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75
975회. 괜찮아. 좋게 결론 났어
검왕이라는 말에 삼보표국 표사들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친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삼보표국 표사들은 장일에게 길을 내줬다.
연적하의 앞까지 다가간 장일은 품 안에서 밀봉한 편지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연적하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심경은 복잡했다.
그는 자신에게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에는 ‘남경의 일을 논의하고 싶으니 만나자’고 적혀 있었다.
그 한 줄이 전부였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다거나, 연락을 하게 된 동기, 의절에 대한 언급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너무 건조하다.
이건 남맹 맹주가 호천맹 맹주에게 보내는 공문의 느낌이다.
덕분에 장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알았다.
남경의 일을 논의하자는 거다.
그도 귀가 있어서 현재 남맹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정원현 살겁에 대한 반발로 호천맹에서 천하십대고수 셋이 나섰으니 더는 버티기 어려우리라.
의절하자고 했던 장인이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할 정도로 말이다.
남궁연이 다가오자 연적하는 그녀에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읽자마자 남궁연은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냉기를 풀풀 풍기는 그녀의 얼굴에 장일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헉! 삼매진화…….’
대체 내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삼매진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걸까?
십전무후라는 별호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그때 연적하가 말했다.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연적하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운종술을 쓰면 아무 때라도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지금의 경우는 거리보다 마음이 문제였다.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장인의 편지가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예! 대협! 검왕 님께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장일은 읍을 해 보인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석경장 식솔들을 보던 연적하가 남궁연에게 물었다.
“누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남경?”
“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는 ‘부친의 바람대로 해 주자’고 하지 않았다.
의절에 이어 공문 같은 편지까지.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서도 부친은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연락한다는 심경을 그런 식으로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연적하는 진심으로 그녀의 조언을 얻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내린 결정에는 언제나라고 해도 될 만큼 후회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연적하의 채근에 남궁연은 마지못해 답했다.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나을 거야. 그로 인해 먼 훗날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는 아버지를 탓해. 나는 네가 더 이상 무림의 일로 근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 삼보표국에서 너도 금의위를 불렀잖아. 보통 사람들도 인맥을 동원한다면서. 지금 아버지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분에게는 네가 인맥이잖아.”
연적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확실히 장인인 검왕에게 자신은 든든한 인맥이다.
일반인들처럼 무림인들도 싸움에 인맥을 동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은 그걸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결과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세상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이 자신만 의절을 당했다.
“그러네요.”
아무래도 죽은 인맥을 다시 살려야 할 것 같다.
자신이 떠난 뒤의 석경장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가만? 내가 떠난 뒤에 호천맹이 싸움을 걸면 어쩌지?’
기껏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그때 가서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누님, 나중에 말이에요.”
“네가 자리 비울 때를 말하는 거야?”
역시나 남궁연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남맹이 얻은 걸 지킬 수 있겠어요?”
사실 그건 석경장과 별 관계가 없다.
남궁세가와 관계만 회복돼도 석경장에 큰 힘이 될 터였다.
“내가 있잖아. 아버지가 쓸데없는 고집만 부리지 않으면 도와줄 수도 있어. 남맹이 든든해서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그러면 되겠네요.”
연적하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기관진식은 천하십대고수 못지않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위력적일 수도 있다.
천하십대고수들이라 해도 그녀를 상대하기 어려울 게다.
그제야 연적하는 발걸음도 가볍게 석경장 식솔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에게 심통이 다가와 슬쩍 물었다.
“공자님, 편지 내용이 어땠기에 분위기가 그렇게 싸했습니까?”
“싸해?”
“삼매진화로 태울 때 가모님 얼굴 못 보셨습니까?”
“아, 괜찮아. 좋게 결론 났어.”
“어떻게요?”
“장인어른이 남경 일로 만나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어.”
“좋게 결론 났다면서요?”
심통이 의아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단지 만나러 가는 걸 왜 ‘좋게 결론 났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심통의 입이 벌어졌다.
“아! 설마 이번에는 검왕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입니까? 그거네. 맞지요?”
“어.”
연적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세상이 어쩌고, 의절이 어쩌고 하기가 구차해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거 뭐 별거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검왕이 장인 아닙니까? 팔은 안으로 굽는 게 맞는 겁니다. 혈족부터 챙기는 게 백번 천번 낫습니다. 살아 보니 다른 사람에게 잘해 줘 봤자 죽 쒀서 개 주는 거더라고요. 남에게는 아무리 잘해 줘도 그때뿐입니다. 백 번 잘해 주다 한 번 못해 주면 등 뒤에서 칼 꼽는 게 남입니다.”
심통은 맺힌 게 많았던지 열변을 토해 냈다.
그렇게 확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내색조차 안 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심 노인.”
“예?”
“남에게 베풀었다가 뒤통수 맞은 적 있어?”
“저는 없죠.”
“그런데 왜 그렇게 흥분을 해?”
“하도 배은망덕한 놈들을 많이 봐서 그렇습니다.”
“하기야 심 노인이 누구에게 베풀 사람은 아니지.”
“그 무슨 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월아와 금아만 해도…….”
“그게 왜 베푼 거야? 오히려 그 애들에게 돌봄을 받고 있으면서.”
“도, 돌봄을 받다니요? 그 애들이 스승을 섬기는 겁니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해. 월아와 금아 볼 때마다 아주 불쌍해 죽겠구만.”
가만히 듣고 있던 당운망이 끼어들었다.
“장주님. 그런 의미에서 월아와 금아를 약당에서 거두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죽으면 약당 문을 닫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당가야. 낄 때 껴라. 약당의 미래가 그렇게 걱정되면 제자를 받아. 괜히 남의 제자 빼 갈 생각 말고.”
당운망은 심통을 외면했다.
월아와 금아같이 똑똑하고 아름다운 제자를 어디서 구한다고!
심통과 당운망의 허튼소리가 시작되자 연적하는 지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백호와 놀고 있던 지안이 냉큼 연적하의 팔에 안겼다.
연적하는 지안을 안고 표사들에게로 향했다.
새끼 백호가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가죠.”
연적하의 말에 주위를 경계하던 표사들이 얼른 앞장섰다.
***
길 안내를 자처한 삼보표국주 정도진이 멈춰 선 곳은 골목 끝부분에 있는 허름한 대문 앞이었다.
“이곳입니다.”
연적하가 대문과 담장 너머의 집을 살폈다.
과거 이철산이 살아 있을 때와 달리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오히려 영광된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언제라도 무창부에 오시게 되면 꼭 연락 주십시오.”
“그럴게요.”
정도진은 공수(拱手)의 예를 표한 뒤 표사들과 함께 돌아갔다.
연적하가 대문으로 다가가자 눈치 빠른 심통이 재빨리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잠시 후 발소리와 함께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세요?”
그러자 심통이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연적하가 소리 높여 답했다.
“소백이냐? 문 열어라! 적하 오라버니와 새언니 오셨다!”
“오라버니?”
순간 낡은 대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곧이어 튀어나온 하소백이 석경장 식솔들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 언……니. 어서 오세요.”
남궁연과는 첫 대면인 하소백은 언니 소리를 쉽게 하지 못했다.
연적하와 석경장 식솔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대문 밖의 소란에 한채연이 아기를 안고 마루로 나왔다.
연적하를 본 한채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오라버니?”
“그래,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해서 와 봤다. 그동안 잘 지냈냐? 이쪽은 남궁 누님과 우리 딸 지안이.”
남궁연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남궁연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연 오라버니의 바로 아래 동생인 한채연이에요. 언니, 말씀 놓으세요.”
그래도 아기를 낳고 담력이 늘었는지 한채연은 하소백만큼 남궁연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연적하의 품에 있던 지안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저는 연지안이에요.”
“그래, 네가 지안이구나. 엄마를 닮아 정말 예쁘네. 이모 애기는 이연지야. 나중에 우리 지안이가 잘…… 보살펴 줘야 해. 알았지?”
한채연은 놀아 주라고 하려다가 보살펴 달라고 말을 바꿨다.
현실적으로 놀아 주기가 힘들 거라 생각해 보살펴 달라고 한 것이다.
“네에, 지안이가 잘 보살펴 줄게요.”
지안의 대답에 한채연이 웃으며 연적하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지안이가 몇 살인데 말을 저렇게 잘해요?”
“두 살 지났어. 그런 거치고 말 진짜 잘하지?”
“네, 저는 저렇게 말 잘하는 아이는 본 적이 없어요.”
“새언니 닮아서 그럴 거야. 나는 모든 게 느렸거든.”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큰어머니 백미주는 그렇게 말했다.
미련한 놈, 둔한 놈, 머리가 나쁜 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칠푼이, 제 어미 잡아먹은 놈, 사람 구실 못 하는 놈 등등…….
지금은 아니지만 오봉산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자신이 정말 병신 중에 상병신인 줄 알았다.
석경장 식솔들 속에 섞여 있던 하소백이 부산을 떨었다.
“그렇게 마당에 서 있지 말고 다들 안으로 들어가세요. 꼴은 우스워 보여도 집 안 무너져요.”
그녀의 성화에 연적하와 지안, 남궁연은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월아와 금아가 그 뒤를 따랐다.
모두가 방으로 들어갔지만 심통과 당운망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끝내 마당에 남았다.
잠시 후 ‘차를 대접하겠다’며 밖으로 나온 하소백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방이 좁아서 안 들어가셨죠?”
심통이 넌지시 물었다.
“한채연은 상방을 그만둔 것이냐?”
“예, 언니는 출산 즈음에 그만뒀어요. 지금은 저만 상방에 나가고 있고요.”
당운망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왜 이렇게 궁색한가 했더니 일하는 사람이 하나라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오봉십걸의 이름이 있는데 왜 이런 곳에서 궁상이냐?”
심통의 말에 하소백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오봉십걸이 유명하다 하지만 상방 호위의 월봉은 정해져 있다.
한 사람의 월봉으로 세 식구가 살아가니 빠듯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기가 한번 아플 때마다 목돈이 나갔다.
“석경장으로 들어오거라.”
“예? 석경장에요? 그곳 형편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라고 전에 누가 그러던데…….”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합비에 공자님의 사업장이 열 개나 된다. 오봉십걸 전부가 공자님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도 끄떡없다.”
“그래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내 옆에 당 늙은이가 약당의 책임자다. 제자를 구한다니 너와 한채연이 그에게 배우면 될 게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던 당운망이 눈을 치떴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