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87
987회.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
팔월 스무이레.
하남성 개봉.
금선상방.
사시 정(오전 10시).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금선상방 객청 앞마당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연적하가 내려왔다.
합비의 포공사에서 검왕을 구한 뒤, 호천맹에 들러 천하십대고수 다섯을 응징하고 돌아온 것이다.
식솔들이 외출을 나갔는지 객청은 조용했다.
연적하는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운종술을 무리해서 펼쳤더니 몸뚱이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금동신 방주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천 대협! 남궁 부인과 석경장 분들은 모두 장 구경을 나갔습니다. 사람을 보냈으니 곧 돌아오실 겁니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없어요. 조용히 쉬고 싶으니 혹시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적당히 돌려보내 주세요.”
“예, 예. 객청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굽실거리던 금동신 방주는 급히 객청을 떠났다.
물끄러미 방주의 뒷모습을 보던 연적하는 마루 위에 길게 누웠다.
몸이 어찌나 무거운지 마루를 뚫고 땅 밑으로 내려앉는 느낌이다.
무공을 익힌 뒤로 이렇게 피로하기는 처음이다.
‘범천욕계왕재천’을 종횡할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아! 지친다.’
자신이 ‘범천욕계왕재천’에서 한 일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인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그늘로 자리를 옮긴 연적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는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번쩍 눈을 떴다.
무슨 장난을 하던 중인지 지안이 깡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
“어! 우리 지안이. 재밌게 놀았어요?”
“네.”
지안은 아빠에게 눈도장을 찍은 뒤 월아, 금아와 함께 쪼르르 달려갔다.
지안을 보며 웃는 연적하의 옆에 남궁연이 앉았다.
“피곤했나 봐?”
“왜요?”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걸 봤어. 깨우기가 미안해서 돌아가려는데 지안이가 보고 뛰어간 거야.”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서 좀 누웠어요.”
“독 같은 거에 당한 건 아니고?”
“그런 거 아니에요.”
연적하가 피식 웃었다.
당운망의 낙월독정에 당한 뒤로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생겼다.
게다가 정말 중독의 문제였다면 자신이 알아차렸을 터였다.
“하긴, 피곤할 만도 하겠다. 아무리 운종술로 다닌다지만 몸생각도 좀 해.”
“구주에서는 이것보다 더 멀리 다녔는데요 뭐.”
“아! 맞다. 그랬지. 구주를 잊고 있었네.”
남궁연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합비는 옆동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지?”
“저도 좀 짜부라지는 느낌이 들기는 해요.”
“포공사에서 바로 온 거야?”
“아뇨. 맹주와 무상도제, 의천검존을 데리고 호천맹에 갔었어요.”
“호천맹에?”
“네, 거기 원공 선사와 태허 진인이 있다고 해서요.”
“아하!”
남궁연은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천하십대고수 다섯을 모두 만나고 온 모양이다.
“장인어른이 없더라도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아야 허튼짓을 못할 것 같아서요.”
“그랬구나.”
“호천맹 연무장에서 그들 다섯과 싸웠는데……. 내가 손을 좀 지나치게 썼던 것 같아요.”
“왜? 누가 죽기라도 했어?”
“손속에 사정을 좀 두기는 했는데……. 엉뚱하게 구경꾼들이 좀…….”
“호천맹 무사들?”
“내가 연무장에서 떨어지라고 경고를 했는데, 내 말 무시하고 붙어서 보던 사람들이 좀 죽었어요.”
“설마 거기서 천산검영이라도 펼친 거야?”
“구천검령을 쓸 필요까지는 못 느껴서요. 한 번에 끝내려고 천산검영을 펼쳤죠.”
“…….”
남궁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적하의 선택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십대고수 다섯의 합공 속에서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연적하가 반신급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구천검령을 쓸 때의 이야기다.
그에게서 구천검령을 제외하면 천하십대고수 다섯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천하십대고수들에게 구천검령을 꺼내기도 뭐하다. 그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니까.
“잘했어.”
남궁연은 연적하의 선택을 지지했다.
싸우기 전에 피하라고 경고까지 했다면 그의 잘못이 아니다.
“포공사에서 장인어른을 구할 때는 급해서 구천검령을 썼거든요. 호천맹에서도 그럴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호승심이 좀 있었나 봐요. 당신들은 내 검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식으로…….”
“괜찮아. 무인은 자기들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해. 호천맹 무사들이 너의 경고를 흘려들은 잘못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몇 년 전까지 천지맹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 그들은 정의맹 시절부터 한솥밥 먹던 남맹 문파들을 몰살시킨 사람들이기도 해. 인과응보인지도 몰라.”
연적하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느끼는 마음의 무거움도 인과응보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까?
분위기가 가라앉자 남궁연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자아, 너도 돌아왔으니 이제 다시 움직여야지. 낙양에 가는 거지?”
맹진현의 연가무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의 노력에 연적하도 부질없는 잡생각을 털어 냈다.
“심 노인과 당 노인은 어디 있어요?”
“주루에 갔을 거야. 금 방주가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으니까 곧 올 거야.”
“참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너도 오봉산에서 지낼 때 밤낮없이 주루에 다녔다면서?”
“내가요?”
“심 노인이 그러던데? 아니야?”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의형제들 따라서 몇 번 갔어요.”
“몇 번은 아니던데?”
“그것까지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런데 심 노인이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요? 안 되겠네.”
“오봉산에 갔을 때 자랑삼아 이야기하더라고. 분위기에 들떠서 잠깐 그런 거니까 뭐라 하지 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심통과 당운망이 돌아왔다.
홍조 띤 얼굴을 보니 제법 마신 모양이다.
심통에게 한소리 하려던 연적하는 남궁연의 눈치가 보여 꾹 참아 넘겼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출발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야 가능했다.
며칠 머물렀다고 객청에 제법 짐이 쌓여 있던 까닭이다.
석경장 식솔들이 탄 이두마차들은 미시 정(오후 2시)무렵에야 금선상방의 대문을 나섰다.
***
팔월 말.
낙양.
맹진현 고성촌.
해거름 무렵.
이두마차 두 대가 천천히 고성촌으로 들어섰다.
마차들은 연가무관의 현판이 달린 장원 앞에서 멈춰 섰다.
이윽고 연적하의 가족과 석경장 식솔들이 밖으로 나왔다.
심통이 연가무관을 휘둘러보며 한마디 했다.
“여어! 제법 큰데? 무관이라고 하길래 코딱지만 한 곳이려니 생각했는데.”
그러자 당운망이 장단을 맞췄다.
“그래도 산촌이니 집값은 쌀 게다. 석경장만 해도 장원의 규모에 비해 싼 편이니까.”
연가무관을 석경장에 비교하자 연적하가 바로 한소리 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문이나 두드려 봐.”
그제야 심통이 급히 대문을 두드렸다.
텅텅텅―!
잠시 후 십 대 소년이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십니까?”
심통이 거만하게 답했다.
“석경장의 남천 대협께서 왔으니 나와 맞으라 해라.”
연적하가 급히 끼어들었다.
“꼬마야, 저런 헛소리 들을 것 없고. 너 누구냐? 설마 무백형 아들이냐?”
“아닌데요? 우리 스승님을 찾아오신 거예요?”
“어. 맞아. 스승님 안에 계시냐?”
“예.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아이는 조금 전에 한 심통의 말을 잊었는지 또 물었다.
“스승님에게 가서 연적하가 찾아왔다고 해라.”
“예.”
다시 대문이 닫히고 아이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심통이 덜렁거리는 대문을 발로 슬쩍 밀면서 말했다.
“공자님, 그냥 들어갈까요?”
“정신 사나우니까 좀 가만히 있어 봐.”
“아, 예.”
심통이 마지못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대문으로 연무백과 연승백, 그리고 양이화가 나왔다.
뜻하지 않은 방문에 연무백과 연승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양이화만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머뭇거리던 연무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적하야. 그리고 사저. 여기는 어쩐 일로?”
연적하는 배다른 동생이고, 남궁연은 사저인지라 그의 말투는 몹시 어색했다.
뻘쭘한 얼굴로 서 있는 연적하를 대신해 남궁연이 입을 열었다.
“지나는 길에 들렀어요. 모처럼 먼 길을 왔는데 밖에 세워 둘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안으로 들어오거라.”
급히 돌아선 연무백이 안내하듯 앞장서자, 연승백과 양이화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객청.
자리에 앉자마자 남궁연이 지안을 소개했다.
“우리 딸이에요. 지안아, 인사하거라. 이쪽에 계신 분이 큰백부님, 그 옆이 큰백모님이야. 그리고 저쪽은 둘째 백부님.”
남궁연의 소개가 끝나자 지안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큰백부님, 큰백모님. 그리고 둘째 백부님. 저는 연지안이라고 해요. 그리고 얘는 설아예요.”
지안이 제 발밑에 쪼그리고 있는 백호 새끼를 가리켜 보였다.
어린 지안의 인사에 어색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연승백은 물론, 연무백의 입가에까지 미소가 떠올랐다.
특히나 양이화는 지안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연무백의 눈치를 보고 있던 연적하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전박대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잘 넘어가는 분위기다?
문득 연승백이 말했다.
“남맹과 호천맹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하냐?”
“지금은 좋아졌어요.”
“남경에서의 일은 잘 매듭지어졌고?”
“예.”
“어떻게 하기로 한 거냐?”
연승백은 머나먼 남직례성의 일에 관심을 보였다.
“남맹에서 이문사방을 관리한다는 것 같았어요. 앞으로 호천맹은 남직례성에서 활동을 안 하기로 했고요.”
“아! 혹시 네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냐?”
“예.”
연승백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천하무림의 종주인 호천맹이 그의 지시에 따르다니 기가 막히면서도 부러웠다.
“무림의 일에서 손을 뗐다고 들었는데……. 다시 관여하기로 한 것이냐?”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로 했어요. 아무리 나라도 황하를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연승백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뜻을 묻지는 않았다.
“검왕과의 관계도 좋아지겠구나?”
“장인어른과는 벌써 화해했어요.”
“아!”
연승백이 부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호천맹에 이어 검왕까지.
자신처럼 변변치 못한 무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였다.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양이화가 운을 뗐다.
“동서. 이런 부탁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요.”
그녀가 말을 흐리자 남궁연이 얼른 물었다.
“형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괜찮으면 둘째 도련님의 혼처를 좀 알아봐 줬으면 해서요. 이런 촌에 있으니 소개해 줄 사람이 없네요.”
순간 연승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형수님.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잖아요. 동서의 별호가 십전무후잖아요. 도련님에게 어울리는 아가씨를 소개해 줄 거예요.”
“저어, 형수님. 아직 연가무관의 일도 많고… 솔직히 제가 사람을 만날 상황이 아닙니다.”
그가 일을 핑계로 빠져나가려 하자 연무백이 한마디 했다.
“연가무관에 제자가 몇이나 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누가 들으면 네가 관주인 줄 알겠다.”
“아니, 형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연승백이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땀까지 뻘뻘 흘리는 그를 보며 가족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그럴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가무관에 들어온 뒤로 내내 굳어 있던 연적하의 표정도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