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1
961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르니 애지
다음 날 오후.
의천문의 태상인 의천검존이 호천맹을 방문했다.
때마침 정문에 나가 있던 총사부의 공손방이 의천검존을 맹주의 집무실까지 모시겠다고 나섰다.
그와 함께 걷던 의천검존이 넌지시 물었다.
“소림사 소문은 들었네만, 정확히 어떤 상황인가?”
“호천맹 지원부대가 남맹에 밀려 와부호까지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소림사의 지원부대를 만났지요. 그걸 모르는 남맹이 호천맹을 몰아붙이다 소림사에 된통 당한 겁니다. 하필 그날 밤에 폭우가 쏟아져 피차 신원 확인이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난전의 와중에 남궁천이 크게 부상을 입어 죽다 살아났고요. 소림사의 말로는 살아났지만 폐인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허어! 후기지수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인데 어쩌다……. 쯧!”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직후, 소림사에 누군가 손을 썼다고 합니다.”
공손방은 딱히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그렇게 개떡같이 말했음에도 의천검존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전각을 부쉈다지?”
“대웅전, 장경각, 천불전이 가루가 됐답니다.”
“소림사에서 하산한 제자들을 불러들였다는 소문은 들었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의천검존은 신임 장문인인 공백 대사가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설마하니 남맹과의 전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려고 그러는 것일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의천문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라고 할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손암이 공백 대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공손암? 전에 남천에게 당해 코뼈가 내려앉았다던 그 사람을 말하는 건가?”
“예.”
“쯧! 보내도 하필 그런 사람을…….”
의천검존은 총사도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적하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진 사람을 소림사에 보내다니.
같은 사람에게 당했으니 마음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젓던 의천검존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 재건에 집중해야 해서 이전과 같은 참여가 어렵다고 하셨답니다.”
“발을 빼겠다?”
“그보다는 무너진 사찰을 다시 세울 시간이 필요하시다고…….”
공손방은 공백 대사를 위한 변명을 했다.
소림사 없이 남맹과 싸워야 하는 육파이문의 결속을 위해서다.
하지만 노회한 의천검존은 그런 뻔한 소리에 넘어가지 않았다.
“흥! 건축이야 목수들이 하는 거고. 무승들이 사찰을 짓는 게 아니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내부가 혼란하면 외부의 일에 집중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잘 들었네. 소림사가 발을 뺀다니 유감이구먼.”
“…….”
공손방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무더위지만 의천검존과의 대화에 심력을 쏟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맹주의 집무실인 무문각에 도착했다.
공손방은 의천검존에게 읍을 해 보이고 달아나듯 자리를 떠났다.
***
무문각.
마침내 무극상인과 의천검존이 마주 앉았다.
무극상인이 의천검존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제가 아끼는 우전차(雨前茶)입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소림사가 발을 뺐다고 들었소. 검왕을 상대하는 일도 신중하게 해야 할 게요. 의절을 했다 해도 남천의 사람됨이 워낙 괴팍해서.”
의천검존은 거두절미(去頭載尾)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궁벽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그와 관련된 문파도 재난을 당할 게 분명했다.
문파의 흥망이 걸린 문제 앞에서 차 맛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극상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림사 천불전 앞에 ‘사람을 상하게 한 죄’라고 적혀 있었다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남궁세가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오. 그런데도 맹주는 검왕과 싸울 생각이시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천하십대고수들의 공정한 싸움이라면 결과가 어떠하든 남천도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그건 검왕의 체면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니까요.”
“흐음!”
의천검존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인 듯한 얼굴이다.
아무리 연적하가 제멋대로라 해도 천하십대고수들끼리의 공정한 싸움을 두고 뭐라 할 것 같지는 않아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 검왕을 상대할 생각이시오?”
“처음부터 차륜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지요. 한 사람씩 시간을 충분히 두고 검왕과 싸우는 건 어떻습니까?”
“시간을 두자?”
“그렇습니다. 열흘이건 한 달이건 검왕에게 정양할 시간을 주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일석이조?”
“천하십대고수들의 싸움이 시작되면, 검왕도 남맹의 운영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남맹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남경의 문제를 전광석화처럼 매듭짓는 겁니다.”
“과연! 검왕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는 동안 남경의 이권을 호천맹으로 가져오시겠다?”
의천검존은 무극상인의 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도나 닦던 사람이 저런 쪽으로 머리 굴리는 걸 보면 타고난 것 같다.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검왕도 경험이 많은 사람인데 맹주가 원하는 대로 따라오겠소?”
“검왕에게 깊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그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그를 거칠게 밀어붙이는 겁니다.”
“거칠게 밀어붙인다?”
“적당한 때에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싸움으로 이어질 겁니다. 지금의 검왕에게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많으니…….”
“격장지계를 쓰자는 것이구려.”
“검왕이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이라면 걸려들지 않겠습니까?”
의천검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상인의 지적대로 지금의 검왕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격장지계라…….’
유치한 수법이지만 시기적절하게 쓰면 그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
남직례성.
합비.
여강현 석경장.
팔월에 접어들자 청류신은 심통이나 당운망보다 더 늙어 보였다.
단지 늙기만 한 것이 아니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이를 이기지 못한 육체는 점차 쇠약해져 갔다.
빳빳하던 허리도 구부정하게 휘었고, 깨끗하던 얼굴은 검버섯으로 뒤덮였다.
당운망이 온갖 약을 다 가져다줬지만 소용없었다.
청류신은 당운망이 약을 줄 때마다 ‘병들기 전에 늙어 죽을 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객청에서 보냈는데, 심통과 차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다 사십오 일째 되던 날.
정오 무렵,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심통에게 청류신이 물었다.
“누구세요?”
“심통이다. 그건 새로운 농담이냐?”
“…….”
그러나 청류신은 의아한 눈으로 심통을 볼 뿐이었다.
뒤늦게 심통은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누군지 정말 모르느냐?”
“예.”
“그럼, 너는 누군지 아느냐?”
한참 생각하던 청류신이 되물었다.
“저는 누군가요?”
“네 이름은 청류신이다. 이제 기억이 나느냐?”
“청류신……. 모르겠네요.”
“그럼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구나?”
“어딘데요?”
“여기는 석경장이다. 달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느냐?”
“신모(神母)님요.”
“끙!”
심통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필 그 빌어먹을 마녀의 기억만 남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네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구나. 신모는 잊어라.”
“신모님을 만나야 해요.”
“그 마녀는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니 만날 수 없다.”
“죽었다고요?”
청류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는다는 개념마저 흐릿한 그녀에게 심통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모님에게 보내 주세요.”
“죽었다고 하지 않든.”
“보내 주세요.”
게속된 그녀의 보챔에 울컥한 심통이 화를 버럭 냈다.
“이년아! 그 마녀는 죽었다고! 죽은 년을 무슨 수로 만나려고!”
“…….”
깜짝 놀란 청류신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심통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씨펄! 이거 너무한 거 아니오! 갑자기 늙어 죽게 된 것도 서러운데, 정신까지 온전치 못하게 하다니! 그러고서 무슨 사람에게 공경받기를 바라! 이 시발 것들아!”
심통의 외침에 석경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란에 연적하와 남궁연을 비롯한 석경장 식솔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늘어나자 청류신은 고개를 숙이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심 노인, 왜 그래?”
연적하의 물음에 심통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청류신이…… 저를 못 알아봅니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
연적하는 청류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그를 보던 청류신과 연적하의 시선이 얽혔다.
그녀의 혼탁한 눈동자를 본 연적하가 남궁연에게 물었다.
“누님. 청류신의 눈이 좀 이상한데요. 저것도 주문의 영향인가요?”
“아니. 그보다는 갑자기 늙으면서 뇌가 퇴화한 거야. 흔히들 망령이 났다고 하는 그런거…….”
“아, 망령.”
심통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자가 기억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신모랍니다. 자기를 저 지경으로 만든 신모만 기억한다 이겁니다. 그리고 신모에게 보내 달라고 떼를 쓰는데……. 제가 못 참고 한 소리 했습니다.”
“쯧! 그런다고 하늘을 욕하면 되나.”
“아니, 시펄! 신들이 있다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왜 한 사람에게 재수없는 일을 다 몰아주냐 이겁니다.”
“참아.”
“예, 참아야지요. 하늘이 젓 같은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능력이라고는 쥐 젓만큼도 없는 제가 참아야지요.”
“심 노인.”
“예.”
“어차피 그렇게 됐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해.”
“좋은 게 뭐가 있다고요.”
“그래도 사십구 일 동안 세상 구경을 하잖아. 방울에 들어간 순간 청류신은 끝난 거였어. 덤으로 사십구 일을 더 산 거라고. 마지막에 좋은 추억도 만들고.”
청류신이 사십오 일의 절반을 심통과 함께 보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뭐합니까. 기억을 못 하는데…….”
심통은 청류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그래도 망령이 나기 전까지 좋았을 거야. 심 노인이 난리 치는 걸 보니까, 그랬을 것 같아.”
“에이! 당가야.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그, 그럴까…….”
심통의 박력에 당운망은 거부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갔다.
모였던 사람들도 하나 둘 흩어지자 남궁연은 석경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중 두 사람에게 청류신의 간병을 맡겼다.
뒤처리를 마친 그녀가 아직 남아 있던 연적하에게 말했다.
“남자는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애들 같아.”
“왜요?”
“심 노인을 봐. 그렇게 좋아했으면 돌봐 줄 생각을 해야지. 혼자 울컥해 가지고 술을 마시러 나가잖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르니 애지.”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궁연의 말대로다.
그녀가 외면했다면 망령이 난 청류신은 방치되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남궁천이 떠올랐다.
“누님. 우리도 형님 문병을 가야 하지 않아요?”
“그래.”
대답하는 남궁연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오라버니와 의절한 부친.
성공을 위해 폭주하던 부친의 바람과 달리 남궁세가의 미래는 청류신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갈까요?”
“그러자.”
남궁연의 맥 빠진 음성에 연적하는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기운 없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했다.
남궁세가의 불운이 전부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다.
장인어른이 의절을 선언할 만도 하다.
자신이 장인어른이라면 그보다 더한 소리를 했을 게다.
천하제일인이 되면 마냥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현실은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다.
‘최소한 나 때문에 벌어진 일들은 수습해야 할텐데…….’
그는-망령 난 청류신을 뒤로하고 술 마시러 나간 심통처럼-’네 번째 하늘’로 훌쩍 떠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