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5
965회. 백호는 영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검왕 남궁벽은 복잡한 눈으로 의천검존을 보았다.
무인에게 승부란 자존심의 문제다.
특히나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상대를 꺾어야 한다.
그런데 의천검존이 마지막에 무승부를 선언한 것이다.
비무는 물론 마지막 마무리까지도 밀린 느낌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의천검존이 무승부를 선언했으니 그가 재대결을 요청하면 따라야 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내외공의 진전이 없으면, 오늘 받은 이 모멸감을 다시 느끼게 될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패자임을 아는 까닭이다.
침묵하던 남궁벽이 납검을 하며 물었다.
“허면, 어쩌시겠소?”
대답은 호천맹주인 무극상인의 입에서 나왔다.
“두 분이 다시 날을 잡아 승부를 보셔야겠지요. 허나 빈도 역시 정원현의 일로 검왕에게 받아야 할 빚이 있으니 빈도와 먼저 겨루어 주셔야겠습니다. 물론 염치없게 지금 싸우자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정양할 시간을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보름이면 충분하오.”
무극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검왕의 내외상이 가벼운 모양이다.
“허면 보름 후인 스무닷새 날 정오에 이 자리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겠지요?”
“이의 없소.”
남궁벽은 남경의 문제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패자인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남경을 거론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은 무엇을 해도 끌려다니는 상황인 까닭이다.
그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호천맹의 세 천하십대고수들은 더 이상 용건이 없는지 남궁벽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천하십대고수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
라전현.
등가산 초입.
정오 무렵, 이두마차 두 대가 등가산 초입의 주막에 멈춰 섰다.
이윽고 두 대의 마차에서 남녀노소 일곱이 내렸다.
석경장의 식솔들이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심통이 연적하에게 다가갔다.
“공자님. 더 가 봐야 마을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 쉬는 김에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가시지요?”
“그럴까?”
연적하도 반대하지 않았다.
괜히 산중에서 건량을 먹느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막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서 빈자리가 없었다.
별수 없이 석경장 사람들은 길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야 했다.
그들이 대충 자리를 잡자 주막에서 십 대로 보이는 소녀가 다가왔다.
“혹시 점심을 드시러 오신 건가요?”
아직 점심을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 묻는 것 같았다.
심통이 일행을 대신해 나섰다.
“그렇다. 이곳에서 잘하는 요리가 있느냐?”
“점심으로는 동파육(東坡肉, 돼지고기 찜)과 우육탕(牛肉湯, 소고깃국)이 준비되어 있어요.”
주문을 받지 않고 정해진 걸 판다는 소리였다.
하기야 길 옆의 주막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팔 리가 없다.
“그것으로 머릿수에 맞춰 내오거라. 그런데 무슨 날이냐? 이 외진 곳에 웬 손님이 저리 많아?”
“아, 등가산을 넘으려고 기다리는 분들이에요.”
“기다린다고?”
“예, 최근에 호랑이가 출몰하고 있어서요. 산을 넘는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리시는 거지요.”
“그런 것치고 꽤 많이 모였는데?”
“보통 호랑이가 아니니까요. 라전현의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가 물려 죽었으면 알 만하죠.”
“사냥꾼이 물려 죽었다고?”
“네, 우리 주막에서 하루 묵으셨는데 등가산에 간 뒤로 소식이 끊어졌어요. 물려 죽었을 거라고들 하더라고요. 손님들도 등가산을 넘으실 거면 다른 손님들과 같이 가세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심통이 거절하자 소녀는 더 권하지 않고 주막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석경장 식솔들이 한창 이른 점심을 먹는데 주막 안에 있던 중년인 하나가 다가왔다.
“실례합시다. 나는 안경에서 온 보부상으로 이름은 고단이라 하오. 어디의 뉘신지 좀 알 수 있소?”
그러자 심통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용건이 무엇인지나 말해라.”
고단은 노인의 비협조적인 말에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혹시 등가산을 지나면 함께 가는 게 어떤가 해서…….”
“됐으니 가 봐라.”
“아직 잘 몰라서 그러시나 본데 등가산의 호랑이는 사냥꾼들도 꺼릴 정도로…….”
“됐다고 하지 않았느냐?”
“끙!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시오.”
고단은 아무런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주막 안쪽에서 고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석경장 식솔들이 마차 주변으로 모였다.
그때 마부 하나가 심통에게 말했다.
“저어, 등가산을 지날 때만이라도 심 어르신과 당 어르신이 저희 옆자리에 앉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알겠네.”
심통은 거절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마부가 호랑이에게 다치기라도 하면 일이 꼬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석경장 식솔들이 마차에 올라탔다.
호랑이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 심통과 당운망은 마부 옆에 걸터앉았다.
이두마차 두 대가 천천히 등가산으로 향하자 주막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차피 산길이라 마차와 사람 걸음이 비슷하니 함께 가려는 것이다.
이두마차 뒤로 십여 명의 보부상들이 길게 따라붙었다.
등가산에 들어선 지 반 시진(1시간)쯤 지났을까?
멀리서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마부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비록 옆자리에 무림의 고수가 앉았지만 너무 훤히 드러난 자리인지라 불안했던 것이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산길은 나무 그늘로 시원했지만 잔뜩 긴장한 마부들의 이마에는 도리어 식은땀이 맺혔다.
그건 마차 뒤에 길게 늘어선 보부상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단과 나란히 걷던 보부상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고 형, 이거 괜히 따라나선 거 아닌가 모르겠소. 호랑이가 말이 아니라 사람을 덮치면 어쩌지?”
“사람이 뭐 먹을 게 있다고? 말이라면 모를까. 내가 호랑이라면 사람 대신 말을 택할 걸세.”
고단이 호언장담을 했다.
그제야 사내의 얼굴에 조금 혈색이 돌았다.
바로 그때다.
“으악!”
“호! 호랑이다!”
후미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미친 듯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한순간 선두와 후미가 얽히며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 소란에 마차가 멈춰 섰다.
이윽고 혼비백산한 보부상들 앞으로 심통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무슨 소란이냐?”
뒤늦게 상대가 무림 고수라는 걸 알게 된 고단은 급히 허리를 접었다.
“나으리! 호랑이에게 보부상 하나가 물려 갔습니다!”
“어느 쪽으로 갔더냐?”
그러자 후미에 있던 보부상 중에 하나가 북쪽 숲을 가리켰다.
“사람을 물고 저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쯧!”
오만상을 찌푸리던 심통은 쏜살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로부터 한 식경(약 30분)쯤 지났을까?
심통이 물려 갔던 보부상을 허리에 끼고 돌아왔다.
다행히 보부상은 어깨와 허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살아 있었다.
그런데 보부상만 데리고 온 게 아니다.
심통의 다른 한 손에 들린 것은 강아지만 한 백호였다.
그는 자신이 구해 온 보부상을 내려놓고 연적하가 탄 마차로 다가갔다.
“공자님.”
“왜?”
“굴까지 따라가 호랑이를 때려죽였는데……. 새끼가 한 마리 있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어쩌라고?”
“아직 젖도 못 뗀 놈이라 그냥 두면 죽을 텐데, 버릴까요?”
“아주 일을 만드는구나. 버려야지 그걸 왜 가져와?”
“보통 호랑이면 저도 그냥 뒀을 텐데……. 백호라서요.”
“백호는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야?”
연적하는 피부 색깔 따위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백호는 영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누가 키우라고?”
“그걸 여쭤 보는 겁니다. 버리라면 버리고요.”
연적하가 막 내다 버리라고 말하려 할 때다.
지안이 물었다.
“아빠, 백호가 뭐예요?”
“하얀 호랑이를 백호라고 하는 거야.”
“백호 보고 싶어요.”
순간 ‘덜컥!’ 하고 마차 문이 열렸다.
뒤이어 연적하가 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심통은 재빨리 지안의 앞으로 백호 새끼를 내밀었다.
지안이 손을 뻗자 아직 젖도 못 뗀 백호는 강아지처럼 지안의 손을 핥았다.
꺄르르 웃던 지안이 백호를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백호는 지안의 품이 불편할 텐데도 발버둥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걸 본 연적하가 심통에게 말했다.
“저 새끼 살겠다고 머리 굴리는 거 봐. 영물 맞네.”
그래도 연적하는 포기하지 않고 지안에게 슬쩍 물었다.
“지안아, 호랑이는 산에서 살아야 돼. 이제 그만 놔주고 갈까?”
그러나 지안은 백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럼 지안이가 키울 거야?”
“네.”
“매일 먹이도 주고, 똥도 치워야 되는데?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머리를 긁적이던 연적하는 남궁연을 보았다.
그녀는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에혀! 그래, 키워라. 키워. 그리고 심 노인.”
“예?”
“심 노인이 집어 왔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책임져.”
“아니, 지안이가 키우겠다고 한 걸 왜 제가 책임을 집니까?”
“심 노인이 집어 와서 이렇게 된 거 아냐!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래서? 죽어도 못 하시겠다?”
연적하가 눈을 부라리자 심통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지겠습니다.”
“먹이도 구해다 주고, 똥도 같이 치워. 집안에 똥이 보이면 가만 안 둬.”
“……예.”
심통은 ‘지안이가 하겠다고 한 일을 왜 자신이 해야 하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제 두 살배기 지안에게 그 모든 걸 떠넘길 수는 없어서다.
지안이 제 몸통만 한 백호 새끼를 안고 마차로 돌아갔다.
멈춰 섰던 이두마차 두 대가 다시 움직였다.
지안의 품에 안긴 백호를 보던 연적하가 남궁연에게 물었다.
“누님. 원래 호랑이 새끼가 저렇게 온순해요?”
“새끼 때는 뭐든 온순하잖아.”
“그래도 저건 좀 지나치게 얌전한 거 아니에요? 아예 지안이 품에서 꼼짝도 안 하잖아요? 자리가 좁아서 꽤나 불편할 텐데.”
그제야 남궁연도 신기한 눈으로 백호와 지안을 보았다.
새끼라고 하지만 백호의 크기는 어린 지안의 몸통만 했다.
그런 만큼 불안불안하게 안고 있음에도 작은 버둥거림조차 없었다.
정말 영물이라 그런 것일까?
“저놈 저거 혹시 병든 거 아니에요?”
“글쎄, 눈 주변과 털이 깨끗한 걸 보면 건강해 보이는데?”
“그런데 집에서 호랑이를 키워도 돼요? 커서 사람을 공격할수도 있잖아요.”
“잘 보살펴 주면 괜찮을 거야. 문제가 생기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던 연적하가 백호를 쏘아보았다.
“너 이놈의 자식. 아무나 물어뜯으면 죽을 줄 알어.”
“끼잉…….”
백호가 앓는 소리를 내며 지안의 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지안이 그런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백호야. 겁내지 마. 언니가 지켜 줄게.”
‘언니’라는 말에 연적하가 피식 웃었다.
매일 월아, 금아와 어울리니 언니 소리가 입에 밴 모양이다.
“지안아 그거 수놈이야. 그러니까 누나라고 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