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18)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18화(118/273)
레이드런은 고뇌했다.
마족의 명예는 어디로 간 건가.
지금껏 무엇을 위해 싸워온 것인가.
150년의 인생이 모조리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셨단 말인가…’
감히 마왕을 원망해 본다.
불경한 생각이란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족과 인간은 양립할 수 없다.
한쪽이 멸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명제는 모든 마족이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절대적인 진리다.
지난 수백 년간 전쟁이 이어져 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족은 싸워왔지.’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의문은 품는 마족은 없었다.
그건 레이드런도 마찬가지였다.
헤미스가 보낸 이 문서를 보기 전까지는.
스르륵-
레이드런은 양피지를 펼쳤다.
벌써 수십 번을 넘게 읽었던지라 보지 않고도 내용을 읊을 수 있다.
그런데도 레이드런은 다시 한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혹시나 자신이 놓친 게 있을까 싶어서.
헤미스가 자필로 쓴 문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레이드런.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레이드런은 천천히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과거를 아는 마족은 없어. 우리는 기록 따위를 남기지 않으니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째서 이 대륙에서 인간과 싸우고 있는지.
그걸 아는 마족은 이제 거의 없을 거야.
어쩌면 마왕님과 나뿐일지도 모르지.
500년이 넘는 시간은 마족에게도 지독하리만큼 길거든.
헤미스의 이야기는 제법 먼 과거까지 거슬러 가며 시작됐다.
사실 우리는 도망자야. 원래 살던 세계에서 패배한 우리를 이끌고 마왕님이 이 땅으로 도망친 거지.
이 대목부터 레이드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누구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
최초의 마족들은 후세에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마왕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사실은 아는 마족은 없다.
설사 알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마족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마왕님은 협정을 맺었고, 백 년간 전쟁은 고착화됐어.
시간이 흘러, 이야기는 최근에 이르렀다.
마왕이 인간 연합국과 밀약을 맺은 것.
마왕군 군단장과 인간의 사령관이 마치 체스를 두듯 병사를 움직여 고의적으로 전선을 유지한 것.
그리고 그러한 명을 따르지 않은 헤미스가 흑색 거성에 유배된 것까지.
모든 이야기가 세세하게 적힌 건 아니었으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없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
신성 제국 가트렌.
그놈들이 키우는 용사를 찾아내서 죽여.
이어지는 내용 또한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성 제국 가트렌에서 비밀리에 용사를 육성하고 있다.
그것도 굉장히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헤미스는 놈들을 뿌리 뽑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가트렌 제국의 목표는 단순히 마족을 없애는 게 아니야.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것.
용사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힘이 있어.
절대 놈들을 무시하지 마.
항상 경계하고, 싹이 보이는 대로 짓밟아.
한동안 가트렌의 비밀 병기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문서의 마지막에 도달했다.
우선은 힘을 키워야 해.
당장은 다른 놈이 제3군단장 자리를 가져가겠지만.
너라면 분명 그 자리를 되찾을 거야.
그때가 네가 움직여야 할 때야.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명심하렴.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
그녀는 잠시 잊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최현석은 너무 걱정하지 마.
프리쉬에게 미리 어떻게 해야 할지 설명해 뒀으니, 그대로 따라.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만, 최현석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지 않겠니?
최현석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헤미스의 이야기는 끝났다.
레이드런은 문서 가장 끝에 적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네 덕분에 흑색 거성에 처박혀 있던 100년이 지루하지 않았어.
고마워.
레이드런은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이내 그가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접어 자신의 품 깊숙이에 넣었다.
“…”
창밖을 보니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지만, 레이드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집무실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부사단장 로이거가 다가왔다.
“모두 모였나.”
“예. 준비는 끝났습니다.”
레이드런은 곧장 성벽 위로 올라갔다.
가드락 성 입구.
드넓은 평야에 무려 일만이 넘는 마족이 모여있었다.
오늘부터 시작될 공습을 위해 모인 제8사단의 병사들이었다.
돌연, 병사들을 바라보는 레이드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은 이들이 죽겠지.’
비록 전투가 길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피해는 클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 모인 병사 중 대다수가 죽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마왕이 원하는 바였으니까.
100년간 전쟁의 규모가 계속해서 축소된 탓에 마족이 너무 많아졌다.
좁은 영토에 지나치게 바글거리는 마족을 정리하는 것도 이번 전쟁의 숨겨진 목적 중 하나였다.
‘지금 저들의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레이드런은 생각한다.
이 거짓된 세상에서 저들의 죽음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고.
그저 거짓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된 헌신일 뿐이다.
의미 없는 죽음과 희생.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레이드런은 다짐했다.
‘너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가치 있도록 만들겠다.’
레이드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모든 것을 토해내듯 소리친다.
“모두 들어라!”
마기가 담긴 외침은 넓은 평야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목소리에 담긴 기세에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마족이다! 마족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전사!”
레이드런이 힘차게 손을 뻗었다.
“싸워라! 죽어라! 마족답게! 마족의 명예를 위해서!”
어쨌거나 병사는 죽는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최대한 명예롭게 죽게 하고 싶었다.
그들 자신이 죽음의 순간에 떳떳할 수 있도록.
“너희가 마족임을 스스로 증명해라!”
“와아아아아아-!”
일만의 병사들이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레이드런이 한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안에 담긴 의지와 기백은 모두의 가슴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
거대한 함성을 뒤로하고, 레이드런은 돌아섰다.
굳은 얼굴로 성벽을 내려가던 그가 결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너희를 기억하마.”
그는 다짐했다.
잃어버린 마족의 명예를 되찾아 돌려주겠다고.
***
마의 경계.
인간이 지난 백 년간 유지된 마족과의 전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마의 경계 인근에는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상적인 영지에서는 살 수 없는 이들.
범죄자를 저질렀거나 노예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게 대부분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도 존재했다.
“바르젠 씨. 또 사냥 가시는 겁니까?”“예. 고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조심하십쇼. 바르젠 씨의 검술 솜씨야 잘 알지만. 요즘 전선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남자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시기에는 꼭 마수들이 밀려옵니다. 아무리 바르젠 씨라 해도 오우거 같은 놈을 만나면 그대로 끽!”
남자가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하하! 명심하겠습니다.”
바르젠은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젠 씨. 조심하세요! 요즘 마수가 부쩍 많아졌더라고요.”“오, 바르젠 씨. 사냥 가십니까?”
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해왔다.
마을에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런 탓도 있으나, 바르젠의 경우는 조금 더 특별했다.
바르젠은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몰락한 귀족
출신인 그는, 과거 이름을 날리던 기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가문이 반역죄에 연루됐고.
결국, 마의 경계로 도망쳐 화전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라는 게 바르젠이라는 남자의 배경이었다.
바르젠이 5년간 마을에서 사는 동안 이러한 그의 배경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마을은 조용해서 좋긴 한데, 너무 좁아서 탈이란 말이야.”
마을 밖으로 나온 바르젠이 중얼거렸다.
“연습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혼자서 살아야 하나?”
마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장소.
깎아지른 절벽 앞에 도착한 바르젠은 검을 뽑았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서서히 움직인다.
휙!
검이 허공을 갈랐다.
지극히 평범한 베기.
하나, 그 결과는 결코 평범치 않았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절벽이 무너져 내린다.
검로를 따라 깔끔하게 절단된 절벽은 마법처럼 미끄러지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결과.
사실 바르젠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드라센 제국의 전설, 바젤 스콧.
그는 이처럼 외딴 장소를 돌아다니며 홀로 검술 수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아.”
바젤 스콧이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그의 뒤에서 아름다운 미성이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다니? 그 정도면 훌륭해. 마나도 거의 쓰지 않고 말이야.”
바젤 스콧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목표는 절벽 뒤에 있는 나무였거든. 아마 절반 정도밖에 베어내지 못한 것 같아.”
바젤 스콧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절벽의 반대편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했는데,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상처가 나 있었다.
“오호~ 이건 정말 놀라운데? 생각보다 더 많이 성장했구나.”“시간이 흘렀으니까.”“그러네. 대충 백오십 년 만인가?”“정확히는 백오십삼 년 만이지.”
마침내 바젤 스콧이 돌아섰다.
그곳에는 새하얀 피부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아니, 여성이라 해도 되는 걸까.
그녀의 얼굴에는 눈코입이 없다.
오직 거대한 입술뿐이다.
마왕군 제3군단장, 헤미스가 바젤 스콧을 마주했다.
“어머! 어떻게 얼굴이 더 젊어진 것 같아?”
헤미스가 입술을 가리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바젤 스콧은 40대의 중년 남성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적어도 20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수염은 어디 갔니? 꼴불견이긴 해도 나름 멋이 있었는데 말이야.”“관리하기 귀찮아서 말이야.”“그거 정말 아쉽네.”
말과는 달리 전혀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아무튼, 정말 신기하다. 누가 너를 300살 먹은 노인이라고 하겠니?”“그쪽이야말로 전혀 변하지 않았어. 백오십 년 전. 그때와 똑같아.”“피부 관리를 열심히 하거든.”
순간 바젤 스콧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농담인가?”
“농담이야.”
“성격이 변했군.”
“그래? 하긴 내가 좀 밝아지긴 했어. 오호호호!”
헤미스가 특유의 하이톤으로 웃었다.
바젤 스콧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반갑게 느껴지다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군.”
과거에는 PTSD가 생길 정도로 지긋지긋하고 두려웠던 웃음소리.
하나, 150년이 넘는 시간은 두려움을 잊게 했고, 대신 그 자리에 호승심을 채워 넣었다.
“그래서. 못다 한 승부를 마무리 지으러 온 건가?”
“으음~ 비슷해.”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정확히는 백오십 년 전에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겁쟁이를 잡으러 왔지.”“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그건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였다.”“하여간 전설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자존심만 세다니까. 막상 들춰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야.”
헤미스가 혓바닥으로 붉은 입술을 훑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아.”“재미… 역시 그게 목적이었나?”“다른 게 필요하니?”“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무엇이든 한낱 유흥거리로 취급했어.”
“…”
“목숨이 사그라지는 전쟁도, 명예를 건 전투도 네게는 그저 놀이에 불과했지.”“흐응~ 설교라면 딱히 듣고 싶지 않은데.”“그냥 개인적인 감상이다.”
바젤 스콧이 말을 이었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어째서 너는 그럴 수 있을까? 그 어떤 전투도 네게는 유흥에 불과한 걸까? 고민하던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어머, 나도 모르는 걸 알아채다니 대단하네. 그게 뭐니?”
바젤 스콧이 스산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구도 네게 위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포가 없으니 네게는 모든 것이 그저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졌겠지.”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오늘 네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해주마. 그러면 더는 목숨을 건 전투 앞에서 재미라는 헛소리는 지껄이지 못하겠지.”“입으로 싸우니? 하여간 늙은이들은 말이 너무 많다니까.”
헤미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바젤 스콧이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