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2)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2화(12/273)
헤미스는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최현석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랐다.
‘아… 진짜 재수 더럽게 없네.’
한창 시무룩해 있는 와중에 앞에서 걸어가는 보보가 보였다.
씰룩, 씰룩!
엉덩이를 아주 신나게 흔들며 걷는다.
아무래도 주인을 만난 게 기쁜 것 같았다.
‘너는 걱정이 없어서 좋겠다.’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최현석은 어느새 헤미스의 집무실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도록 할까?”
헤미스가 책상에 요염하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걸친 시스루 사이로 새하얀 살결과 육감적인 몸매가 비쳤다.
분명 모든 남성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이상적인 몸매였다.
하지만, 최현석의 눈은 다른 곳에 고정돼 있었다.
‘잡아먹히는 건 아니겠지.’
얼굴을 가득 채운 붉은 입술.
저 커다란 입술이 2m 넘게 찢어지며 보보를 꺼내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괜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최현석이 심호흡을 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현석은 최대한 담백하게 사실을 전달했다.
보보가 선임병을 잡아먹은 것.
살기 위해 조리장으로 향한 것.
그러던 와중 사고가 터지고, 기지를 발휘해 병사들을 휘어잡은 것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헤미스의 입술이 주욱 찢어졌다.
“오호호호!”
헤미스가 새하얀 손으로 입술을 반쯤 가리며 신나게 웃는다.
“재미있네. 아주 재미있어! 당장 사지가 찢겨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나와 보보를 팔아서 살아남을 생각을 했다 이거지?”“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최현석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죽을죄라니? 나는 지금 너를 칭찬하고 있는 거라고.”
“예…?”
갑자기 칭찬이라니.
영문 모를 소리였다.
“레이드런이 데려온 인간이라 받아줬지만, 솔직히 기대는 안 했어. 하루도 못 버틸 거라 생각했거든.”
사실 그녀의 말처럼 하루도 버티지 못할뻔하긴 했다.
잠깐 사이에 목숨의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으니까.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인간이네.”
헤미스가 손으로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역시 인간답다고 할까? 이곳 멍청이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영악함이 있단 말이야.”
“…”
“하지만 인간답지 않게 배짱도 제법 두둑한 것 같고.”
“감사합니다.”
최현석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혹시 마왕군에서 어떻게 지휘관을 뽑는지 아니?”“가장 강한 자가 대장이 된다고 들었습니다.”“맞아. 이곳에서 중시하는 건 오직 무력뿐이지. 그래서 문제야.”
헤미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군에는 멍청이밖에 없어. 강함 외에 다른 걸 도외시하니 갈수록 멍청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아?”“잘 모르겠습니다…”“뭐,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거야.”
갑자기 헤미스가 최현석에게 걸어왔다.
“그래서 말인데…”
최현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서 보는 헤미스의 입술은 새삼 공포스러웠다.
코앞까지 다가온 헤미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너 간부가 될 생각 없니?”
“예?”
“내 밑에서 일하라고. 이해하기 어려워?”
“아닙니다!”
“그럼 승낙하는 거지?”
헤미스의 물음에 최현석의 눈알이 미친 듯이 굴러다녔다.
‘시벌… 용사 인생 스펙터클하네.’
마왕군 노예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간부가 되라고 한다.
어디 밑바닥부터 시작한 초고위 마족의 자서전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다.
최현석이 숨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왕군에서는 강해야 지휘관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제 실력으로는…”“물론, 지금 네 실력으로는 안 되지. 여기는 강함이 전부니까.”
헤미스가 손가락으로 최현석의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런데 강함이 모든 걸 대변하는 이곳에서 인간이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 한 달? 장담하는데, 잔머리로 굴리는 것도 금방 한계가 올 거야.”
“…”
“설마 계속해서 나와 보보를 팔아먹어서 살아남을 생각은 아니었겠지?”
“아닙니다!”
“그래.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헤미스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가 널 보호해줄게. 내가 나선다면 적어도 이 3군단에서 너를 건들 놈은 없겠지.”
“…”
보호해주겠다는 말에도 최현석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다만, 이건 조건부야.”
예상대로 헤미스는 조건을 걸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한 달. 그 안에 내가 골라준 녀석과 싸워서 이겨. 승리할 때마다 보호 기간을 한 달씩 연장해줄게.”
“…”
“그렇게 차근차근 윗놈들을 죽이면서 계급을 올리는 거지. 대충 대대장만 달아놓으면 너도 쓸만하지 않을까?”
간단하게 정리하면 매달 헤미스가 지목한 마왕군을 죽여 계급을 올리란 소리다.
‘말이 쉽지…’
마왕군에는 일반 병사만 해도 지구에서는 괴물 소리를 들을 놈들 뿐이다.
그런 놈들 중에서 닳고 닳은 고위 장교가 된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절대 무리였다.
하지만 최현석에게 이 제안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군단장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오호호! 시원시원해서 좋네!”“군단장님. 하나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니? 말해보렴.”
“저… 레이드런 님은 정확한 계급이 어떻게 됩니까?”
레이드런은 최현석이 유일하게 전투하는 모습을 직관한 마왕군 간부다.
그의 계급을 알면 목표인 대대장이라는 게 어떤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얘도 참. 내가 설마 너한테 레이드런 수준을 기대하겠니? 레이드런은 대대장보다 윗줄이야.”“답변 감사합니다!”
최현석은 작게 안도했다.
역시 레이드런은 평범한 간부가 아니었나 보다.
‘하긴, 그게 평범 수준이면 인간은 진작 멸망했겠지.’
주먹 한 방에 중무장한 기사를 피떡으로 만들어버리던 레이드런이다.
마왕군에 그런 강자가 넘쳐난다면 인간은 이미 이 땅에서 모습을 감췄을 것이다.
“앞으로 잘해봐. 선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예! 맡겨만 주십시오!”“아, 혹시라도 결투에서 패배한다면 편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
“예…?”
헤미스의 혓바닥이 붉은 입술을 스윽 훑었다.
“그때는… 장담하는데 죽고 싶은 기분이 뭔지 뼈저리게 알게 될 거야.”
***
집무실을 나온 최현석은 곧장 조리장으로 향했다.
보보의 식재료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귀염둥이가 널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앞으로 매달 헤미스가 지목한 병사와 결투를 해야 한다.
그렇게 거래 아닌 거래를 했지만, 원래 임무인 보보의 사육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보보야. 네가 대신 싸워줄래?”
“크왕!”
최현석의 물음에 보보가 힘차게 짖었다.
마치 나만 믿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귀여운 자식!”
최현석이 보보의 머리통을 열심히 쓰다듬었다.
“에휴…”
“웬 한숨이야?”
어깨에 앉아있던 라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제 용사님이랑도 한 달 뒤면 이별이네요.”“재수 없는 소리 할래?”
최현석이 도끼눈을 뜨며 바라봐도 라헬은 여전했다.
“상황이 그렇잖아요. 용사님은 아직 레벨 1이라고요. 보통은 어디 토끼나 쫓아다닐 다닐 시기인데 갑자기 마왕군이랑 1대1로 결투를 하라니…”
라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끝났다고 봐야죠.”“야! 언제는 내가 무슨 SSS급 잠재력을 지녔다면서!?”“용사님. 잠재력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말 그대로 잠재된 힘. 속에 숨어있는 힘이라고요.”
“…”
“레벨을 올리면서 차근차근 성장해야 잠재력도 나오는 거지, 갑자기 싸운다고 잠재력이 펑! 하고 나올 거 같아요?”
평소라면 라헬을 한 대 쥐어박았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하아…”
사실 최현석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쿠르켄이라는 이름의 오크야. 이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헤미스는 결투 상대가 누구인지 곧장 알려주었다.
그녀 앞에서는 이길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두려운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라…”
지구에서 최현석은 수많은 싸움을 치러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것은 링에서 룰을 가지고 싸운 것.
이렇게 목숨을 걸고 날붙이를 휘두르는 말 그대로 날것의 싸움은 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겨야만 해.’
최현석이 의지를 다잡았다.
“금발의 귀족
영애와 결혼. 자식은 다섯 정도. 노후에 대저택의 마당에서 손주들이 뛰어노는 걸 구경할 때까지는 절대 못 죽는다.”“이런 상황에서도 금발 타령이라니. 진짜 용사님도 어지간하네요. 아주 최고예요!”
라헬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네가 노총각으로 죽은 남자의 마음을 알아!?”“용사님을 보니까 알고 싶지도 않아졌어요.”“이게 뚫린 입이라고!”
최현석이 라헬을 붙잡아 보보에게 내밀었다.
“보보! 먹어!”
“꺄아아아! 미쳤어요!?”“그래! 미쳤다! 어쩔래!? 보보! 얼른 잡아먹어!”“크와앙!
***
“우으으… 더러워…”
라헬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몸은 보보의 침으로 홀딱 젖어 있었다.
“얼른 사라지기나 해. 이제 조리장에 들어가야 하니까.”
최현석은 마침내 목적지인 조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헬이 모습을 숨기자 곧장 조리장의 문을 열었다.
“인간이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람한 덩치의 마왕군이었다.
‘조리병인 거겠지…?’
분명 칼을 들고 앞치마를 하고 있으니 조리병이 맞긴 할 것이다.
들고 있는 식칼이 어지간한 도끼보다 거대하고 앞치마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최현석이라고 합니다.”“조리장 쿨칸이다. 너는 군단장님이 말씀하신 인간이군.”
조리장(匠).
즉, 이곳의 대장이란 뜻이다.
쿨칸이 자신을 아는 듯하자 최현석은 내심 놀랐다.
‘벌써 공문 같은 게 내려온 건가?’
헤미스의 집무실을 떠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명령 하달이 끝난 것 같았다.
“그래서. 인간이 여기엔 무슨 볼일이냐.”“고기 종류의 식재료. 보보 님의 간식을 얻고 싶습니다.”
“아, 사육사였나?”
“예. 맞습니다!”
쿨칸은 이미 여러 차례 사육사의 방문을 받은 듯했다.
‘다행이야.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어.’
최현석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선임 사육사들이 그러했듯 식재료를 받기만 하면 상황은 끝일 테니까.
하지만 일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식재료는 줄 수 없다.”
“예?”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
“군단장님의 명은 너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것뿐. 너를 도우라는 말씀은 없었다.”
최현석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벌…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네.’
한 달 뒤에 있을 결투 준비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골칫거리가 끝도 없이 나타났다.
“인간. 식재료를 얻고 싶나?”“예! 얻고 싶습니다!”
최현석이 힘차게 대답했다.
앞으로 보보와 생활하기 위해서 식재료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투를 하기도 전에 보보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하지만, 쿨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직접 가져가도록.”
“예…?”
“때마침 식재료를 구하러 갈 시간이 됐군. 따라와라.”
최현석을 얼떨결에 쿨칸을 따라 조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어째서인지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쩌업, 쩝! 역시 조리병을 하기 잘했다니까!”“이건 무슨 고기야!? 육질이 완전 연한데!?”“어제 죽은 파텍이야.”“어쩐지! 파텍 최고구만! 크하하하!”
대화 중간중간에 께름칙한 내용이 들려왔으나 최현석은 애써 무시했다.
“쿨칸 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식재료를 사냥하러 가기 전에는 가끔 이렇게 만찬을 벌이지.”
“음…?”
최현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쿨칸의 말에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재료를 사냥한다고?’
사냥. 그리고 사냥을 떠나기 전에 즐기는 호화로운 만찬까지.
‘찝찝하네. 꼭 어디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안좋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고 했던가.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자신의 예상대로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