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95
995회. 말은 참 번지르르해
졸지에 지켜야 할 사람을 잃어버린 호위들은 슬금슬금 선수(船首)에서 벗어나 선미(船尾)로 모였다.
호위들의 우두머리인 이두호가 살아남은 두 명의 호위에게 말했다.
“우리 힘으로 역부족이오. 개봉부에 임 공자와 석 공자의 죽음을 알려 개봉에서 살인자를 추포하도록 하십시다.”
그러자 상소엽이 물었다.
“중원상방과 형양현에도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까지 우리가 하기에는 시간이나 인원이 부족하오. 그 부분은 개봉부에 부탁하면 대신해 줄 거요.”
“하기야 형양현 현령의 자제가 살해당한 일이니 개봉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줄 테지요? 그런데 개봉부에서 저자를 추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개봉부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니겠소. 그들이 못하는 일이라면 중원상방과 형양현 현령도 우리를 탓하지 못할 게요.”
이두호의 말에 호위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 선착장에서 한 사람이 내려 개봉부에 소식을 전하고, 남은 두 사람이 계속해서 뒤를 쫓읍시다. 어떻소?”
상소엽과 다른 한 사람의 호위가 ‘좋다’고 답했다.
강줄기가 구불구불해서 육로로 가는 게 더 빨랐기 때문이다.
이윽고 이두호가 물었다.
“다음 선착장에서 누가 내리겠소? 이왕이면 지리를 잘 아는 분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호위 하나가 재빨리 나섰다.
“제가 중무현 출신이라 이 근방의 지리에 훤합니다.”
중무현이라는 말에 이두호와 상소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와 개봉 사이에 걸쳐 있는 게 중무현인 까닭이다.
두 시진(4시간)이 지난 정오 무렵, 배가 작은 선착장에 멈췄다.
중무현 출신의 호위가 하선하는 선객들에 섞여 사라졌다.
이두호와 상소엽은 각각 선수와 선미에서 괴청년을 감시했다.
다음 날 아침.
선수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이두호는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괴청년이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다가오고 있었다.
한순간 자리를 피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그의 눈에 띄인 거 그냥 버티기로 했다.
연적하는 이두호를 힐끔 보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안을 안아 올렸다.
“잘 보이지?”
“응. 잘 보여요.”
“지안이는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요.”
“엄마가 물어보면 엄마가 더 좋다고 할 거지?”
“헤헤.”
연적하는 여우 같은 지안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한참 동안 아빠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지안은 불편했는지 내려 달라고 하더니, 그것도 얼마 못 가 언니들과 놀겠다며 객실로 돌아갔다.
지안이 객실로 사라질 때까지 아빠 미소로 지켜보던 연적하가 이두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형씨.”
괴청년의 부름에 흠칫 놀란 이두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를 불렀소?”
연적하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두호는 내키지 않았지만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가까이 오자 연적하가 말했다.
“대체로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리면 부끄러워하더라고. 그런데 말야. 당신들은 그런 게 없더라. 당신들 눈에는 내가 나쁜 놈이지?”
“…….”
이두호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내리게 하고, 둘이서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우리는 갈 곳이 있어서 배에서 내리지 않은 것뿐이오.”
“뻔뻔한 사람이네.”
“…….”
“당신들이 모시던 두 사람이 누구였다고?”
이두호는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말했다.
“귀하가 강에 던진 석 공자는 형양현 현령의 아들이고, 임 공자는 중원상방 대행수의 장자였소.”
기세등등한 그의 태도에 연적하는 어깨를 들썩으며 웃었다.
“크큿! 갑자기 목소리에 힘이 넘치시네. 두 놈의 뒷배가 대단하다는 건 인정할게. 그런데 뒷배가 있으면 아무 여자나 기녀 취급해도 되는 거야?”
“술 한잔 같이하자는 게 죽어야 할 정도로 큰 죄라면 할 말 없소.”
이두호는 석은평과 임우한을 위해 변론했다.
그가 생각할 때 석은평과 임우한에게는 그 정도 자격이 있었다.
아무 여자나 겁탈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어 술 한잔 같이하자고 강권한 게 뭐가 문제라고.
“이 사람이 아주 선택적으로 기억을 하네. 그냥 술 한잔 같이하자고 했으면 왜 강에 던졌겠어. 당신들 호위가 옆에서 협박한 건 기억 안 나? 말 안 들으면 집안을 어떻게 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 임가라는 놈은 한술 더 뜨더만. ‘너희들한테는 선택권이 없다’고. 술을 따르라면 따라야 한다면서? 여기가 기루야? 우리 식솔들이 기녀로 보여? 처음 보는 여염집 여자들에게 할 소리냐고?”
“…….”
연적하의 노골적인 지적에 이두호도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고분고분과 거리가 멀었다.
“형씨들 운이 좋았어. 나한테 걸렸으니 망정이지, 그 애들 스승이 봤으면 당신들은 다 죽었어.”
“여자들에게 스승이 있는 줄은 몰랐소. 스승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오?”
“심통.”
이두호가 눈을 찡그렸다.
귀에 익은 이름이지만 누구라고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호위들이 개미라면 구천노도 심통은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가는 대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이두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뒤늦게 강호에 위명이 쟁쟁한 별호가 떠오른 까닭이다.
“호, 혹시, 스승이라는 분의 별호가…… 구천노도시오?”
“어, 맞아. 당신들 진짜 운 좋았다니까. 구천노도의 제자들에게 껄떡대다가 맞아 죽은 마두들이 한둘인 줄 알아?”
다소 과장됐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월아와 금아에게 손을 댔던 마두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까.
그제야 이두호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강호에 나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현령이 아니라 성주의 아들이라도 맞아 죽었을 터였다.
“구천노도 님은 합비의 석경장에 계시지 않았소?”
“그 사람들이라고 석경장에만 콕 박혀 있으라는 법 있어? 혈육이나 친인척, 지인 들을 만나러 돌아다닐 수도 있지.”
“혹시, 귀하도 구천노도 님의 일행이오?”
“그건 아니고. 구천노도가 내 일행이라고 할 수 있지.”
“…….”
그 말뜻을 생각하던 이두호는 급히 자세를 바르게 했다.
“호, 혹시, 남천 대협이십니까?”
순간 연적하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남천이면 내 식솔을 기녀 취급한 게 막 부끄럽고 그래?”
“요, 용서해 주십시오!”
이두호가 허리를 꺾었다.
남천 대협의 식솔들에게 그런 짓을 했다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뭘 용서해?”
“저희는 임 공자와 석 공자의 호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임 공자와 석 공자의 일에 왈가왈부하지 못합니다. 저희뿐 아니라 다른 호위들도…….”
“말은 참 번지르르해. 그런데 그거 알아? 임 공자라는 놈이 지랄할 때, 그를 위해 내 식솔을 협박한 게 당신들 호위였어. 왈가왈부가 아니라 그냥 한패였다고. 그 두 놈과 호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그 지랄을 했다는 거지.”
“저희는 호위라서…….”
“호위라서 뭐? 당신들의 고용주가 강도짓을 하면 같이 강도가 되고, 도둑질을 하면 같이 도둑이 돼야 되는 거야? 거 괜찮은 사업이네. 녹림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일도 없고. 그렇지?”
“요, 용서해 주십쇼!”
이두호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따지고 보면 남천의 말이 맞았다.
그 두 공자가 돌아다니며 분탕질을 칠 수 있었던 것도 호위들 덕분이었다.
호위들이야 그 두 공자의 뒷배가 대단해 호응하게 된 것이지만, 사실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 그게 맞는 거야. 당신들은 강에 던져진 두 놈과 별반 다를 게 없어. 그냥 운이 좋아서 아직 이 배에 타고 있는 거라고. 죽을죄를 짓고 뻔뻔하게 있으면 안 되는 거지.”
“사, 살려 주십쇼.”
‘용서해 달라’던 말이 어느새 ‘살려 달라’로 바뀌었다.
“사람이 얄팍한 거 같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일도 되고, 죽을죄도 되거든. 쯧쯧!”
연적하가 혀를 찼다.
사람은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왜 그렇게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정사파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제멋대로다.
그중에 공통되는 법칙은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하면 아무 데서나 기녀 취급을 당해도 감내해야 하지만, 강하면 여자를 기녀 취급한 놈이 죽는다.
“그래서 혼자 내린 호위는 어디로 간 거야?”
“개봉부로 갔습니다.”
“잘됐네. 우리 목적지도 개봉인데. 어떻게? 개봉에서 내리면 관졸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야?”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두호가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가 남천 대협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배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을 것이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순간 이두호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막 돌아서 가려는 그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단, 형씨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지금처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벗어나면 죽는 거야.”
뒤도 안 보고 달아나려던 이두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당분간은 남천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
정오 무렵.
배가 개봉의 한 선착장에 도착하자, 이두마차 두 대와 십여 명의 선객들이 하선했다.
석경장 식솔들과 호위 둘이다.
마차와 선객들을 내려놓은 배는 달아나듯 쏜살같이 황하 중심부로 나아갔다.
이두호와 상소엽이 부러운 눈으로 멀어져 가는 배를 보았다.
잠시 후 석경장 식솔들을 태운 이두마차 두 대가 관도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이두호와 상소엽은 이두마차에서 멀이지지 않으려고 경공술로 달렸다.
그렇게 한 식경(약 30분)쯤 달렸을까?
이두마차들은 기진맥진한 두 호위가 탈진으로 쓰러지기 직전, 작고 아담한 객점 앞에서 멈춰 섰다.
객점 현판에 ‘남연객점’이라는 네 글자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이두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우르르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두호와 상소엽은 감히 객점 안까지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길거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헐떡거리고 있는 그들 앞으로 개 한 마리가 다가와 킁킁거리더니 이내 돌아서 사라졌다.
탁자를 닦던 상도는 문소리가 나자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부터 했다.
“어서 오십쇼!”
그 소리에 계산대에서 졸고 있던 상일운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손님들 속에서 연적하를 발견한 상일운이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어이쿠! 남천 대협!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이 층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 내려왔다.
남수경이었다.
한달음에 뛰어 내려온 그녀는 남궁연을 보고 멈칫했다.
그녀를 발견한 연적하가 무덤덤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어! 친구! 오랜만이야. 내 딸은 처음 보지? 지안아, 아빠 친구야. 인사해.”
연적하가 지안의 등을 슬쩍 밀었다.
지안이 최근에 뭘 봤는지 전과 달리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연지안입니다.”
“어, 어, 그래. 반갑다. 지안아.”
당황한 남수경이 어색한 얼굴로 지안과 인사했다.
눈치를 보던 심통이 식당으로 걸어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오랜만에 왔는데 여기는 여전하네. 어이! 상가야. 여기 숙수는 아직도 이전 그대로냐?”
상일운이 웃으며 답했다.
“예, 예. 공 숙수의 초반(炒飯, 볶음밥) 실력은 이전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드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래? 그럼 나는 오랜만에 단초반(蛋炒飯, 계란볶음밥)으로 먹어 볼까?”
그사이 남궁연은 남수경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안, 월아, 금아와 함께 창가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남수경이 홀로 남은 연적하에게 슬쩍 물었다.
“연 공자.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지나던 길에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들렀어. 장사는 잘되고?”
“조금씩 손님이 늘어나는 추세예요. 그런데 나한테 연 공자 지분을 넘기려고 온 건 아니죠?”
“그 부분은 친구가 돌려받고 싶을 때 말해. 참고로 외상으로도 가능해. 나 돈 많이 벌었거든.”
외상 운운했지만 솔직히 연적하는 남수경에게 그냥 넘겨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시점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