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
96회. 너는 나에게 모욕을 줬어
개봉.
용희루.
점심 무렵, 호위무사들의 숙소에 일반인들이 찾아왔다.
탁고명이 풍연초를 위해 그의 처와 자녀들을 부른 것이다.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을 주선할 정도로 풍연초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들 앞이라고 풍연초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처 임지령이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누워 있어도 돼요.”
“괜찮아. 아직은…….”
말과 달리 풍연초의 머리는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래도 의연하게 앉아 있는 건 이 모습을 기억해 주기 바라서다.
오늘 이후로는 찾아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다.
억지로 찾아와도 만나 주지 않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여기서 더 망가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너희도 아버지에게 인사해야지.”
임지령의 재촉에 운비와 희연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빨리 건강 회복하세요.”
“……아빠, 집에 언제 와요?”
좀 큰 오빠와 달리 열세 살 희연은 아직 풍연초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그래서 언제 오느냐고 묻고는 풍연초를 빤히 보았다.
“……곧 가마. 그때까지 엄마랑 오빠 말 잘 들어야 한다.”
“네.”
찬찬히 가족들을 보던 풍연초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읍, 쿨럭!”
검은 피가 손바닥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깜짝 놀란 임지령이 다가가자 풍연초가 몸을 비틀어 거부를 표시했다.
“……이제 그만 가. 미안해.”
“다시 올게요.”
임지령은 자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탁고명이 근처에 있던 호위무사를 불렀다.
“신 형, 형수님과 조카들 배웅하고 올 동안 누구도 얼씬 못 하게 하쇼. 누구라도 내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게 하면 신 형부터 죽일 거요. 알았소?”
“예. 염려 마십쇼.”
신정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탁고명의 무위와 성질을 알기에 감히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탁고명이 앞서고 그 뒤를 임지령과 두 아이가 따라갔다.
기루라고 하지만 아직 장사를 시작하기 전인지라 안마당은 한산했다.
기루 앞에서 세 사람과 작별한 탁고명은 재빨리 숙소로 달려갔다. 잠시 신정수에게 맡기고 오긴 했지만 영 미덥지 않아서다.
숙소에 도착한 탁고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멈추시오!”
막 방문을 열려던 사해상방 방주 상재용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호위무사가 주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니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탁 호위, 지금 나에게 한 소리인가?”
탁고명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정수를 쏘아보았다.
신정수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탁 형, 나도 만류했지만 방주님께서 상태를 봐야겠다고 하셔서…….”
탁고명의 시선이 신정수에서 상재용에게로 옮겨갔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신정수를 탓할 수는 없었다.
“방주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말과 함께 탁고명이 마루 위로 올라갔다.
상재용이 고까운 눈으로 탁고명을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나에게 한 소리냐고 물었네만.”
“그렇습니다. 제 허락 없이는 누구도 형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나치군. 자네는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나?”
“…….”
“이곳의 주인은 날세. 자네나 풍 호위는 모두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주인인 내가 자네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정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방주님은 기루의 주인이지 풍 형님과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허허. 이거야 원. 그래서 주인인 내가, 고용한 사람의 상태를 보겠다는데도, 굳이 막으시겠다?”
“막는다고 한 적 없습니다. 제가 앞장선다고 했습니다.”
“그전에 분명 멈추라고 소리치지 않았나?”
“…….”
“무위가 뛰어나니 주인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닌가. 이거야 원. 낭인이 안하무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쯧!”
탁고명이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상재용을 바라보았다.
살수가 있어서 지키겠다는데 왜 삐딱하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그 눈은 뭔가? 지금 나를 겁박하는 건가!”
상재용이 호통치자 그의 수신호위 다섯이 마루 위로 뛰어 올라왔다.
호위장 유성검 강문이 검을 뽑아 하단으로 겨누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다.
수신호위들은 마치 탁고명이 상재용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탁고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수신호위들은 상재용이 특별히 고용한 명문 출신들로 낭인들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상재용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 몰라도 끝까지 탁고명을 물고 늘어졌다.
“뭣들 하는가! 탁 호위가 나를 능멸하는 걸 눈뜨고 구경만 할 셈인가!”
상재용의 말에 다른 네 명의 수신호위도 검을 뽑았다.
강문이 호위들을 대표해 말했다.
“탁 호위, 저항하지 말고, 우리가 하라는 대로 따르게. 오해가 있다면 더욱 그래야 하네.”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것은 포로가 됨을 의미한다.
탁고명이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급한 마음에 멈추라고 한 말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여기서 자신이 끌려가면 풍연초를 지킬 사람이 없게 된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한바탕 칼춤을 추느냐, 그냥 잡혀가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다.
덜커덩.
갑자기 방문을 열고 풍연초가 밖으로 나왔다.
“탁 아우, 그냥 가. 어차피 나는 곧 죽어. 괜히 나 때문에 욕볼 거 없어. 쿨럭!”
기침과 함께 풍연초의 입에서 독혈이 튀었다.
“형님!”
탁고명이 손을 뻗자 풍연초가 쳐 냈다.
“가라고 인마! 내가 지금 혀를 물고 죽어야 떠날래?”
기력이 다한 듯 이내 풍연초는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그 소란에 흩어져 있던 용희루의 호위들까지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상재용이 모여든 용희루 호위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도 탁 호위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뒤를 막아라! 그가 나를 능멸했으니, 죗값을 치르기 전까지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예!”
상재용의 말에 용희루 호위들이 도검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돈을 보고 모여든 낭인들인지라 그들은 무조건 상재용의 명에 따랐다.
“허!”
탁고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상재용의 말에 조금 전까지의 동료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칼을 뽑는다.
그들 중에는 모든 것을 지켜본 신정수도 있었다.
누가 옳고 그른지보다 물주의 명을 더 중요시 여긴다는 소리다. 그건 수신호위인 명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도 협과 의는 없었다.
“이거 순 도둑놈들이네.”
중얼거리던 탁고명이 천천히 박도를 뽑았다.
연유야 모르지만 상재용은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급해서 멈추라고 한 말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갈 정도로?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지만 힘을 가진 놈이 그렇다는데 도리 없다.
‘씨벌! 갈 때 가더라도 하나라도 더 데리고 간다.’
일촉즉발의 순간.
멀리서 귀에 거슬리는, 상당히 귀에 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흐흐! 이건 또 무슨 지랄 같은 상황이지?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그렇지 않습니까? 공자님?”
구천노도 심통의 말에 연적하가 툴툴거렸다.
“심 노인, 냄새 타령 그만하고. 저것들 좀 싹 치워 봐. 무슨 기루가 이래? 용희루에 맞게 찾아온 거야? 개봉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창녀들의 소굴이라면서?”
다 죽어 가던 풍연초가 눈을 번쩍 떴다.
“네놈들 이제 큰일 났다…….”
뒤이어 탁고명이 들고 있던 박도를 마룻바닥에 ‘콱’ 박으며 소리쳤다.
“와! 썅!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심 노인! 연 아우! 이것들이 무슨 짓 하는지 봤지! 봤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칼이 손에 안 잡히네. 이 개 같은 놈들 좀 어떻게 해 줘!”
심통이 휘적휘적 마당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본래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가면 개 떼에 업신여김을 받는 법이오. 으흐흐! 개놈들아. 개장수님 오셨다. 조용히 칼 내려놓아라.”
마당에 있던 기루의 호위무사 여섯이 심통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이런 미친!”
“늙은이가 노망이 났구나!”
심통이 산책하듯 걸어가며 유엽도를 슥슥 그었다.
‘악!’ 소리와 함께 호위무사들이 차례대로 병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여섯 명의 호위무사들은 피가 철철 나는 손목을 붙잡고 덜덜 떨었다.
이윽고 전각에 도착한 심통이 마루 위의 수신호위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노부가 올라갈까? 아니면 너희가 내려올 테냐?”
호위장 강문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노선배는 누구시오?”
“으흐흐! 왜? 용서해 달라고 빌기라도 하게?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놈을 가르친 스승도 병신이고, 병신들을 제자로 둔 사문도 병신이다. 이젠 못 참겠지? 그럼 당장 튀어 내려오거라. 바로 썰어 주마.”
“이익!”
이를 갈던 강문이 수신호위들에게 소리쳤다.
“뭘 보고 있나? 저 늙은이를 죽여! 당장 죽이라고!”
말과 함께 강문이 마루 아래로 내려가자 네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마루에 홀로 남겨진 상재용이 곤혹스러운 눈으로 탁고명을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수신호위들도 고수지만 저 늙은이를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탁고명이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상재용에게 말했다.
“세상이 만만하지? 사람들도 다 네 발밑에 있고. 하지만 어쩌냐? 너 오늘 제대로 똥 밟았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아마 개처럼 기어야 할걸?”
“허튼소리.”
“설마 저 수신호위들을 믿는 건 아니겠지?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다 박살 날걸? 시작했다. 봐라. 하나, 둘, 셋. 이제 둘 남았네. 아니, 넷, 다섯. 끝났다.”
마당을 보는 상재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탁고명의 말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신호위들이 널브러졌다.
잠시 후 용희루의 호위무사들과 상재용의 수신호위들이 전각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상재용만 어색하게 마루 위에 남아 눈치를 살폈다.
탁고명은 물론 연적하와 심통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풍연초에게 쏠려 있었다.
잠시 후 풍연초와 대화를 끝낸 연적하가 심통을 돌아보았다.
“심 노인, 얼른 가서 그 적혈루 사람이나 찾아봐. 어떤 놈들 짓인지 빨리 알아야겠어.”
“예.”
심통이 막 떠나려고 할 때다.
머뭇거리던 상재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혹시 살수를 찾는 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이냐? 만약 흰소리를 한 것이면 네놈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심통이 눈알을 부라리자 상재용은 머리를 격하게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상재용은 진심으로 저들을 도울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들이 죽방을 찾아가면 추엽진의 청부도 금방 드러난다.
그렇다면 선수를 쳐야 한다.
모든 게 포목상 장문호의 부탁으로 추엽진이 한 짓이라는 걸 밝히는 거다.
그리고 추엽진이 자신을 물고 늘어지기 전에 그를 정리하면 된다.
어차피 장문호만 족쳐도 사실 확인은 가능하니까.
천살마안 척도광에게 슬쩍 운을 떼어 놓았으니 연락만 하면 될 것이다.
꿀꺽.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라고 생각하니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