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0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07화(107/273)
흙먼지가 걷히며 검은빛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큰 키에 새하얀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은 윤기 있게 찰랑인다.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시스루 드레스 안으로 고혹적인 몸매가 비쳤다.
모든 남성을 홀릴만한 매력을 지닌 여성.
그녀에게는 한 가지 흠이 존재했는데, 바로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얼굴이 없다.
눈코입이 자리해야 할 곳에는 오직 거대한 입술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설마… 괴식가인가?”
아그로스 왕국의 영웅, 로한 해리스가 말했다.
“틀림없어. 본 적은 없지만 기록에서 본 외형과 일치해.”
도미스 왕국의 영웅, 올리비안 롤렌이 말을 받았다.
“도망쳐야 한다. 아무리 영웅이 셋이 모였다고 해도 군단장은 이길 수 없어.”“동감이야. 후퇴하자.”
그때 한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드라센 제국의 영웅, 자크 홀워드였다.
“어이가 없군. 이 작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도망치자고? 그대들이 나와 같은 영웅으로 불린다니 부끄럽기 그지없군.”“자크 경. 지금은 객기를 부릴 때가 아니오. 괴식가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듣지 않았소?”“그래. 아주 많이 듣고 봤지. 소설이나 다름없는 역사책에서 말이야.”
자크 홀워드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딴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듣고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다니. 너무 한심해서 두통이 올 정도야.”“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내버려 둬.”
올리비안이 로한을 막아섰다.
“저 멍청이 혼자 하게 내버려 두라고.”“인류의 영웅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소이다!”
옥신각신하는 두 영웅을 뒤로하고 자크 홀워드는 돌아섰다.
“필요 없다. 나 혼자 할 테니 너희는 구경이나 하도록.”
자크 홀워드가 혀를 찼다.
저런 겁쟁이들과 더 대화를 나눴다간 싸우기도 전에 힘이 빠질 것 같았다.
‘쯧, 저런 것들도 영웅이라 불리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소국은 어쩔 수 없이 소국인 건가.’
자크 홀워드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성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드라센 제국 출신이다.
황제의 명이 아니었다면 일개 소국의 영웅 따위와 함께 움직이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가 시선을 옮겨 헤미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악어 대가리 그라트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지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다.
‘괴식가. 분명 기록만 보면 범접하지 못할 괴물이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자크도 괴식가에 대한 기록은 본 적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몇 가지가 있었다.
단신으로 당대의 전설과 수많은 영웅을 상대했다.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이 외에도 많지만 다들 비슷한 류의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믿지 못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
그것들을 보며 자크 홀워드는 생각했다.
‘패배자들의 거짓부렁이지.’
괴식가에게 패배한 선대.
그들은 자신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괴식가를 신격화하고 그 무력을 과장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 자크 홀워드 다르다. 나는 전설의 비전을 이은 진실된 영웅!’
자크의 검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자크는 드라센 제국의 전설 엘리스 센드라의 비전을 이은 자.
엘리스 센드라는 800년 드라센 제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춰 그녀의 최후를 아는 이는 없지만.
자크는 우연히 엘리스 센드라의 비전이 담긴 검술서를 얻게 됐다.
그로부터 불과 5년.
평범한 시골 영지의 기사단장이었던 자크는 드라센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게 됐다.
‘비전 최고의 검술로 단번에 끝내주지.’
검에서 번진 불길은 어느새 자크의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의 몸이 한층 더 빨라진다.
화르르르!
자크는 마치 거대한 불덩이처럼 보였다.
빛처럼 쏘아진 그가 마침내 헤미스 뒤에 당도한다.
이 순간에도 헤미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그라트와의 대화에 집중하는듯한 모습.
그 오만함에 자크는 이를 악물었다.
“죽어라!”
거대한 화염이 휘둘러진다.
엘리스 센드라 비전 검술오의(奧義)–연화염설(䖄火焰爇)
엘리스 센드라의 검술서 마지막 장에 기록된 오의.
자신도 아직 완벽히 제어하지 못해 흉내만 내는 수준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단연코 최고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아-!
불꽃이 비명을 지른다.
마치 자신의 몸이 뜨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무엇보다 뜨거운 불꽃의 영혼이 헤미스를 집어삼켰다.
화르륵!
헤미스가 불타올랐다.
근처로 퍼지는 열기조차도 견딜 수 없던 마족과 인간들이 빠르게 물러났다.
자크는 숨을 헐떡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네 오만함의 대가다!”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준다.
이대로 괴식가를 일도양단할 생각이었다.
“이익…!”
자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째서인지 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불꽃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300년 전이었나? 혼자서 나를 죽이겠다고 찾아온 계집이 있었지.”
순간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던 화마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드러나는 것은 헤미스의 새하얀 손가락.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자크의 검을 잡고 있었다.
“확실해. 그년이 사용했던 기술이야. 나도 참, 나이가 드니까 하나하나 기억하기 힘들다니까.”
자크의 동공이 커졌다.
‘엘리스 센드라가 괴식가한테 죽었다고?’
그저 속세를 떠나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전설 엘리스 센드라.
그녀가 사실 괴식가한테 죽임을 당했다니.
“그런데 말이야…”
헤미스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자크의 몸이 힘없이 딸려갔다.
팔이 떨어질 정도로 부들대며 힘을 줘봐도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완력 차이였다.
‘손가락? 고작 손가락으로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가냘파 보이는 새하얀 손.
그 손끝의 엄지와 검지만으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휘두르다니.
두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년은 나름 시원한 맛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너는 영~ 아니네.”
가로로 길게 찢어지는 헤미스의 입술이 이내 귀에 걸렸다.
“흉내도 못 내는 수준이야. 아니, 나름 괜찮은 기술을 아주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어.”
자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표정은 일그러지다 못해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다.
‘나 자크 홀워드가 흉내도 내지 못한다고!?’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자신이 비전 검술을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니.
연달아 오는 충격에 그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쓰레기도 나름 영웅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참 안타깝구나.”
헤미스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자크는 그대로 검을 놓았다.
‘뭔가 잘못됐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우왕좌왕하며 시선을 옮기던 그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았다!”
“뭐를?”
“이건 꿈이었군!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하하하하!”
자크 홀워드의 눈이 완전히 뒤집히고, 이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면전에서 크게 웃어젖힌 탓에 침이 헤미스에게까지 튀었다.
“꿈이야! 꿈이라고! 이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아니, 환각 마법인가? 아무튼, 대단해. 이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다니. 하지만 소용없다. 네 간악할 술수는 다 파악했어! 이제 이 환상 세계를 부수고 나가 네 머리통을 갈라주지! 크하하하하!”
실성한 자크가 쉬지 않고 떠벌렸다.
그 모습을 보던 헤미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병신이 뭐라니.”
헤미스의 손가락이 길어지며 단번에 자크의 목을 꿰뚫는다.
“끅, 끄륵, 꾸륵…!”
자크의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헤미스는 다른 손으로 자크의 머리통을 붙잡아 그대로 뜯어버렸다.
툭.
드라센 제국의 영웅.
자크 홀워드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헤미스는 구두로 머리를 짓밟아 터뜨려버렸다.
“저런 걸 먹었다간 탈이 날 수도 있어. 광견병 같은 게 옮으면 큰일이잖아. 그렇지?”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헤미스 또한 딱히 답을 기대한 건 아닌 듯 아무렇게 않게 걸음을 옮긴다.
“그럼, 나머지도 정리해 볼까?”
붉은 입술이 주욱 찢어지며 귀에 걸린다.
100년간 기다려온 전장이 그녀를 설레게 했다.
***
처음 헤미스가 나타났을 때.
제8사단장 그라트는 생각했다.
어째서 헤미스가 이곳에 있는가.
헤미스는 전장에 나서지 말라는 마왕의 명이 있었다.
그녀가 100년 넘게 흑색 거성에 처박혀 있었던 것도 그 명령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라트는 생각을 바꿨다.
‘어쨌거나 살았다.’
헤미스는 군단장이다.
실제로 그녀의 전투를 본 적은 없지만, 강할 게 분명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연합국의 영웅들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그라트~ 우리 그라트. 또 도망치고 있었니? 정말 꼴불견이구나. 오호호호!”
헤미스가 신경을 긁는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어쨌거나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그 순간, 제국의 영웅이 움직였다.
‘저놈은… 자크 홀워드!’
그라트도 아는 남자였다.
드라센 제국의 영웅 자크 홀워드.
몇 년 전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영웅.
놈의 무력은 그라트도 인정할 정도로 강력했다.
어지간한 영웅과 싸워서는 일대일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자크 홀워드와의 싸움만은 피했다.
그만큼 놈이 사용하는 화염은 위험했다.
“위, 위험합니다!”
다가오는 놈을 보며 그라트가 소리쳤다.
하지만 헤미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히죽 웃을 뿐이었다.
“위험해?”
동시에 자크의 불꽃이 헤미스를 휘감는다.
화르르르!
불타는 헤미스를 보며 그라트는 절망했다.
“이런 젠장!”
저 기술은 자신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금껏 자크 홀워드가 사용했던 어떤 기술보다 강한 위력.
저렇게 정통으로 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드리라.
아무리 헤미스라 해도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멍청한 년! 오만한 것도 정도가 있지! 무방비로 공격을 맞아줘!?’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도가 지나쳤다.
여기서 헤미스가 당하면 자신도 끝이다.
그라트가 다시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화륵!
불꽃이 사라졌다.
나타난 것은 처음과 같은 모습의 헤미스.
심지어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조차 불타지 않았다.
툭.
곧이어 자크 홀워드의 머리가 뜯어지고.
헤미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살려줘”
“괴, 괴식가다! 모두 죽을 거야!”“커, 커헉! 버리지 마. 제발…!”
아비규환. 지옥도가 펼쳐졌다.
헤미스는 단신으로 인간의 군대를 휩쓸었다.
종종 마왕군 병사가 휘말리기도 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쿠르르르!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땅이 뒤집어졌고.
쩌어어어억!
세상이 갈라졌다.
“이게 무슨…”
압도적인 차이.
존재의 격이 달랐다.
아무리 군단장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나다니.
헤미스의 전투를 처음 본 그라트는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헤미스가 한 활약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단신으로 성을 함락했다.
덤벼오는 전설을 죽였다.
국가를 무너뜨렸다.
멀리 다른 전선에서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모두 군단장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한 과장이라 생각했다.
“전설은… 사실이었다…”
그라트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어느새 헤미스는 전장의 정리를 끝냈다.
아직 많은 인간이 도망치고 있었지만, 굳이 쫓아가서 죽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흐응~ 개운해.”
헤미스가 기지개를 켰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 와중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말끔한 모습이 더욱 소름 끼쳤다.
“그라트.”
헤미스가 다가온다.
그라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린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지?”
“예…?”
“뭘 모르는 척하고 그러니.”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그라트의 가슴을 쿡 찔렀다.
“레이드런이랑 최현석. 네가 팔아넘겼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