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37
937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막 납검을 마친 호천맹 맹주 무극상인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총사, 남경의 소식은 들어온 게 있소?”
“남경은 남맹의 관할이라…….”
공손일랑 공손기가 말끝을 흐렸다.
호천맹이 천하무림의 종주지만 남직례성에는 지부를 두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남직례성에 호천맹 지부를 두는 순간 남맹과 호천맹의 싸움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
그런 이유로 남경의 상황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남맹과 대화를 해 봐야 하지 않겠소?”
공손기는 반사적으로 맹주를 쳐다보았다.
오늘 점심까지 남맹과 마주치지 말자던 사람이 갑자기 대화 운운하니 놀란 것이다.
그러자 무극상인이 변명하듯 말했다.
“남경에 유명교 잔당이 어느 정도나 남아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해 본 소리요.”
예상치 못한 유명교 잔당들의 도발에 놀라기는 공손기도 마찬가지다.
유명교에서 본격적으로 반격을 해온다면 남맹과의 합력은 필수였다.
“남맹 본진도 아직 도강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마련해 볼까요?”
“그래 주시오. 강을 건너기 전에 남경의 정보를 얻어야겠소.”
“알겠습니다.”
공손기는 읍을 해 보이고 총사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인들이 숙영지를 벗어났다.
***
남경.
취보문(聚靌門) 앞 저잣거리.
늦은 밤.
신궁감 유광은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어디 객점이라도 들어가야지 불안해서 안 되겠다.’
오후에 자은각의 천상검제에게 교주의 말을 전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 뒤로 집으로 가서 재산을 처분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야반도주와 거리가 먼 삶이었기에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게 문제다.
저택을 안면 있는 전장(錢莊)에 넘기고, 단촐하게 뜰 준비를 마쳤을 때는 벌써 술시 말(오후 9시)이었다.
이러다 재수 없게 노상강도라도 만나면 전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 잃을 판이다.
밤새 남경을 빠져나가려던 그는 외곽의 객점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불 꺼진 객점이었지만 문을 두드리자 금방 주인이 나왔다.
객점 주인은 그를 빈방으로 안내한 뒤 보란 듯 하품을 하며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유광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상검제를 만난 뒤로 지금까지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매고 있던 행낭을 풀어 머리 맡에 놓고 돌아서던 그가 멈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의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교주님?”
깜짝 놀란 유광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착잡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팔황신모가 말했다.
“충성스러운 종 유광아. 네가 나를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그 일을 하겠느냐?”
“예!”
유광은 할 일이라는 게 유명교주의 명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라.”
유광이 고개를 들자 팔황신모는 그의 이마에 ‘전륜멸업부’를 붙였다.
순간 유광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마에 붙인 부적과 뻣뻣하게 굳은 몸이 영락없는 강시다.
부적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빛이 팔황신모와 유광의 몸을 연결했다.
곧이어 팔황신모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팔황신모의 몸에서 나온 검은 연기는 붉은빛을 타고 유광의 몸으로 들어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유광이 마치 끓는 기름 솥에 빠진 사람처럼 펄떡거렸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부릅뜬 유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움찔움찔.
검은 연기를 받아들이던 유광이 끝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기절했다.
그가 정신을 잃자 남아 있던 검은 연기는 다시 팔황신모의 몸으로 돌아갔다.
팔황신모가 아쉬운 눈으로 유광을 내려다보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업은 유광이 감당하기에 너무 컸다.
어쩌면 십만 명을 제물로 바친 탓인지도 모른다.
‘아아! 그것만 아니었으면 유광으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업의 소멸을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속이 끓었다.
탄식하던 팔황신모는 손가락을 튕겼다.
‘퍽!’ 하고 유광의 머리가 터졌다.
죽음과 동시에 유광의 몸에서 검붉은 불길이 일어났다.
화르륵-!
불길은 유광의 시체와 뇌수, 핏방울까지 재로 만든 뒤 저절로 꺼졌다.
침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행낭을 보던 팔황신모가 홀연히 사라졌다.
***
황궁.
무영전.
숙소로 돌아간 팔황신모는 때마침 대청마루에 나와 있던 천외이선과 만났다.
금사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팔황신모를 보며 말했다.
“전륜멸업부를 썼더구나.”
“예, 그런데 저의 업이 너무 컸던지 다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
“그랬구나.”
업의 소멸을 약속했던 금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팔황신모는 속이 쓰렸지만 상대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지라 따지지 않았다.
“전륜멸업부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습니까?”
“본래 인간은 하나의 전륜멸업부로 충분하다만, 너는 예외겠구나. 전륜멸업부는 횟수와 상관이 없다. 사람이 없지 부적은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러자 팔황신모의 안색이 밝아졌다.
“송구하지만 금사님의 전륜멸업부가 더 필요합니다.”
“너에게 그것을 쓸 사람이 남아 있느냐?”
그건 ‘네 주변에 너를 신뢰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있습니다.”
“설마하니 달아난 백두마군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 피와 영기를 되지도 않을 일에 낭비하고 싶지는 않구나.”
“아닙니다. 제가 거두어 가르친 팔황 중에 네 명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궁 밖에서 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환관의 최후를 보고도 그들에게 네 업을 전가하겠다는 것이냐?”
“팔황들은 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겁니다.”
“좋은 제자들을 두었구나. 그렇다면 만들어 주마. 내가 불로불사를 향한 너의 집념을 얕보았던 모양이다.”
조롱의 말에도 팔황신모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흥! 스승과 사형제들을 죄다 죽였는데 제자를 죽이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금사는 즉석에서 자신의 피와 영기로 ‘전륜멸업부’ 네 개를 만들어 팔황신모에게 건넸다.
“내일이면 연적하가 남경에 올 터이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예.”
팔황신모는 ‘전륜멸업부’를 챙기자 마자 바람처 럼 사라졌다.
천자마가 텅 빈 마당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금사여. 너는 마지막까지 고약하구나. 유명교주의 업이면 ‘전륜멸업부’를 산처럼 쌓아 놓고 써야 하거늘. 인간의 절망을 보는 게 그리 좋더냐?”
“그것이 저의 유일한 기쁨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금사의 신형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홀로 남은 천자마가 중얼거렸다.
“쾌락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건지……. 그저 미친 욕망인지 모르겠구나.”
하기야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일, 연적하가 남경에 오면 불완전한 현세의 삶도 끝날 것이다.
신좌(神座)에 오르면 뭐 하나 말이다.
분신이 주법에 묶여 본신까지 팔황신모의 곁에서 떨어지지도 못하는 것을.
그러나 그것도 현세까지만이다.
네 번째 하늘의 진체(眞體)로 돌아가기만 하면 ‘상계’와 ‘현세’에서 못 다 한 일을 할 것이다.
‘하늘의 권세’를 손에 넣어 다시는 창조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리라.
창조신이 가로막으면 창조신을 죽일 것이다.
순간 밤하늘에 떠 있는 파군성(破軍星)이 폭발할 것처럼 붉은빛을 발했다.
***
연적하가 양자강을 건너기 전날 밤, 횡산과 남경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견원지간처럼 지내던 호천맹과 남맹의 연합이다.
횡산에서 벌어진 호천맹과 사대기주들의 싸움은 남맹에도 충격이었다.
신당의 폐쇄로 유명교의 붕괴를 예상했던 남맹은 잔당들의 반격에 신경을 바짝 세웠다.
호천맹에 비해 고수가 부족했던 남맹은 결국 호천맹이 내미는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날 밤 전격적으로-남경까지에 한해서지만-연합이 결성됐다.
또 다른 일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은밀하게 일어났다.
유명교주인 팔황신모가 남경에 있던 팔황 중 넷에게 ‘전륜멸업부’를 쓴 것이다.
팔황들은 영혼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 죽어 갔다.
하지만 네 장의 ‘전륜멸업부’를 썼음에도 팔황신모의 업은 소멸하지 않았다.
동이 트기 전 팔황신모는 무영전의 숙소로 돌아갔다.
짙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팔황신모는 청류무령을 꺼내 흔들었다.
“옴 나넨 카야 네바타 데 훔.”
그녀가 육명진언으로 염매가 된 청류신을 부르자 서늘한 기운이 훅 하고 밀려왔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아무래도 내가 금사에게 또 속은 것 같다. ‘전륜멸업부’로 업을 소멸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끼던 사람들만 죽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믿을 상대는 너밖에 없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날이 밝으면 금사는 또 내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할 것이다. 그것으로 또 나를 고통스럽게 하겠지. 금사의 거짓 선동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다오.”
-구령신주(救靈神呪)를 더욱 간절하게 외우세요.
“지금까지 무수히 외웠지 않으냐? 그런데도 나는 스스로 내 손발을 잘라 냈단 말이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를 붙들고 혼신의 힘으로 구령신주를 외우세요.
“네가 나를 도울 수 있겠느냐?”
-지금까지 어머니 혼자 힘으로 했지만 금사의 유혹에 넘어갔잖아요. 제가 돕게 해 주세요.
“너를 의지하라는 말이냐?”
-네. 맞아요. 하나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금사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구령신주로 맞서야 해요.
“…….”
팔황신모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청류무령을 보았다.
유광에 이어 제자인 팔황들까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눈치 빠른 백두마군들은 진즉에 숨어들었고, 곁에는 더 이상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청류무령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와 팔황신모를 감쌌다.
-어머니. 저를 붙들고 사력을 다해 구령신주를 외우세요. 그러면 더 이상 금사의 거짓 술수에 당하지 않을 거예요.
“청류신아. 나는 이제 지쳤다. 내 혼은 염마왕에게 저당잡혔고, 업은 지워지지 않는다. 날이 밝으면 불로불사는 꿈으로 끝나겠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청류신의 위로에 팔황신모는 피식 웃었다.
자신은 연적하라는 신인(神人)의 칼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십두마병과 백두마군들처럼 염마왕에게 끌려가리라.
“연적하의 칼을 피할 길이 없구나. 그는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전륜멸업부’처럼 금사에게 방법이 있을 거예요. 금사의 이명(異名)은 ‘예비하는 자’거든요. 그러니 어머니도 포기하지 마세요.
“금사의 이명이 ‘예비하는 자’라고?”
-네, 어머니. 그러니 저와 함께 구령신주를 외워요. 금사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 봐야죠.
꺼져 가던 팔황신모의 눈에 다시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금사가 그런 존재라면, 최후의 최후에도 준비한 뭔가가 있을 터였다.
“그래, 어차피 이리 된 거. 너와 함께 운명에 맞서 보아야겠다.”
팔황신모는 청류무령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구령신주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과 뜻이 청류무령에 모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마치 작은 대롱 하나에 의지해 물속에서 숨을 쉬던 청류신처럼-간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