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36
936회. 다도(茶道)를 아는 것 같습니다
금사가 야릇한 눈으로 팔황신모를 보았다.
자신과 천자마의 비밀을 듣고도 팔황신모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과연 십만 명을 제물로 쓴 사람다운 부동심이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얻게 되는 쾌락은 천하에 비교할 것이 없다.
잠시 생각하던 팔황신모가 말했다.
“그래도 나머지 반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풀어 주십시오.”
“천자마와 내가 죽으면 그 원신(原神)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상계로 갈까? 하계를 떠돌아다닐까? 너는 어찌 될 것 같으냐?”
“아…….”
팔황신모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금사가 하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천외이선은 염마왕보다 상위의 신이다.
그들의 육체가 소멸돼도 원신은 저승으로 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연적하는 천외이선의 원신이 현세를 떠돌아다닐까 봐 그냥 두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천외이선과 연적하의 미묘한 거리 두기가 이해됐다.
“이제 알아들은 얼굴이로구나. 하지만 어리석은 황실의 재촉에 연적하도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손을 대 보기로.”
“두 분의 원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하찮은 인간이 알 바 아니다. 그보다는 너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죽으면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텐데……. 그런 불로불사를 위해 지금까지 발버둥 친 것은 아니지 않느냐?”
“…….”
순간 팔황신모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까지 금사가 가르쳐 준 방법들이 모두 실패한 때문이다.
십만을 제물로 쓰면 업이 무거워져 염마왕과의 관계가 깨질 거라더니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자신을 상계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 장본인이 걱정하는 척이라니.
생각할수록 역겹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도움을 줄 존재는 천외이선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혈기를 다스리는 팔황신모의 귓가로 금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너를 상계로 이끌어 주겠다고 했으니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너와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마지막 방법을 가르쳐 줄까 하는데, 들어 보겠느냐?”
“세이경청(洗耳敬聽) 하겠습니다.”
“괴황지가 필요하구나.”
팔황신모는 서탁 아래에 보관하던 괴황지를 탁자 위에 올렸다.
금사가 괴황지에 손끝을 대자 피가 배어 나왔다.
금사는 자신의 피로 괴황지에 알아보기 힘든 문자를 그렸다.
한눈에 봐도 그것은 부적이었다.
금사와 만난 뒤 처음으로 팔황신모의 얼굴에 감정이 떠올랐다.
신의 피로 만든 부적이라니!
어쩌면 정말로 이번에는 뭔가 될 것도 같았다.
피처럼 붉은빛을 발하는 부적에서 법보(法寶)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금사의 영기로구나!’
피에 이어 영기까지 쏟아부은 부적을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요동쳤다.
상기된 팔황신모를 보며 금사가 말했다.
“너희 하계의 말로 하면 ‘전륜멸업부(轉輪滅業符)’라고 할 수 있겠구나. 너의 업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여 멸하는 부적이다.”
“다른 이에게 전가하면 업이 소멸합니까?”
“소멸한다.”
“전가하는 것만으로 소멸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너의 업을 짊어진 자를 죽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업이 소멸할 것이다. 전가하여 멸한다고 해서 전륜멸업이라 하느니라.”
조심스럽게 부적을 갈무리한 팔황신모가 물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업을 아무에게나 전가할 수 있습니까?”
“전륜멸업을 달리 인연멸업(因緣滅業)이라 부르기도 한다.”
팔황신모가 눈을 찡그렸다.
인연멸업이라니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글자 그대로 ‘인연을 멸한다’는 소리다. 전륜멸업의 부적은 진심으로 너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써야 효과가 있다. 예컨대 조금 전의 그 환관처럼.”
“…….”
기가 막혔지만 팔황신모는 사실이냐고 묻지 않았다.
신(神)인 금사가 자신의 피와 영기를 써 가면서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어서다.
***
합비.
여강현 석경장.
이른 아침, 호천맹주 무극상인과 칠파일문의 대표들이 석경장을 찾았다.
남경으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들른 것이다.
연적하는 예고 없이 방문한 호천맹 고수들을 객청에서 대접했다.
간단한 다과(茶菓)상 앞에서 호천맹 고수들은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어디 차인지 다향(茶香)만 맡아도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과자는 또 어떻고요. 내 입이 까다로운 편인데 이건 정말 술술 넘어갑니다.”
“동감입니다. 이렇게 궁합이 맞기도 어려운데 일품요리를 먹는 것 같습니다.”
“남천 대협께서 다도(茶道)를 아는 것 같습니다.”
“다도 그 이상이지요.”
호천맹 고수들의 입에 발린 소리를 듣고 있던 연적하가 한마디 했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네요. 그거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차예요. 과자도 노점에서 산 거고. 내가 입맛이 싸구려라 좋고 나쁜 걸 몰라서.”
흠칫하던 칠파일문 대표들이 급히 말을 바꿨다.
“본래 차라는 게 식물의 잎이 아닙니까? 사람이 그것에 값을 매기지만 실은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내 입에 맞으면 그만이지 가격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나뭇잎인 것을요.”
“과자도 어차피 곡식 가루입니다. 값을 매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그들의 빠른 태세 전환에 연적하는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오늘 호천맹을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에혀! 잘해 주고 싶어도 정이 안 들어. 정이…….’
속으로 탄식하는 연적하에게 맹주인 무극상인이 넌지시 운을 뗐다.
“남천 대협. 오늘 저녁이면 남경에 도착할 것 같은데……. 함께 가심이 어떻겠습니까?”
“따로 가는 이유를 총사부 분들에게 말했는데 전해지지 않았나요?”
“남맹 때문이라는 걸 말씀하는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혹 남맹에서 남경행에 관해 따로 연락받으신 게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걸 주고 받을 사이도 아니고요.”
“그러신데 왜 남맹의 눈을 의식하십니까?”
“모르시나 본데 내가 원래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에요.”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무극상인은 아쉬운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유명교는 호국 종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교주, 백두마군, 십두마병, 신당이 호천맹에서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백두마군과 십두마병, 신당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얼마 전까지 유명교 천하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호천맹 총사부의 고민은 ‘그게 끝일까?’ 하는 점이었다.
솔직히 호천맹은 황궁과 남경에 얼마만큼의 유명교 세력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연적하와의 동행을 원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전면전을 선언하고 나선 마당에 유명교 잔당이 두렵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
끝내 연적하가 동행을 거절하자 무극상인은 작별 인사를 꺼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호천맹은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남경에 들어가겠습니다. 남경에서는 뵐 수 있겠지요?”
“당연하죠. 어떻게, 아침에 황궁 앞에서라도 만날까요?”
만나자는 말 한마디에 어둡던 무극상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예, 호천맹도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무극상인이 일어서자 칠파일문 대표들도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
해거름 무렵.
횡산.
도검으로 무장한 팔백여 명의 무인들이 횡산에 접어들었다.
합비를 떠난 호천맹의 본진이다.
남경까지는 아직 한 시진(2시간) 이상을 더 가야 하니 예정보다 늦은 셈이다.
선두에 선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가 맹주에게 변명처럼 말했다.
“남맹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조금 우회하다 보니 늦었습니다. 그래도 횡산을 지나면 양자강이니……. 초저녁이면 남경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
“팔백 명이 도강하려면 꽤 걸릴 텐데, 정말 초저녁까지 되겠소?”
“선발대에 상류와 하류의 배까지 섭외해 두라고 했으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무극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자강만 건너면 바로 남경이니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호천맹 선두가 횡산 중심부를 지날 때다.
일진광풍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사방팔방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여유롭던 무극상인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
‘천상천아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가 유명교 구호인 까닭이다.
곧이어 호천맹 앞으로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속속 떨어져 내렸다.
무극상인이 이백 명쯤 되는 숫자에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다.
이번에는 네 개의 깃발이 화살처럼 날아와 관도에 일렬로 박혔다.
퍼퍼퍼퍽-.
펄럭이는 깃발 뒤에 언제 나타났는지 네 사람이 오연하게 서 있었다.
네 사람의 기도가 범상치 않자 무극상인은 총사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직접 나섰다.
“나는 호천맹의 맹주인 무극상인이외다. 당신들은 누구기에 호천맹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오?”
천상검제가 짧게 답했다.
“우리는 유명교의 사대기주다. 남경은 너희에게 허락된 땅이 아니다. 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유명교라면 우리 호천맹이 왜 이곳에 있는지 잘 아시겠구려. 당주들까지 모두 달아나 신당이 텅텅 비었는데, 당신들은 왜 여기에 있소?”
그러자 천상검제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문답무용! 교주님의 지엄하신 명이시다! 적들이 산을 넘지 못하게 하라!”
순간 유명교 고수들이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호천맹을 향해 달려갔다.
이윽고 호천맹과 유명교 고수들이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무극상인과 선두의 호천맹 고수들도 사대기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차차차창- 차앙-!
호천맹과 유명교 고수들이 붉게 타는 석양에 물들었다.
처음 일각(15분) 동안은 독 오른 유명교 고수들이 호천맹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상대는 칠파일문의 정예다.
싸우면서 전열을 정비한 그들은 압도적인 숫자로 반격에 나섰다.
맹주와 칠파일문의 원로들이 사대기주를 상대할 동안 전세는 빠르게 역전됐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자 유명교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악!”
“으윽!”
사방에서 유명교 고수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행히 그들 중에 십두마병은 없었는지 마물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즈음, 유명교 고수는 넷만 남았다.
사대기주들이다.
무극상인과 칠파일문의 원로들이 살수를 쓰지 않은 덕이라 할 수 있다.
사대기주만 남자 무극상인의 검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무극상인이 작정하고 살수를 쓰자 기주(旗主)들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차차차창- 서걱-!
미처 피할 틈도 없이 한 사람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됐다.
곧이어 죽은 자의 몸을 찢고 마물이 튀어나왔다.
“크라라라라라라-.”
일각마인 특유의 괴성이 횡산을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보광(寶光)이 솟구쳤다.
호천맹의 술사대에서 준비하고 있던 법보를 꺼내 일각마인을 에워쌌다.
술사대의 대처를 보던 무극상인은 벼락처럼 가까이 있던 기주를 덮쳤다.
천하십대고수의 작정한 살초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한 사람의 기주가 죽었다.
때마침 일각마인을 처리한 술사대가 죽어 나자빠진 기주에게 몰려갔다.
무극상인과 칠파일문의 원로, 술사대의 공조(共助)에 사대기주들은 맥없이 죽어 나갔다.
술사대가 네 번째 기주의 몸에서 나온 마인을 처치한 때는 이미 오밤중이었다.
검신을 닦고 있는 무극상인에게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가 다가갔다.
“사망이 스물, 중상이 열, 경상이 열다섯입니다. 유명교 측 사상자는…….”
“그건 알고 싶지 않소.”
무극상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유명교 잔당들과의 싸움치고 호천맹이 입은 피해가 너무 큰 탓이다.
십두마병이 이럴진대 백두마군은?
이제라도 남맹과 손을 잡아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