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06)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06화(106/273)
“도망쳐! 후퇴하라!”
“끄아아악!”
“제, 제발! 살려…, 커헉!”
사방에서 비명이 울렸다.
펼쳐지는 지옥도.
그 속에서 그라트는 미소 지었다.
“훌륭해. 아주 훌륭하군!”
아무것도 모르는 연합의 군대는 그라트가 이끄는 부대에 포위돼 한순간에 섬멸됐다.
후퇴가 아닌 섬멸.
오천 명이 넘는 적병 중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었다.
“여기까지는 예정대로 흘러갔는데 말이지…”
신성 제국은 약속대로 제물을 바쳤다.
크게 한 방 먹은 연합국은 8사단 구역에서 후퇴하고.
물러난 병사는 8사단 구역이 아닌 전선에 투입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마왕군 부대가 힘들어지겠지만, 상관없다.
‘나만 아니면 돼! 오히려 다른 놈들이 무너지면 이득이야.’
다른 사단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홀로 전선을 지키는 8사단.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그 대가로 넘겨주는 것은 레이드런과 최현석, 차기 성녀였던 아벨슨이다.
하나같이 눈엣가시 같은 놈들.
오히려 이쪽에서 ‘죽여주십시오!’ – 하며 부탁해야 할 일을 저들이 나서서 해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문제는 최현석과 성녀가 도망쳤다는 건데…’
눈치가 빠른 건지 최현석과 성녀는 이미 가드락 성을 떠났다.
정황상 레이드런에게 가는 게 분명하다.
신성 제국 쪽에 연락하라 명령하긴 했는데, 이후로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라트는 새로운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부사단장 큰라둑과 연결되는 통신구였다.
우웅…!
그라트의 마기가 흘러 들어가자 통신구에서 빛이 났다.
우웅… 우웅…
하지만 빛이 흘러나오기만 할 뿐.
연락이 닿지는 않았다.
“멍청한 큰라둑! 이 중요할 때에 통신구를 안 들고 다니다니. 뭐 하는 거야!?”
그라트가 짜증스럽게 통신구를 집어던졌다.
쨍그랑!
단숨에 박살이 나는 통신구.
어째서 통신구가 제8사단 예산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단장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참모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머리가 제법 좋아 비서처럼 쓰는 놈이었다.
“인간입니다! 인간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라!?”
“보이는 숫자만 1만이 넘습니다! 사방이 적으로 가득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인간이 뒤통수를 친 것이다.
“이런 개 같은 놈들이!!!”
***
시체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코가 익숙해져 더는 피 냄새를 맡지 못할 법도 했건만.
어째서인지 혈향(血香)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최현석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자 라헬이 다가왔다.
“이제 어떡하지…”
“용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함정에서 살아남은 건 좋은데 말이야. 갈 곳이 없잖아.”“함정? 함정이라니 무슨 말이냐.”
레이드런이 다가왔다.
그는 이제까지 전투를 치르느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최현석은 자신이 생각한 그라트의 계략을 설명했다.
“그렇군. 그래서 가드락 성을 빠져나와 이곳에 온 건가…”“예.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라트 사단장이 이 일을 꾸민 게 분명합니다.”
“흐음…”
레이드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라트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마왕군 간부가 인간과 내통한 것으로도 모자라 같은 마왕군을 위험에 빠뜨렸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되뇌어 봐도, 지금 눈앞의 상황은 최현석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레이드런 님. 이대로 가드락 성에 복귀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확실히 헤미스 님이 없는 상황에서 돌아가는 건 무모한 짓이지.”“그럼 어떡합니까? 레이드런 님 상처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레이드런은 정말 만신창이었다.
자신이 저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똑바로 서 있을 자신도 없다.
그런데 레이드런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괜찮다. 이 정도는 마기가 회복되면 금방 치료할 수 있어.”“아, 그렇습니까…?”
생각해보니 레이드런은 마기를 이용한 치료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
그 치료 대상을 인간인 최현석으로 했던 탓에 죽을 뻔하긴 했지만.
“아무튼, 이제부터 갈 곳이 문제군.”
레이드런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은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라트 사단장이 있는 곳으로 간다.”“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레이드런이 고개를 저었다.
“가까이 접근하자는 게 아니야. 거리를 두고 그라트 사단장의 부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본다. 다음은 그때 상황을 보고 움직이도록 하지.”“아하, 알겠습니다.”“그럼 바로 움직인다.”
레이드런을 필두로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드락 성 인근 지형은 이미 다 외워뒀으니 문제없다.’
그라트 사단장의 작전 지역에는 제법 높은 산이 있다.
오르는 게 조금 귀찮긴 해도, 그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본다면 충분히 전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몇 시간 후.
빠르게 이동한 일행은 어느 이름 모를 산에 도착했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후우! 오랜만에 땀 빼네.”
라헬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옆에 있던 최현석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아가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힘든데?”“날갯짓이 얼마나 힘든지 용사님이 아세요?”“날갯짓을 산에서 한다고 더 힘들어지는 건 아니잖아?”
“츳츳츳!”
라헬이 검지를 들어 까딱거렸다.
“산에는 공기가 희박하다구요. 이 정도 상식도 없어서야!”“네가 상식을 운운하다니. 양심부터 찾는 게 어떠냐.”
“칫!”
라헬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때 레이드런이 주먹을 쥐며 자세를 낮췄다.
“쉿. 움직임이 감지된다.”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세를 낮추며 다음을 기다렸다.
심지어 보보도 분위기를 따라 몸을 낮췄다.
“저 앞. 인간의 척후병 같군. 수는 총 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처리할 수 있겠나?”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좌측에 여섯을 내가 맡을 테니 우측의 넷은 최현석. 네가 맡아라.”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레이드런이 달림과 동시에 최현석도 땅을 박찼다.
“이것들은 뭐야?”
“적이…. 커헉!”
척후병은 제법 훈련된 정예처럼 보였으나, 인간 병기 용사를 상대로 버티기엔 무리였다.
최현석은 순식간에 병사 넷을 기절시키고는 한 곳에 모았다.
“좋아. 계속 이동하도록 하지.”
일행은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도중에 척후를 한 번 더 만나긴 했으나, 같은 방법으로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산 정상.
인근의 땅이 한눈에 보이는 고지대였다.
레이드런과 최현석의 시력은 수 킬로미터 밖에서 움직이는 사람도 파악할 수 있었기에, 고지대만큼 주변을 살피기 좋은 장소는 없었다.
“레이드런 님. 저거 설마…”
최현석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만에 달하는 사람과 마족이 개미 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레이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트 사단장의 부대군.”“잘은 모르겠지만,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까?”“맞다. 인간에게 포위된 게 분명해.”
최현석은 몰랐지만, 레이드런은 아주 자세하게 전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라트가 어디에 있는지까지 한눈에 찾아냈다.
“그라트 사단장이 쫓기고 있다. 아마 도망칠 생각인 것 같군.”“도망이라… 어떻게 된 건지 짐작이 가십니까?”
“글쎄.”
그라트는 인간과 손을 잡지 않았던가?
그런데 인간에게 포위돼 도망치는 신세라니.
설마 모든 게 인간의 계략이고 그라트도 피해자였던 걸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라헬이 다가왔다.
“뻔하잖아요.”
“뻔하다니. 뭐가?”
“인간이랑 거래해서 우리 뒤통수를 치려다가 자기도 뒤통수 맞은 거죠.”“인간을 이용하려다가 역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그렇죠. 멍청한 마족이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을 간교로 이기기는 힘드니까요.”“으음… 네 소설 같긴 한데 또 묘하게 일리가 있긴 하네.”
생각에 잠겨있던 최현석이 레이드런을 돌아봤다.
“레이드런 님. 저희도 물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상 8사단은 끝난 거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
“아니. 아직이다.”
레이드런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엄청난 집중력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현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이드런을 바라봤다.
“뭐가 보이십니까?”
“그래. 이제 곧 너도 알 수 있을 거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레이드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끄아악! 인간이 끝도 없이 밀려든다!”“주, 죽기 전에 고기를 먹고 싶다… 제발, 한 입만…”“이 미친놈이 누구 살을 먹으려고!”
위기.
그것도 대위기다.
사방에서 인간이 밀려오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패닉에 빠져 허둥지둥하는 사이 병사들은 착실하게 죽어 나갔다.
“제길!”
그라트가 달려오는 인간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콰드득!
단순 악력으로 머리통이 부서진다.
사체를 집어던지며 그라트가 소리쳤다.
“전부 정신 차려! 길을 연다!”
아직 희망은 있다.
적의 수가 압도적이긴 하나, 사방에서 포위한 상황.
한쪽에 힘을 집중하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라트는 가장 선두에서 인간을 학살하며 길을 열기 위해 분투했다.
“도망쳐! 사단장이야!”“8사단장 악어 그라트다!”“영웅! 영웅은 어디 있는 거야!?”
일반 병사들로는 절대 사단장을 막을 수 없다.
영웅이나 그에 준하는 강자.
혹은 기사단이 와야만 상대할 수 있다.
그라트가 호쾌하게 웃으며 거대한 손톱을 휘둘렀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모조리 잡아먹어 주지. 크하하하!”
그 난폭한 기세에 병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순식간에 그라트 앞에 길이 열렸다.
“오호,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때.
그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열린 길 사이로 세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라트도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네놈들은…”
“오랜만이야 악어.”
“비겁자 그라트. 또 병사들을 상대로 힘을 과시하고 있었나.”“저 강약약강 근성은 죽어도 못 버리는군.”
그들의 정체는 연합국의 영웅들.
그라트와는 지난 몇 년간 전장에서 부딪혀온 자들이었다.
“너희가 왜 이곳에…”
이상한 점은 저들이 한자리에 모일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지금껏 놈들은 소속된 국가가 달랐기에 합동 작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라트를 맞이하고 있었다.
“젠장…”
저들이 모였다는 건, 내부에서 합의가 있었다는 것.
그 합의란 그라트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나왔으리라.
‘개같은 제국 놈들!’
신성 제국 가트렌에서 꾸민 짓이 분명했다.
그라트가 우물쭈물하자 세 영웅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우리의 질긴 악연을 끝낼까.”“설마 마왕군 간부가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크르르…”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그라트가 돌연 몸을 돌렸다.
“두고 보자!”
그대로 도망치는 그라트.
영웅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왕군 고위 간부가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전장은 넓다. 굳이 영웅이 막고 있는 곳을 뚫을 이유는 없지. 다른 곳으로 탈출한다!’
그라트가 마왕군 병사들을 밀치며 거침없이 달렸다.
“비켜! 비키란 말이다. 이 쓸모없는 놈들아!”
병사들이 워낙 몰려 있어 길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연합국의 영웅들이 바짝 뒤를 쫓았다.
“악어 대가리! 너는 자존심도 없냐!?”“셋이서 덤비면서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우습군!”
날아오는 마법과 검을 쳐내며 그라트가 소리쳤다.
제법 여유를 가장했으나, 실상 그라트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젠장! 이대로면 모두 끝이다!’
100년 넘게 전장에 군림해온 자신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간악한 인간과 이런 애매한 거래를 하는 게 아니었어! 제길! 아니, 애초에 헤미스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그라트가 세상을 원망하던 그때.
하늘에서 검은빛이 떨어졌다.
쐐애애애액! 쿠우웅…!
정확히 그라트와 영웅 사이로 떨어지는 검은빛.
일순간 전장이 고요해지며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푸슈우우…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속에서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매혹적인 미성이 들려왔다.
“그라트~ 우리 그라트~”
목소리를 들은 그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
오랜만이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군단장님…?”
마왕군 제3군단장. 헤미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