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99
999회. 그런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무당산.
오룡궁.
이십 대 청년 하나가 오룡궁 입구에 나타났다.
은사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연적하다.
부지런히 걷던 그는 오룡궁 초입에서 잠시 멈춰 섰다.
궁주의 집무실인 금정각, 오룡칠사의 숙소였던 태양각, 도관들을 관리하는 대원각, 그리고 팔선의 이름을 딴 여덟 개의 전각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일과를 마칠 시간이라 그런지 오룡궁 곳곳이 수련생들로 가득했다.
금정각으로 가기 위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를 수련생들이 힐끔거렸다.
낯선 외부인이 오룡궁까지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오룡궁의 도사들과 팔선각에 머무르는 수련생들은 연적하를 알아보지 못했다.
수련생들이야 최근 입문했으니 그렇다 쳐도 오룡궁 도사들까지 그러는 것은 이유가 있다.
오룡궁에서 생활할 당시 연적하는 낙월독정의 독성으로 얼굴이 망가진 상태였다.
퉁퉁 붓고 진물과 딱지로 가득하던 당시의 얼굴과 원영지체를 이룬 지금의 매끈한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연적하는 유유자적하게 오룡궁 사람들 사이를 뚫고 금정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금정각.
금정각에 도착한 연적하는 때마침 밖으로 나온 도사 하나를 잡고 말을 걸었다.
“안에 천명 궁주님 계신가요?”
식당으로 가던 산해 도사가 연적하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답했다.
“계신데 누구신지?”
“남천이 왔다고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천요?”
“예.”
산해 도사는 그런가 보다 하고 돌아섰다.
이 순간 그는 눈앞의 청년과 고금제일인 남천 연적하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남천이라는 청년은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 외에 눈을 끌 만한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걸음 걷던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남천? 설마 남천 연적하는 아니겠지?’
그러다 연적하가 오룡궁 출신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왠지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던 산해 도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잠시 후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천명 도사가 달려 나왔다.
“남천! 어서 오거라!”
격한 천명 도사의 환대에 연적하는 허리를 조아렸다.
“오랜만입니다.”
계단 아래로 내려온 천명 도사가 연적하를 데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금제일인 남천 대협이 궁주를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오룡궁에 퍼졌다.
잠시 후 궁주의 집무실인 금정각에 오룡육사가 모였다.
오룡육사들과 스승인 청불노를 추억하던 연적하가 물었다.
“그런데 산문에서 향화객의 입산을 막던데 무당파에 무슨 일이 있나요?”
그러자 무오자가 웃으며 답했다.
“그것은 너와 관계가 있느니라.”
“제가요?”
연적하가 놀라 되묻자 무회 진인이 끼어들었다.
“최고 어른인 태허 진인이 호천맹에서 크게 다친 데다가, 육파일문까지 무당파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통에 요즘 무당파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그제야 연적하는 입산 금지가 자신과 천하십대고수들 간에 벌어진 싸움의 여파임을 알았다.
“아……. 태허 진인의 부상이 심한가요?”
“외상은 심하지 않은데 내상이 중하다고 들었다.”
연적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궁주인 천명 도사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장문인이 태청단을 내어 주었다니까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게다. 그나저나 합비에 자리를 잡았다고 들었는데 예까지는 무슨 일이냐?”
“청불노 스승님 생각도 나고, 사숙님들의 안부도 궁금해서 들렀습니다. 그런데 오다 보니 수련생들이 전보다 더 늘어난 것 같더라고요? 맞습니까?”
본래 오룡칠사는 사형제간이 아니다.
그러나 청불노의 사후에 오룡육사들은 하산하는 연적하에게 자신들을 사숙으로 부르도록 했다. 모두가 청불노의 동생을 자처하면서 오룡육사와 연적하의 애매한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모두 강호에서 네가 활약을 한 덕분이다. 네가 오룡궁 제자라는 소문에 어찌나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오던지. 수련생들을 걸러내기 위해 시험까지 치러야 했느니라.”
“그랬군요. 참! 그런데 궁주님. 무당산에 구천현녀의 사당이 있나요?”
“있다마다. 팔선각 오른편으로 내려가다 보면 구석에 작은 사당이 하나 보일 게다. 그곳이 구천현녀의 사당이다. 찾는 사람이 없어서 관리가 좀 안 되고 있는데, 그곳에 볼일이 있느냐?”
“예. 장문인을 뵙고 나서 들러 보려고요.”
“그래? 그럼 그사이에 청소라도 해 두라고 해야겠구나. 혹 제사라도 지낼 생각이냐?”
천명 도사는 향을 준비해 두어야 하나 싶어서 슬쩍 떠보았다.
“아니요. 그냥 잠시 명상이나 하려고요. 제가 구천현녀님과 나름 가까운 사이잖아요.”
오룡육사들은 연적하의 부신(符神, 의지의 대상)이 구천현녀라는 걸 알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문밖에서 도동(道童)의 음성이 들려왔다.
“궁주님, 장문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천명 도사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영결상인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룡육사와 연적하가 급히 일어나 영결상인에게 묵례를 했다.
“장문인. 어서 오십시오.”
무리를 대표해 천명 도사가 인사를 올린 후 오룡육사의 옆에 섰다.
상석으로 자리를 옮긴 영결상인이 웃으며 말했다.
“자자, 다들 편히 앉으세요. 남천도 앉으시게.”
장문인의 말에 오룡육사와 연적하가 엉거주춤 앉았다.
영결상인이 궁주를 보며 말했다.
“남천이 오룡궁으로 갔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달려왔습니다. 내가 끼지 말아야 할 자리에 온 것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천이 장문인을 찾아뵐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냐?”
천명 도사의 말에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숙님들을 뵙고 장문인께 찾아가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영결상인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알았다면 허겁지겁 달려오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연적하를 보니 좋았다.
연적하가 계속해서 말했다.
“태허 진인의 일은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다섯 분의 합공이 너무 강해서 맞받아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손속에 사정을 둘 여유가 없었다는 소리다.
영결상인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태허 진인께서도 그날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시니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예, 그리고…… 장문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장문인께서 여러 목숨을 살리셨습니다.”
“육파일문에서 알면 섭섭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일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너뿐만 아니라 칠파이문을 위해 한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한 오룡육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짐짓 딴청을 부렸다.
연적하의 방문 목적을 알게 된 영결상인은 얼마 있지 않아 자리를 떠났다.
연적하는 오룡육사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사 중인 연적하에게 천명 도사가 슬쩍 운을 뗐다.
“저녁 식사 후에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느냐?”
“예, 무슨 일이 있나요?”
“일은 아니고, 사람들이 네 강론을 듣고 싶어 해서.”
“강론요? 어휴! 저 그런 거 못해요.”
“너는 자타가 공인하는 오룡궁 최고의 술사다. 나는 네가 많은 술사들에게 영감을 줄 거라고 믿는다.”
“뭘 알아야 강론을 하죠.”
“네가 오룡궁에서 수련하던 때를 기억해 보거라. 그때의 너와 같은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너의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될 게다.”
천명 도사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연적하는 더 거절하지 못했다.
“할게요. 그런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순간 오룡육사의 얼굴에 함박 미소가 떠올랐다.
오룡궁.
어둑어둑한 초저녁, 흩어져 있던 도사와 수련생 들이 오룡궁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강론이지만 도사와 수련생 들의 얼굴은 전에 없는 열기로 달아올랐다.
특별 강론의 강사가 고금제일인이자 오룡궁이 배출한 최고의 술사라는 남천 연적하인 까닭이다.
강론의 사회자인 고학 도사가 남천 연적하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연적하는 그의 뒤에서 무엇을 말할지 고민했다.
도에 대해서는 도사들이 더 잘 알 테고, 술법과 부적 또한 저들도 자신만큼 배웠을 터.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며 하나씩 걷어 낼 때 고학 도사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아직 뭘 말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는데 벌써 시간이 된 모양이다.
연적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사와 수련생 들 앞에 섰다.
오룡궁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문득 연적하는 어쩌면 이 자리가 현세에서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전 고학 도사는 자신을 대단한 위인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적어도 진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오룡궁 최고의 술사가 됐는지 정도는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낙양 동쪽 언사의 와룡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참월검객 연무룡의 첩이었는데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연적하는 자신의 과거사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입에서 큰어머니 백미주가 자신을 창고에 가둬 죽이려 한 것, 그곳에서 기연을 만나 살아남은 것, 그리고 오봉산채와 정의맹, 천지맹 시절의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때 유명교 술법에 놀라 나도 배워 보려고 오룡궁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팔선각에서 수련하던 중 청불노 선사(先師)님의 눈에 들어 그분의 기명제자(記名弟子)가 되었지요.”
수련생들 속에서 ‘아!’ 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청불노 선사님에게서만 배운 것은 아닙니다. 고학 도사님에게 술법, 백운 도사님에게 부적, 광해 도사님에게 검술을 지도받았습니다. 그분들과 오룡육사 사숙님들의 가르침 덕분에 술사로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여러 스승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적하가 오룡육사와 오룡궁 도사들을 향해 공수(拱手)의 예를 표했다.
고금제일인의 인사에 도사와 수련생 들은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박수를 쳤다.
“특히나 ‘나는 신을 믿는다. 그러나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광해 도사님의 가르침은 저의 술법과 검술에 큰 깨달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광해 도사님은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선택한 검법을 믿고, 검법의 극의(極意)에 도달하면 악귀를 도말(塗抹)할 수 있음을 믿는다. 내가 우주이며, 우주가 바로 나라는 걸 믿는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다른 무엇도 순수하게 믿을 수 없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믿음이야말로 나의 술법과 검술의 뿌리이자 몸통입니다.”
도사와 수련생 들의 시선이 일제히 광해 도사를 향했다.
갑자기 주목을 받은 광해 도사가 뻘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축귀에 쓰이는 검술은 오룡궁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데 갑자기 주목을 받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론이 끝날 즈음 수련생 하나가 손을 번쩍 쳐들고 말했다.
“남천 대협! 저는 여동빈의 수련생 관승이라 합니다. 사범님들께 남천 대협의 부신이 구천현녀라고 들었습니다. 남천 대협께서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이 아닌 구천현녀의 힘을 빌어 벽력부를 사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몇몇 수련생들이 ‘알고 싶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수련생들의 요구에 당황한 연적하가 천명 도사를 돌아보자, 천명 도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백운 도사가 재빨리 괴황지와 경면주사를 연적하에게 가져다주었다.
연적하는 그 자리에서 벽력부를 만든 뒤 오룡궁 밖으로 걸어 나갔다.
구천현녀를 만나기 위해 와서 그런지 느낌이 새로웠다.
“구천현녀님, 다만 의지하오니 신력으로 벽력을 드러내 주십시오[九天玄女 但憑霹靂威神力]!”
낭랑한 외침과 함께 그의 손에서 벽력부가 팔랑팔랑 날아갔다.
우르르릉―.
콰콰콰쾅! 콰앙―!
천번지복의 굉음과 함께 오룡궁 앞에 수십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 가공할 위력에 놀란 오룡궁 도사와 수련생 들은 입을 쩍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남천 연적하구나!’라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