객이었던 부친이 왜 저렇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문득 남궁연이 물었다.
“그런데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을 저대로 둘 거니?”
“왜요? 그들이 황궁에 숨어서 술법을 익히고 있다니까 걱정돼요?”
“조금 신경이 쓰이네.”
“그럼 가서 정리해 버릴까요?”
잠시 생각하던 남궁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이른 것 같아.”
“늦은 게 아니라 이르다고요?”
“호천맹과 남맹이 보란 듯 네 경고를 무시하고 있잖아. 지금 네가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을 처리하면 너만 우스운 사람이 될 거야. 난 네가 사람들 입에 그렇게 오르내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자신도 호천맹과 남맹이 싸우는 상황에서 손을 쓰기가 뭐하긴 했다.
그건 ‘말한 것을 지킨다’는 것에도 맞지 않았다.
“누님. 아까 장인어른이 그랬잖아요. 누구도 남궁세가가 협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우리만 까탈스럽게 따지는 걸까요?”
“…….”
남궁연은 바로 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 안채에 이를 즈음 말했다.
“다수의 말이 항상 옳은 건 아니야. 호천맹과 남맹의 정략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들의 가족뿐일 거야. 나는……. 그들의 희생에 분노하는 네가 존경스러워.”
“에이, 누님도 같이 화냈잖아요.”
“솔직히 너만큼은 아니야. 만약 내가 남맹의 일을 거들었다면, 지금의 총사부와 같은 짓을 했을지도 몰라. 남맹 전체를 생각하면 그게 이익이 되니까.”
뜻밖의 고백에 연적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자기 행동이 잘한 짓인지, 미련한 짓인지 모르겠다.
“너를 보고 있노라면 구천현녀가 왜 너의 보증을 섰는지 알 것도 같아. 나나 심 노인 같은 사람에게 영기를 허락하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너에 비하면 나와 심 노인은 속물이거든.”
“누님은 속물이 아니에요.”
“아냐. 나 역시도 아버지처럼 대의(大義)를 앞세워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어.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너는 아니야. 대의보다 앞서는 게 천도(天道)야. 너만은 부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
“쩝, 대의니 천도니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르겠어요. 지금처럼 대충 살래요.”
“후훗!”
남궁연은 ‘지금처럼 대충 살겠다’는 말에 실소를 흘렸다.
천하를 좌우하는 거대 세력들과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있으면서 대충 살겠다니.
유명교주와 남맹, 호천맹 맹주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소리였다.
잠시 후, 대청마루로 올라간 연적하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내일은 벽검문이나 방문해야겠네요. 지금 문주가 한백인의 동생이라고 했죠?”
“그래. 벽검문이 합비의 명문(名門)이라 쉽게 인정하지는 않을 거야.”
“설마 백산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죠?”
“그야 모르지. 너도 십두마병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잖아.”
십두마병이 되려면 최소한 수도자 열 명의 머리를 잘라 바쳐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명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
백산 일가에 일어난 비참한 일과 별개로 보통의 성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럼 골치 아픈데.”
“너라면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남궁연은 방으로 들어갔다.
대청마루에 앉아 휘영청 밝은 달을 보던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백상이 좀 나쁜 사람이면 좋겠다.”
매 아래 장사 없다니까 그럼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협객을 다짜고짜 때릴 수는 없으니까.
***
남직례성.
합비.
벽검문.
벽검문 문주 소상검 한백상은 연적하의 바람과 달랐다.
그는 연적하의 방문 소식에 숨을 헐떡이며 마중 나왔고, 보자마자 허리를 접었다.
“남천 대협. 어서 오십시오.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연적하는 한백상을 찬찬히 살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안광이 맑은 게 전형적인 협객의 상이다.
벽검문이 정파의 명문이라더니 문주만 봐도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들러 봤어요.
벽검문과 내가 인연이 좀 있더라고요?”
관리권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안 한백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헉! 남맹에 찾아가 중재를 요청한 일로 찾아왔구나!’
그것 외에는 남천과 얽힐 일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한 그는 서둘러 사과했다.
“저어, 맹주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몰라도 남천 대협께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남천 대협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저의 잘못입니다.”
“그건 무슨 소리예요?”
“미주각과 신흥객점의 관리 문제로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 난 또 무슨 얘기라고. 전혀 아니에요. 그건 맹주님과 잘 풀었어요.”
“그러셨군요. 송구하지만 그 문제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다섯 개 문파가 장사를 방해하지 않는 걸 남맹이 보증해 주기로 했어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남맹에서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그러셨군요. 그런 문제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맹세코 남천 대협의 사업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문하생이 있다면 그의 내공을 폐하고 파문시키겠습니다.”
한백상은 벽검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 단호했다.
그러자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그럼 안 되죠. 크게 보면 벽검문도 손님인데,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겠다니. 그건 간접적으로 장사를 방해하는 행동이잖아요.”
“어이쿠! 제가 그만 실언을 했군요. 저희 문하생들에게 남천 대협의 사업장을 애용하라 명하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좀 들어가죠.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라서.”
“예, 이쪽으로 가시지요.”
한백상은 남천을 객청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의 뒤로 벽검문 제자들이 쭈뼛쭈뼛 따라붙었다.
객청.
연적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거두절미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영검 백산이 백주 대로에서 문주님의 형을 죽였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도 들은 바가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머뭇거리던 한백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삼십 년도 더 된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는 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무영검 백산은 성정이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만취한 상태로 거리를 지나던 그와 저희 형님 사이에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저희 형님을 베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들은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럴 겁니다. 그가 사라진 뒤로 여러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으니까요. 혹시 저희 형님이 그의 처를 겁탈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들으셨습니까?”
“예.”
“그건 백산의 지인들이 퍼뜨린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저희 형님은 무술보다 책을 더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백산은 유명교에 투신해 십두마병까지 올라갔지요. 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연적하는 한백상의 눈을 응시했다.
꾸밈없는 표정과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백산이 십두마병이 된 건 맞아요. 내가 죽였어요.”
“천하를 위해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산이 죽기 전에 묘한 말을 하더라고요. 한무진이 자식의 범죄는 숨기고, 복수를 한 그만 괴팍한 살인자로 만들었다고.”
“…….”
“한무진이 문주님 부친이죠? 아직 정정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있나요?”
“백산이 정말 아버지가 숨겼다고 했습니까?”
“그게 알고 싶어서 왔어요. 모셔와 봐요.”
머뭇거리던 한백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잠시 후 한백상이 얼굴에 검버섯 가득한 노인을 부축해 돌아왔다.
노인의 혼탁한 눈빛을 본 연적하는 대번에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자리에 앉은 노인, 한무진이 한백상에게 물었다.
“누구시라고?”
“남천 연 대협께서 아버지께 여쭤 볼 게 있다고 하십니다.”
“남천? 그게 누군데?”
“고금제일인이십니다. 아버지.”
“그래? 뭘 물어본다고?”
한무진의 자글자글한 눈은 여전히 한백상을 향해 있었다.
한백상이 연적하를 보며 말했다.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만 정신이 혼미해지신 지 몇 해 되었습니다. 직접 보여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모시고 왔습니다.”
“문주님은 어때요?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요?”
“당사자들이 모두 죽거나 이렇게 되었는데, 그걸 아는 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진실을 알고 싶으냐고 물었어요.”
“송구한 말씀이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알아봅시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적하가 한무진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한백상이 뭐라고 하건 말건 연적하는 움켜쥔 손에 영기를 끌어 올렸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제자 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혼탁한 영혼이여 깨어나 진실을 말해라! 삼십 년 전 당신의 장자 한백인이 백산의 처를 겁탈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