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3
963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검왕 남궁벽이 정원현에서 호천맹 무사들을 학살하다시피 한 일은 무림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 일로 호천맹의 강력한 반격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호천맹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검왕은 ‘그 기세를 몰아 남경으로 갈 것이다’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합비로 돌아갔다.
마치 아들의 복수라도 하듯 검왕의 활약은 딱 거기까지였다.
남경에 무상도제 장무덕이 있으니 그와 직접 맞부닥치지 않으려고 자제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정원현에서의 처참한 싸움 이후 남맹과 호천맹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보기만 그럴 뿐이다.
무극상인과 의천검존 이의정은 남경으로 출발했고, 하남성과 호광성의 육파일문을 중심으로 후속 지원 부대가 꾸려지고 있었다.
영산현.
정오 무렵, 영산현으로 이두마차 두 대가 들어섰다.
석경장의 마차들이다.
합비에서 영산현까지는 대략 사백오십 리(약 180킬로미터).
오 일간의 여정으로 마차는 흙먼지에 덮여 있었다.
그래도 충분히 쉬면서 왔는지 네 마리 말들은 건강해 보였다.
마부가 가까운 음식점 앞에 마차를 세웠다.
지금까지 마을에 들를 때마다 해오던 일인지라 따로 묻거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석경장 식솔들이 우르르 내렸다.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린 이는 호호백발의 노파, 청류신이었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고, 허리도 구부정하게 굽은 그녀의 양팔을 월아와 금아가 잡았다.
이제 그녀는 다른 이의 도움이 없으면 혼자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고, 그런 그녀를 돕는 건 월아와 금아의 몫이었다.
“고맙다. 얘들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청류신의 인사에 월아와 금아는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그간 심통과 청류신이 친하게 지내는 걸 보았던 그녀들은 청류신을 집안의 어른처럼 대접했다.
석경장 식솔들이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자 마부들은 때마침 나온 점소이에게 마방 위치를 물었다.
“길 따라 쭉욱 가시다가 오른편으로 꺾으면 마방이 보일 거예요. 그런데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어디 부임이라도 하러 가는 관원의 가족인가요?”
“그런 건 몰라도 된다. 행여나 저분들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경을 칠 테니 극진하게 모시도록 해라.”
“에이! 관원 맞네. 영산현이에요? 아님 라전현? 설마 무한으로 가는 건 아니겠죠?”
“그 녀석, 몰라도 된다니까 그러네.”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에요. 라전현으로 가는 거면 북쪽으로 가야 하니 상관없는데. 무한으로 가는 거면 조심하시라고.”
“무한으로 가는 거면 조심하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영산현에서 무한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계속 가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등가산과 세단산을 만나게 되거든요.”
“왜? 도적들이라도 있느냐?”
“등가산에는 얼마 전에 호랑이가 들어앉았다고 하고, 세단산에는 도적들이 있거든요. 도적들이야 은자 좀 쥐어 주고 간다 쳐도, 호랑이는 말이 안 통하잖아요.”
“그런 일이 있었군. 알겠다.”
“헤헤, 그런 의미에서 다만 몇 푼이라도…….”
점소이의 말에 마부는 동전 몇 개를 던져 주었다.
왜 굳이 밖에 나와서 말을 거나 했더니 저러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도 마부에게는 꽤나 요긴한 정보니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윽고 이두마차 두 대가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갔다.
“연 대협, 남궁 부인, 당 노야, 심 노야…….”
식사 중에 청류신이 갑자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연적하와 남궁연, 당운망, 심통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 석경장에 오던 날처럼 맑은 눈을 한 청류신이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청류신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깜짝 놀란 월아가 그녀의 몸이 쓰러지지 않게 보듬어 안았다.
급히 청류신에게 다가간 심통이 그녀의 경동맥에 자신의 손등을 가져다 댔다.
희미하지만 아직은 맥이 뛰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입니다.”
심통의 말에 석경장 식솔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죽은 줄 알았네.”
연적하의 말에 다들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월아가 말했다.
“저어, 사부님. 노태태(老太太)께서 숨을 안 쉬세요.”
“…….”
멈칫하던 심통이 다시 손을 뻗었다.
과연! 방금까지 연약하게 뛰던 맥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었습니다.”
조금 전부터 수상쩍은 눈으로 지켜보던 주인장이 빠르게 달려왔다.
“무, 무슨 일입니까? 설마 죽은 겁니까?”
음식점 주인, 신소삼이 굳은 얼굴로 손님들을 살폈다.
그는 노파가 음식이 목에 걸려 죽었거나,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다.
넋 나간 얼굴로 서 있는 심통을 대신해 당운망이 나섰다.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었으니 그런 줄로 알게.”
머뭇거리던 신소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사람이 죽으면 관에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운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청류신을 장사 지내고 가야 하는 까닭이다.
“마음대로 하게.”
“예, 예.”
굽신거리며 물러난 신소삼은 즉시 점소이를 관으로 보냈다.
식사 중이던 손님들이 하나 둘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사람이 죽은 곳에서 더 이상 식사를 할 수가 없어서다.
신소삼은 씁쓰름한 얼굴로 손님들을 배웅했다.
‘젠장. 하필 이곳에서 죽을 게 뭐람. 이왕 죽을 거면 소선각에서 죽지. 소문나면 손님이 뚝 떨어질 텐데…….’
자리로 돌아온 신소삼은 자신이 얼마나 손해를 볼지 부지런히 계산했다.
‘오늘 하루는 공쳤고, 며칠은 재수 없다고 손님이 안 들 테니……. 은자 열닷 냥 정도를 날리게 생겼구나.’
한숨을 푹푹 쉬던 그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것들은 뭐지?’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크게 놀란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표정들이다.
그래도 느긋하게 관원을 기다리는 걸 보니 살인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다.
뒤늦게 마음의 여유가 생긴 그는 손님들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딸로 보이는 아이 하나에 노인 둘과 그들을 시중드는 십 대 계집아이 둘.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인 듯싶지만 십 대 계집아이들이 따로 노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거기다가 노부부도 아니고 노인 둘은 또 뭐란 말인가?
그가 한참 손님들의 정체를 두고 고민할 때 점소이와 관원 셋이 들어왔다.
곽의정 주부(主簿, 현의 실무 담당자)와 포방의 포졸들이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신소삼은 곽의정 주부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곽 주부님. 어서 오십시오.”
“신 노판(老板), 사람이 죽었다고?”
“예, 저쪽에서 식사를 하시다가 말고 웬 노부인께서 갑자기 죽으셨습니다.”
곽의정이 슬쩍 안쪽을 살폈다.
젊은 부부와 아이, 노인 둘에 십대 계집 둘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표정들이 지나치게 무덤덤하군?”
“저도 그게 조금 이상합니다. 처음 노부인이 죽을 때부터 저랬습니다. 아무튼 빨리 좀 처리해 주십쇼. 장사도 잘 안 되는데 이러다가 문 닫을 판입니다.”
“알겠네. 어차피 이곳의 조사는 나온 김에 끝낼 걸세. 그래도 장사는 내일부터 재개하도록 하게.”
“예,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윽고 곽의정은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본관은 영산현의 주부인 곽의정이라 하오.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조사를 나왔는데, 잠시 노부인의 시체를 봐도 되겠소?”
이제는 정신을 차린 심통이 연적하를 대신해 나섰다.
“그러거라.”
“…….”
대뜸 돌아온 반말에-노부인을 곁눈질하던-곽의정이 멈칫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포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포졸 둘이 익숙한 동작으로 노부인의 시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사이 곽의정은 반말을 한 노인에게 물었다.
“노부인은 뉘시며, 동행한 여러분들과는…….”
심통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이름은 청류신이고, 석경장의 빈객이었다. 너도 귀가 있다면 합비에 있는 석경장의 이름은 들어 보았겠지?”
“호, 혹시, 남천 대협과 십전무후 여협의 그 석경장을 말하는 것입니까?”
곽의정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다른 무림인들과 달리 남천 연적하는 황제에게 친필 휘호까지 받은 거물 중의 거물이다.
저 무시무시한 금의위가 그의 뒤를 봐준다고 하던가.
“합비에 다른 석경장은 없다.”
“…….”
깜짝 놀란 곽의정은 급히 포졸들을 물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협,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가까운 곳에 장지(葬地)로 삼을 만한 곳이 있느냐?”
“있습니다.”
곽의정의 허리가 더욱 굽어졌다.
그곳이 석경장의 눈에 찰지가 문제지만 시체를 묻을 곳은 많았다.
“안내해라.”
“지금요?”
곽의정이 황망한 눈으로 노인을 보았다.
석경장의 빈객을 아무 곳에나 묻어도 되는지 걱정이 됐다.
“당연히 지금이지. 우리가 시체와 함께 몇 날 며칠을 지내야 한단 말이냐?”
“송구하오나 원하신다면 지관을 불러 명당 자리를…….”
“됐다. 우리 공자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시체를 묻을 조그마한 땅만 있으면 된다.”
“예, 예. 그런 곳이라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곽의정은 몇 달 전 병사한 전임 현승(縣丞) 대인의 장지를 구하러 다닐 때 봐 둔 땅을 떠올렸다.
그곳이라면 석경장의 눈에도 얼추 맞을 것 같았다.
곽의정은 석경장 사람들을 인근의 연화촌으로 모시고 갔다.
연화촌 남부의 야트막한 산.
곽의정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사람을 써서 양지바른 곳에 노부인의 시체를 안치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비석이 청류신의 무덤 앞에 세워졌다.
묵묵히 묘비를 보던 심통이 연적하에게 물었다.
“공자님, 제가 몇 자 적어도 되겠습니까?”
연적하는 그의 착잡한 심정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통이 검지손가락으로 비석에 글을 새겼다.
[친우(親友) 청류신의 묘.]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새겨진 글을 본 곽의정은 그 놀라운 공력에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아랫사람을 자청하는 노인이 저럴진대, 윗사람은 오죽할까.
‘구천노도 심통인가? 아니면 삼보절명 당운망인가?’
그가 노인의 정체를 두고 고민할 때 그 아래 한 줄이 더 새겨졌다.
[구천노도 심통.]그가 손을 털고 물러나자 당운망도 비석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공력이 일천한 당운망은 단 한 글자도 새기지 못했다.
보다 못한 연적하가 손가락을 튕겼다.
구천노도 심통의 이름 아래 삼보절명 당운망의 이름이 나타났다.
당운망은 아쉬운 얼굴로 비석과 봉분을 보다가 돌아섰다.
***
남직례성.
남경.
무극문.
남직례성에서 무극문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봉문에 이어 남맹이 호천맹에서 독립해 나간 뒤로 모든 게 변했다.
남맹과 호천맹이 한 식구일 때 무극문은 남경의 패자였지만, 지금 무극문은 개밥의 도토리나 마찬가지였다.
남직례성에서 남맹의 위세는 절대적이었고, 남경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군소 방파들의 방문이 줄었다.
그러다 이문사방을 두고 남맹과 호천맹이 맞부닥친 뒤로 무극문은 남경에서 섬처럼 고립됐다.
술시 정(오후 8시) 무렵.
두 개의 인영이 높게 솟은 무극문의 담을 넘어갔다.
어찌나 경공술이 고절했던지 호위무사들은 외부인의 침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유령처럼 무극문을 가로지르던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안채의 가장 뒤편에 있는 전각 앞이었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방문을 열고 무상도제 장무덕이 마루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쯧! 여전들 하시구려.”
무극상인과 의천검존을 본 장무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멀쩡한 대문을 두고 왜 담을 넘어다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