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58
958회. 검에는 눈이 없다
언제 약당에서 나왔는지 당운망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장주님.”
“어, 당 노인. 오늘은 좀 일찍 나왔네?”
연적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당운망을 보았다.
평소 당운망은 약당에 처박혀 지내다 식사를 할 때만 밖으로 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려면 아직 반 시진(1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왜 벌써 나와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제 독은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무슨 소리야?”
“남궁천이 폐인이 됐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림사든 호천맹이든 한번 뒤집으셔야지요?”
“이미 끝났어.”
“예? 끝났다고요?”
놀란 얼굴로 보는 당운망에게 심통이 말했다.
“쯧쯧!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우리 공자님이 그런 일을 미룰 것 같으냐? 하루 종일 약당에 처박혀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리가 있나.”
“쩝…….”
당운망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다수를 상대하는 데 독만큼 좋은 게 없어서 이번에는 좀 활약을 하나 했는데, 벌써 끝났다니.
“이레 전에 소림사의 대웅전, 장경각, 천불전을 때려 부수고 오셨단다. 내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돌아서는 당운망을 연적하가 불렀다.
“당 노인.”
“예?”
“기다려 봐.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야.”
“좋은 소식요? 어디 때려 부술 데가 있습니까?”
당운망의 물음에 연적하가 눈을 찌푸렸다.
왜 좋은 소식을 그런 쪽으로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때려 부수는 게 좋은 소식이야? 그 정도 나이면 이제 혈기가 좀 죽을 때도 되지 않았어?”
“아, 그런 게 아니었습니까?”
당운망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때려 부수는 게 아닌데 좋은 소식이 뭐가 있다고?
‘쯧쯧!’ 하고 혀를 차던 연적하가 말했다.
“남경의 일이 좀 잠잠해지면 바깥 바람을 좀 쐴까 해.”
“바깥바람요? 설마 강호행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운망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큰둥한 얼굴로 보고 있던 심통도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의 열띤 반응에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강호행은 무슨. 무림에서 손 뗐다니까. 그냥 가족들과 함께 인연이 있던 곳을 둘러볼 생각이야. 오봉산도 보고 싶고, 개봉의 풍 형님과 탁 형님이랑 무한에 있는 채연이와 소백이가 깜짝 놀라겠지?”
가 볼 곳에는 개봉의 남연객점과 연가무관도 있지만 그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당운망과 심통의 입이 헤 벌어졌다.
석경장은 천지를 경동하는 이름과 달리 고적한 곳이었다.
석경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다.
무림인들은 남천 연적하를 두려워해 석경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배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장인에게 의절을 당한 뒤로 남궁세가와의 교류도 막혔다.
거기다 남맹은 물론 호천맹과의 관계도 나빴다.
남맹이 그를 ‘남맹에 해로운 존재’쯤으로 여겼다면, 호천맹은 ‘상종하지 말아야 할 괴팍한 인물’로 생각했다.
남맹과 호천맹의 군사부에서 그의 이름은 재앙이었고, 자연스럽게 남천 연적하는 금기로 자리 잡았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연적하와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이 없었기에 강호에서 석경장은 외딴섬과도 같았다.
당운망이 급히 물었다.
“가족들이라고 하시면……. ‘직계’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석경장의 ‘식솔’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식솔’이라고 할 때 당운망은 심통과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당연히 식솔이지. 내가 좋은 소식이라고 한 말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아! 예! 그랬었지요! 조만간이라고 하심은 언제쯤일까요?”
흥분한 당운망은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조바심을 냈다.
“남의 말 안 듣지? 내가 남경이 잠잠해지면이라고 했는데.”
“아! 남경. 깜빡했습니다.”
심통이 한마디 했다.
“그 나이에 깜빡이면 죽어야지.”
“뭐라고? 그래도 내가 심가 너보다는 오래 살 거다.”
“퍽이나.”
심통과 당운망의 말싸움이 시작되자 연적하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
저주(滁州).
정원현 지하촌(池河村).
석양 무렵.
지하(池河) 강변에 사백여 명의 무인이 조용히 모였다.
삼십육 동인으로 인해 와부호에 틀어박혀 있던 호천맹의 고수들이다.
강줄기를 응시하던 화천대주 도산 진인이 호천대주 삼무검 이도에게 말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하룻밤 자고 새벽에 강을 건너는 게 어떻겠소?”
이도가 애매한 눈으로 강변에 도열해 있는 무인들을 보았다.
와부호를 떠난 지 이틀.
남맹에서 자신들의 움직임을 알 때가 지났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만날 것도 같은데…….’
남궁천의 복수를 벼르고 있을 남맹은 지난 이틀간 잠잠했다.
이도는 다시 강줄기로 시선을 돌렸다.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로 강폭이 넓었다.
‘사백 명을 실어 나르려면 아무리 빨라도 두 시진(4시간)은 걸릴 테지…….’
여기서 무리를 했다가는 자정이 돼서나 쉴 수가 있다.
“그러시지요.”
강행군에 지친 호천맹 무인들을 생각하면 쉬어 가는 게 맞았다.
도산 진인과 이도는 화천대와 호천대, 그리고 소림사 속가제자들을 이끌고 지나쳤던 마을로 향했다.
그들이 막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다.
관도 양편의 숲에서 무장을 한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백이 넘는 무인들에 의해 마을로 통하는 관도가 막혔다.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이도가 손을 들어 올리자 호천맹 무인들이 멈춰 섰다.
이윽고 이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호천대를 이끌고 있는 이도요. 당신들은 누구요?”
그런데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남맹의 맹주다. 살고 싶다면 그 자리에 무기를 버리고 돌아가라. 무기를 버린 자는 죽이지 않겠다.”
깜짝 놀란 이도가 뒤로 돌아섰다.
어느새 강으로 향하는 관도도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막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셈이다.
남맹의 맹주이자,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왕 남궁벽을 발견한 이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궁천의 복수를 위해 검왕이 나선 게 분명했다.
화천대주인 도산 진인이 이도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이 대협. 어쩌시겠소?”
“어쩌긴요. 검왕은 우리를 곱게 보내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 무슨 소리요?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소?”
“그 전에 그가 한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아!”
도산 진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그 자리에 무기를 버리고 돌아가라’는 말을 떠올린 것이다.
열세인 상황을 인정하고 돌아가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의 독문병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인에게 병기는 자신의 얼굴과도 같았다.
어느 무인이 자신의 얼굴을 적 앞에 내려놓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도산 진인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검왕이시여! 무인에게 어찌 무기를 버리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분노한 남궁벽은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 이상의 자비를 기대하지 마라.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돌아가든지, 죽든지 선택해라.”
검왕의 최후통첩에 호천맹 고수들이 술렁거렸다.
물론 그들도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생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무기를 버리고 가라는 말은 과했다.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 하겠소!”
“싸웁시다!”
“무기를 버리라니? 검왕이 황제라도 된다는 건가!”
“황제의 명에도 따르지 않았는데 검왕의 말에 따라야 할 이유가 있나!”
“검왕! 당신도 무인이라면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시간이 지날수록 말은 거칠어졌다.
급기야 검왕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화천대의 무인들, 그러니까 하남성과 산동성의 군소 방파 무인들 중 상당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봤다.
무명소졸인 그들로서는 검왕의 칼에 죽느니 무기를 버리고 가는 게 나은 까닭이다.
차가운 눈으로 호천맹 무인들을 보던 남궁벽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가 봐도 진짜 모두를 죽여 버릴 기세다.
반사적으로 호천맹 무인들도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화천대의 무인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병기를 내려놓고 관도 옆으로 주춤주춤 비켜섰다.
챙그렁.
철컥.
오십여 개의 무기가 관도에 버려졌다.
오십여 명이 빠져나간 화천대의 투기는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오십여 명이 다시 무기를 버리고 관도에서 이탈했다.
이제 화천대에 남아 있는 인원은 이백여 명.
그래도 호천대와 소림사 속가제자들은 끝까지 무기를 버리는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남궁벽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검에는 눈이 없으니 무정하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곧이어 남궁벽은 호천맹 무인들을 덮쳤다.
호천맹의 앞뒤를 막고 있던 남맹 무인들도 ‘와아아!’ 소리치며 호천맹을 향해 달려 나갔다.
검왕 남궁벽.
지금이야 남천 연적하의 위명에 눌려 빛이 바랬지만, 그는 검 하나로 무림을 휩쓸던 절대의 고수.
마치 양 무리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그는 소림사 속가제자들을 유린했다.
“악!”
“으윽!”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운이 없는 사람은 목이 잘렸다.
수십 명의 소림사 속가제자들이 쓰러지면서 관도 중심부가 뻥 뚫렸다.
소림사 속가제자들에 이어 호천대와 화천대까지도 짚단처럼 썰려 나갔다.
남궁벽이 목표로 한 호천맹의 선두에 도착하기까지 채 일각(1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시체가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
화천대주 도산 진인이 눈앞까지 다가온 남궁벽을 향해 소리쳤다.
“검왕이여! 우리는 사마외도가 아니외다! 그러나 그대는 우리를 사마외도 베듯 하는구려!”
그러자 남궁벽이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검에는 눈이 없다 하지 않았느냐.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벨 뿐이다. 이제라도 무기를 버리겠느냐?”
“사문에 누가 되느니 죽는 게 낫소.”
“유감이군.”
남궁벽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채채챙-.
도산 진인과 남궁벽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뒤늦게 이도가 달려와 싸움에 합류했다.
이 대 일의 싸움이지만 남궁벽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한순간 남궁벽의 검이 빛에 휩싸였다.
두 사람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검강을 쓴 것이다.
챙-! 채앵-!
단숨에 두 자루의 검이 잘렸다.
황망한 눈으로 반토막 난 검을 보는 도산 진인과 이도의 어깨에 남궁벽의 검이 깊게 들어왔다 나갔다.
검을 쥐고 있던 두 사람의 팔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러나 도산 진인과 이도는 포기하지 않고 성한 손으로 반토막 난 검을 잡았다.
하지만 좌수검을 수련하지 않은 그들이 검왕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남궁벽의 검이 도산 진인과 이도의 왼쪽 어깨를 한차례씩 쑤셨다.
그제야 반토막 난 검들이 지면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두 팔이 움직이지 않자 이도는 힘줄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검왕! 잔인하구나! 차라리 죽여라!”
그러자 남궁벽이 차갑게 말했다.
“배가 불렀구나. 내 아들은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고작 두 팔을 못 쓰게 됐다고 죽여 달라는구나.”
도산 진인과 이도는 검왕을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들의 복수라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도산 진인과 이도가 처참하게 당하자 살아남은 호천맹 고수들은 무기를 버렸다.
검왕의 기세로 보아 무기를 들고 있는 한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
그렇게 짧지만 격렬했던 싸움이 끝났다.
도산 진인은 허탈한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유명교나 마교를 상대로 싸울 때만큼이나 처참한 상황이다.
오연한 얼굴로 서 있는 검왕을 향해 도산 진인이 말했다.
“검왕이여. 이제 호천맹과 남맹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소. 청운검의 일은 사고였으나, 당신은…….”
남궁벽이 그의 말을 끊었다.
“결과는 같다. 너희가 나의 마지막 남은 희망을 짓밟았으니……. 나도 너희를 짓밟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