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20)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20화(120/273)
헤미스의 권속 중 하나인 프리쉬.
한때 추기경 엘론드로 위장했던 그는 현재 인간 마부의 모습을 하고 마차를 끌고 있었다.
“준비는?”
프리쉬가 물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최현석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갑옷은 입었고…”
최현석은 위압감 넘치는 검붉은 계열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효용이 어떤지는 몰라도, 인간 세상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 때문이었다.
“머리색은 보자… 잘 나온 것 같습니까? 아벨슨 씨.”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아벨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어울리시네요.”
최현석의 머리칼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원래의 검은 머리칼은 너무 눈에 띄기에 어쩔 수 없이 한 염색이다.
이 세계에서 검은색 머리칼을 가진 건 마족이나 용사뿐이었으니까.
“아벨슨 씨도 잘 어울리시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아벨슨은 또한 염색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밝은 백금발.
은발이 비교적 드문 편이기도 했고, 은발의 차기 성녀는 워낙 유명했기에 필요한 조치였다.
‘역시 머리는 금발이야…’
최현석이 멍하니 아벨슨을 바라봤다.
원래도 신비로운 은발에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그녀지만, 금발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공주님이란 말을 들어서 그런가? 진짜 공주처럼 보이네.’
최현석이 늘 부르짖던 금발의 귀족
영애.
이 경우엔 금발의 왕족
영애가 되겠지만, 어쨌든 ‘금발’과 ‘영애’라는 점이 중요했다.
귀족이든 왕족이든 이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이익…! 용사님!!!”
라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현석은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침 떨어지겠어요! 턱 좀 닫으세요!”
“아, 응.”
“하여간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서 어쩌시려구! 그러다 큰코다치는 날이 올 거라고요!”
라헬의 다그침에 최현석이 정색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라헬.”
“왜, 왜요…?”
“나는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아니야. 미녀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고작 저런 내용이라니.
머리가 아파진 라헬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하아, 세계의 미래가 어둡다. 어두워.”“원래 용사는 미녀를 지켜야 하는 거야. 어릴 때 동화책 안 봤어?”
“말을 말죠…”
그때 마부석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다. 이제 곧 도시에 들어갈 예정이니 잡담은 금지야.”
“알겠습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름이나 신분이 헷갈리지 않도록 신경 써라.”
“예.”
앞으로 새로운 신분,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혹시라도 정체가 들통 나서는 안 됐기에 최현석은 다시 한번 자신의 신분을 되새겼다.
‘이름 라비 바헤트. 나이는 서른. 바다 건너 아탈 왕국 출신이고, 현재는 아그로스 왕국에 귀화해 기사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동양적인 최현석의 외모가 이국적이라 만들어진 설정이었다.
“멈춰라.”
마차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시 입구를 지키는 경비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마부로 위장한 프리쉬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능숙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신분과 방문 목적을 말하도록.”“아이고, 기사님. 고생하십니다! 저는 도르프라고 합죠.”“네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 마차에 든 게 뭐지?”“아그로스 왕국의 영애, 알리엔 크리시 님께서 타고 계십니다.”“크리시…? 처음 듣는 가문인데.”“아그로스 왕국이 워낙 멀지 않습니까. 하하!”
“흐음…”
“영애께서는 사정이 있어 며칠 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하신 생태입니다. 어서 숙소를 잡고 쉬셔야….”
“그만.”
기사는 프리쉬의 말을 끊어내고는 마차로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한 기사가 창문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아벨슨과 최현석은 가만히 기사를 바라봤다.
“…”
잠깐의 정적.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벨슨이었다.
“언제까지 쳐다보실 생각이시죠?”“아, 죄송합니다! 신분패를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네.”
아벨슨은 미리 조작된 신분패를 내밀었다.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신분패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
기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신분패에 압도된 기사는 제대로 확인해볼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예! 확인했습니다.”“그럼 도시로 들어가도 되겠죠?”“물론입니다. 키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애. 편안한 여행 되시길.”
기사가 예를 갖추며 물러나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우, 생각보다 별거 없네요?”
“긴장하셨나요?”
“조금, 마왕군을 벗어나는 건 처음이라서… 하하!”
최현석이 멋쩍게 웃었다.
“최현석 씨.”
“예?”
“용사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던데. 최현석 씨도 그렇나요?”
“뭐… 맞습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최현석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하실지도 몰라요.”“무슨 말씀이십니까?”“처음 이 땅의 민낯을 본 용사들은 하나같이 그랬거든요.”
아벨슨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세계는 너무 썩었다고.”
***
같은 시각.
신성 제국의 군대는 총력을 동원해 헤미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결계! 결계를 유지해!”“적은 하나다! 물러나지 마라!”
천 명이 넘는 성기사가 사용하는 신성 마법, 그리고 헤미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마도구들이 사방에서 빛을 뿜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을 들인 건 바로 빛의 기둥이다.
우우우웅…!
처음 하늘에서 떨어진 여섯 개의 기둥.
하나하나가 빌딩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기둥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성녀 모리얼이 시전한 최고위 신성 마법, 빛의 신전이었다.
준비에만 몇 시간이 걸리고, 막대한 신성력이 소모되는 초대규모 마법이다.
어지간해선 사용할 일이 없는 까다로운 마법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화아아아-!
빛의 신전이 뿜어내는 신성력은 헤미스를 가두는 동시에 그녀의 마기를 약화시킨다.
덤으로 공간 내에 있는 성기사들의 신성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즉, 헤미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적진 한가운데서 전투를 치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가트렌 신성 제국의 전설, 아사헬 발드가 나직이 읊조렸다.
“우리 신성 제국이 대륙 최강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라!”
“와아아-!”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성기사라는 존재는 태생부터 마족과의 전쟁을 위한 병기였기 때문이다.
성력은 마기를 이긴다.
마기는 마력을 이긴다.
마력은 성력을 이긴다.
마력과 성력과 마기의 물고 물리는 관계.
물론, 상성에서 우위에 있더라도 압도적인 차이를 뒤집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헤미스는 마력이든 성력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깨부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이다.
‘지금 내가 나서지 않아도 헤미스를 압도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현재 가장 큰 전력인 아사헬 발드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기만 할 뿐.
굳이 그가 나설 필요도 없이, 헤미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마기의 운용을 막아라! 절대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해!”
준비된 마도구와 함께 압도적인 신성력으로 마기를 짓눌러 마법의 사용을 막고.
촤라라라락-!
뿜어져 나오는 촉수는 천 명에 달하는 정예 기사가 순식간에 정리했다.
“준비해라.”
아사헬 발드의 명에 몇몇 성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마법진 위에 자리 잡은 백 명의 성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울었다.
그들의 몸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이내 하늘에 거대한 검이 만들어진다.
고위 신성 마법, ‘심판의 검’이었다.
우웅…!
하늘에 떠오른 새하얀 검.
길이만 해도 10m는 넘어갈 법한 검이 지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고,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아사헬 발드는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전장을 살폈다.
“역시 괴식가군요. 아직도 살아있다니. 경이로운 육체입니다.”
아사헬 발드가 씨익 웃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숨을 헐떡이는 헤미스가 있었다.
“준비… 많이 했네?”“이게 가트렌 신성 제국의 진정한 저력입니다. 어째서 당신네 마왕이 우리에게 납작 엎드리는지, 이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사헬 발드가 서서히 접근했다.
괴식가를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기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그는 밀려드는 긴장감을 애써 무시했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났다.’
괴식가는 힘을 잃었고, 자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금 그가 원한다면 단칼에 괴식가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으리라.
“솔직히… 조금, 놀랐어. 너희 광신도가…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진정한 맹수는 한낱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그랬군… 용사…를 육성하는 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어.”“호오? 이건 의외군요. 거기까지 알고 계셨을 줄이야.”
아사헬 발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사 육성은 가트렌에서 극비리에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제국 내에서도 아는 자가 드물며, 완벽하게 세분화해서 일을 진행하기에 실제 프로젝트에서 일하더라도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게 대다수다.
그런 극비사항을 마왕군 간부가 알고 있다니.
“뭐,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 상관없겠지요. 그리고 이미 계획을 막기에는 늦었습니다.”
“하아, 하아…”
헤미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만 해도 버거운 모습.
사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이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으니까.
“숨 쉬는 게 힘들어 보이는군요. 제가 편안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더는 숨을 쉴 필요가 없으면, 저리 힘들게 헐떡일 필요가 없으리라.
아사헬이 검을 뽑았다.
‘내 손으로 괴식가를 죽인다니…!’
환희가 차올랐다.
사상 최악의 마족.
지난 수백 년간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한 이름 괴식가.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다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다.
“좋니?”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아사헬이 코웃음을 치며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쩌어어어억-!
입술이 2미터 가까이 벌어졌다.
아사헬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전설답게 그 안에 담긴 힘과 속도는 발군.
후웅!
하지만, 그의 검은 마치 허공을 가른 것처럼 헤미스의 입속 공간을 그냥 지나쳤다.
“아…?”
아사헬 발드는 죽음을 직감했다.
콰득!
벌어졌던 입술이 닫히고.
상반신이 날아간 아사헬 발드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사헬 발드 경이 당했다!”“죽여! 당장 괴식가를 죽여라!”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고위 신성 마법이 날아들었다.
콰와아아아-!
수백 개의 마법이 쏟아진다.
폭발의 여파로 흙먼지가 피어올라 시야가 가려졌으나,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과가!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헤미스와 아사헬 발드 시체 위로 마법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
잠시 후.
무려 10분 가까이 이어진 마법의 폭격이 멈췄다.
헤미스가 있던 장소에는 마치 운석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헤미스와 아사헬 발드의 사체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데우시스 교의 성녀, 모리얼은 한숨을 내쉬었다.
괴식가는 처리했지만, 예상치 못한 손해를 입었다.
전설 아사헬 발드의 죽음.
전설이라는 위명(偉名)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괴식가를 상대로 방심을 해?’
깔끔하게 끝낼 수 있던 일을 망쳐버린 아사헬 발드가 원망스럽다.
오직 제 손으로 괴식가를 처리했다는 명예를 위해서.
그것도 방심한 채로 일을 벌이다니.
강자의 세계에서 싸움은 한순간에 결정 나는 때가 많다.
아사헬 발드는 그저 방심의 대가를 치른 것뿐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억울한 죽음이겠으나, 이미 단두대는 떨어졌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다.
‘괜히 나까지 곤란하게 됐어.’
아사헬 발드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교황이 역정을 낼 것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온다.
“복귀합니다. 제국의 수도로.”
“예. 성녀님.”
성녀 모리얼이 할 수 있는 건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천명에 달하는 성기사를 이끌고 신성 제국의 수도 그라티암으로 복귀한다.
“…”
모두가 떠나고 아무도 남지 않은 공터는 황폐했다.
전투의 여파로 남은 것은 잔해와 모래 먼지뿐.
생명이 사라진 땅에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피륙의 조각.
그것은 아주 천천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꾸물… 꾸물…
그 상태로 몇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만들어진 것은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될 법한 크기의 작은 입술이었다.
“…”
한동안 바닥에서 드러누워 있던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씨익-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