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97
997회. 온전히 너의 인연인 것 같아
석경장 식솔들은 남연객점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딱히 다음 목적지도 없는 상황이라 그냥 눌러앉아 휴식을 취한 것이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의 선선한 시간대에 남수경이 남궁연과 지안, 월아, 금아를 데리고 장을 보러 나갔다.
그사이 연적하는 심통과 당운망을 효자암으로 불러냈다.
바위에 접한 나무 그늘 아래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효자암 아래로 흐르는 황하의 격류를 보던 연적하가 당운망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 노인은 어때? 지낼 만해?”
“지낼 만한 정도가 아니라 요즘만 같았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약당이 좋아서 처박혀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물론 약당도 좋습니다만, 이렇게 천하를 유람하는 것만은 못하지요.”
“그랬구나. 심 노인은?”
“저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던 심통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연적하가 왜 저러나 싶은 것이다.
“어. 지낼 만하냐고.”
“당연하죠. 제자가 속을 썩이길 합니까? 먹고살 걱정이 있습니까? 늘그막에 공자님 덕분에 호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일은 무슨…….”
연적하는 말을 흐렸다.
심통과 당운망에게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심통은 그런 연적하의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에이, 뭐가 있나 본데 말씀해 주십쇼.”
심통의 채근에 연적하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가 구천현녀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그래서 구천현녀님이 부탁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었거든.”
눈치 빠른 심통이 바로 한마디 했다.
“구천현녀님에게 뭔가 해 주기로 약속했다는 겁니까?”
“어.”
연적하는 선선히 시인했다.
어차피 하기로 한 거 감출 필요가 없어서다.
당운망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뭡니까 그게?”
“천외이선의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예에?”
“그것들이 살아 있다는 겁니까?”
심통과 당운망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현세에서는 사라졌는데……. 뭐라고 해야 되나. 일이 조금 복잡해.”
연적하는 천자마와 금사에 대해 아는 바를 알려 주었다.
“……그들은 ‘네 번째 하늘’이란 상계(上界)의 신적 존재들인데, 창조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대. 그런 그들이 타락하자 그 세계의 평화를 위해 창조신이 그들의 뒤틀린 욕망을 분리해서 ‘왕들의 하늘’에 가두었던 거고.”
심통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잠깐만요! 천자마와 금사가…… 고작 상계 신들의 뒤틀린 욕망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어. 황당하지? 나도 그래.”
“아니 그럼 그 본체는 얼마나 강한 겁니까?”
“창조신이 뜻대로 하지 못할 정도? 여하튼 그 뒤로는 알다시피 현세로 넘어와서 내 손에 죽게 된 거고. 그런데 그것들이 ‘왕들의 하늘’로 돌아가지 않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거야.”
심통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왕들의 하늘’에 속한 존재는 죽음으로도 그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청성산에서 그 고생을 하셨는데……. 그것들은 어떻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다는 겁니까?”
“내 구천검령이 천외이선을 죽일 때 그들에게 걸려 있던 구속력까지도 끊어 버린 것 같아.”
“허!”
심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듣고 있던 당운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요? 설마 ‘네 번째 하늘’에 있는 천외이선의 진신(眞身)을 없애 주기로 하신 겁니까?”
“어.”
“창조신도 감당을 못 한다면서요? 그럼 장주님에게도 어려운 일 아닙니까?”
“내 구천검령에 기대를 거는 것 같더라고.”
“장주님의 구천검령이 천하무적이라는 건 저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주님의 무위는 반신급(半神級)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내가 달리는 건 맞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구천검령이 있으니까.”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천외이선의 진신이 창조신도 감당 못 할 정도라면……. 거절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현세의 일도 아닌데 장주님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습니까?”
“뭐, 당 노인 말도 일리는 있는데. 나 때문에 천외이선이 ‘네 번째 하늘’로 돌아가게 된 거잖아. 게다가 나한테 구천검령이라는 대항 수단도 있고. 그런데 현세의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이미 결심을 굳히신 겁니까?”
“어.”
“가모님은요? 가모님도 알고 계십니까?”
“그럼 내가 누님이 반대하는데 간다고 할까. 누님은 오히려 가라고 등을 떠미는 중이야.”
“가모님이 그러셨다면 뭐, 가는 게 맞겠네요.”
당운망은 남궁연이 동의했다니 더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혜를 믿는 것이다.
연적하가 짐짓 눈을 부라리며 항의했다.
“뭐야. 거절하라더니 누님 얘기 나오니까 바로 태도를 바꾸네?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거 아냐?”
“솔직히 장주님이나 저희나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하지만 가모님은 천상계에 계시는 분이니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지요.”
“와아. 너무하네.”
연적하는 기가 막혔지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심통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그 ‘네 번째 하늘’이라는 곳은 언제 가십니까?”
“아직 몰라. 둘러볼 곳 다 둘러보고, 가야겠다고 생각되면……. 구천현녀님을 찾아보려고.”
“청성산에서처럼요?”
“그렇지.”
“저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글쎄. 아니 안 될걸. 된다고 해도 내가 거절이야.”
“왜요?”
“구주(九州)가 어땠는지 벌써 잊었어? 거기서 심 노인이 살아서 돌아온 건 기적이야. 하물며 ‘네 번째 하늘’은 그보다도 상계라고. 심 노인을 찾아서 데리고 다닐 시간도 없고, 그곳에서 심 노인을 지킬 자신도 없어.”
“쩝…….”
심통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더 고집부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구주에서 자신이 짐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까닭이다.
“그럼 언제 오시는 겁니까?”
“그걸 모르겠어. 이 년이 걸릴지, 오 년이 걸릴지…… 십 년이 걸릴지…….”
구주에서 돌아온 경험이 있는 심통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구천현녀가 돌려보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늙어 죽기 전까지만 돌아오십쇼.”
그 말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심통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건 덕담인 까닭이다.
“노력해 볼게. 나 없는 동안 당 노인과 같이 석경장이나 잘 지켜.”
“저희가 뭐 할 게 있습니까? 가모님이 계신데.”
당운망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심통과 당운망은 연적하의 부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볼 때 십전무후 남궁연의 무위는 천하십대고수에 버금가고, 지혜는 하늘에 닿았다.
남궁연이 존재하는 한 석경장을 넘볼 사람은 없었다.
그날 오후, 연적하 일행은 ―합비의 본가(本家)인― 석경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연객점을 떠났다.
***
구월 하순.
남직례성 남경.
무극문.
천화각.
무극문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대회의실에 수뇌부가 모였다.
장부월 총관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알아본 바 삼정상방의 거래 중단 통보는 남맹의 지시로 인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진일원 호법이 탁자를 ‘쾅!’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미친! 식자재의 공급을 끊다니! 지금까지 이런 무도한 짓은 없었거늘! 다른 곳은 알아보았는가?”
“예. 남경상방과 휘주상방에 문의를 하였으나 대답은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시월부터 식자재의 구매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진일원 호법은 기가 막히는지 눈을 질끈 감고 한숨만 내뱉었다.
탄식하던 천공도 장학 문주가 말했다.
“시월에 거래를 중단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소?”
“길어야 열흘입니다. 시월이라 해도 아직 날씨가 따뜻해 식품 보관이 용이하지 않은 터라…….”
“한 달이 조금 못 되게 남았다는 거구려?”
“그렇습니다.”
“흐음!”
천공도 장학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올해 안에 떠나라더니 벌써부터 압박을 가할 줄은 몰랐다.
장부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주님, 남맹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면 서둘러 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월이 되면 늦습니다. 먹을 게 없어 떠났다는 소리만큼은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학 문주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칠파이문의 하나로 천하를 운영하던 무극문이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될 줄이야!
유명교 시절에도 싸울지언정 무릎 꿇지 않았다.
‘이 치욕은 언제고 되돌려 줄 것이다.’
장학 문주는 말아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복수를 다짐했다.
“잠시 항주로 이전할 테니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해 주시오.”
이미 옮겨 갈 곳에 대한 논의를 했던지 장학의 입에서 바로 항주라는 지명이 나왔다.
“예.”
장부월 총관은 개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속은 쓰리지만, 어차피 이전을 피할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
남직례성.
합비.
석경장.
여행을 마치고 석경장 식솔들이 본가로 돌아왔다.
석경장의 분위기는 밝으면서도 어딘가 차분했다. 예민한 사람은 묵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물론 어린 지안과 사손인 월아, 금아는 연적하에 관계된 일을 알지 못해 여전히 해맑았다.
그러나 연적하가 조만간 떠날 것을 아는 남궁연과 심통, 당운망의 일상은 전에 없이 차분했다.
석경장으로 돌아온 뒤로 연적하는 지안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지안과 놀아 주면서 틈틈이 구천여일진경(九天如一眞經)의 구백 자 구결을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리 지안이 또래에 비래 총명하다 해도 두 살짜리에게 구백 자 구결은 무리였다.
연적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안은 구천여일진경을 배우지 못했다.
결국 연적하는 차선으로 남궁연에게 구천여일진경의 법문을 가르쳤다. 그렇게라도 지안에게 구백 자 법문이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남궁연은 육백 자 이상을 외우지 못했다.
무엇이건 한번 보거나 들으면 잊지 않는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남궁연도 고작 구백 자 법문을 자신이 외울 수 없다는 것에 놀랄 정도였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외우는 데 반 시진(1시간)도 안 걸리는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보는 연적하에게 남궁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구천여일진경은 온전히 너의 인연인 것 같아. 와룡장에서 그 맥이 끊어진 것도 그래서일 거야.”
“하아!”
연적하는 바닥이 꺼져라 탄식했다.
구천여일진경의 구백 자 법문은 내공과 법력을 수련하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심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대에서 끝날 수도 있다니 너무 아까웠다.
그가 아쉬워 하자 남궁연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직 지안이 어려서 그러는 거니까, 네가 돌아와서 나머지를 가르쳐 봐. 나와 달리 지안이는 구백 자를 다 외울지도 몰라.”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연적하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지안에게는 마신 메누아의 원신이 깃들어 있다.
그러니 배움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터였다.
지금도 두 살짜리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유창하지 않은가 말이다.
문득 남궁연이 물었다.
“언제 갈 생각이야?”
그녀는 연적하가 석경장에 남은 것이 지안에게 구백 자 법문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안이 뭔가 배우기에 이른 나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도 생각을 달리할 게 분명했다.
“왜요?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냥, 떠날 준비를 끝낸 것 같아서.”
남궁연이 애써 담담한 미소로 그를 보았다.
언제까지 웃으며 그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웃을 수 있을 때 그를 보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