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29)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29화(129/273)
“오늘 오후. 영주와 길드장이 만난다고 해요.”“오! 그거 잘됐네.”
벨의 말에 최현석이 반색했다.
“솔직히 한번 찔러본 거였는데, 이게 되네.”
노리고 움직인 건 맞지만, 정말 둘의 만남이 성사될 줄은 몰랐다.
확률로 따지면 50 대 50 정도.
어차피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수준의 일이었다.
“따로 처리하면 귀찮기도 하고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이왕이면 한 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베스트지.”
최종 목적은 용병 길드장과 영주를 모두 처리하는 것.
그러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자리에서 둘을 처리하는 것이다.
따로 처리할 경우 살아남은 쪽이 경각심을 가질 수도 있고.
혹여나 도망이라도 치는 날에는 여러모로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자, 그러면 여기서부터가 또 중요한데…”
최현석이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옆에 있던 라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또 뭐가 남았어요?”“당연하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재미를… 아니, 안전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어?”
“안전?”
“그래. 배우를 섭외하는 거야.”
배우를 섭외한다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저 유사 용사가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궁금해하는 모습이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줄게.”
최현석이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안에 ‘영주’라는 글자를 썼다.
“이 동그라미가 영주. 그 아래 가지 두 개가 영주의 부하야.”
영주 아래로 그은 두 개의 가지에 각각 범죄조직과 경비병이란 글자가 쓰였다.
“그리고 나는 영주의 자금줄인 범죄조직을 족치고 있지.”
최현석이 범죄조직이라 적힌 가지에 X표시를 했다.
“화가 난 영주는 병사를 동원해서 나를 잡고 싶지만, 절대 잡을 수 없어. 왜? 애초에 그놈들은 영주 편이 아니거든.”
범죄조직의 옆, 경비병이라 적힌 것은 성의 경비를 포함한 정규병을 말한다.
그곳의 상단에는 기사단장 홀크만의 이름을 썼다.
“보아하니, 성의 실질적인 병권은 홀크만이 쥐고 있어. 그런 홀크만이 나를 숨겨주고 있는데,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어?”
“그렇죠.”
“자, 이런 상황에서 영주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뭐가 있을까.”
이번에는 최현석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세모를 그렸다.
그곳에는 용병 길드라는 글자를 썼다.
“키톤에서 가장 큰 무력 집단인 용병 길드. 여기밖에 없는 거지.”“으음, 그래서 둘이 만나기로 했다는 거죠?”“그렇지. 그런데 중요한 건 따로 있어.”
최현석이 용병 길드라 적힌 세모에서 다시 선을 그었다.
그 선은 아까 X표시를 했던 범죄조직과 이어져 있었다.
“용병 길드의 입장 보자고. 그놈들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범죄조직이 갑자기 망하고… 영주가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죠?”“아니지. 그 이전에 말이야.”
최현석이 용병 길드와 범죄조직 사이에 ‘돈’이라는 글자를 썼다.
“여기 범죄조직은 용병 길드에도 돈을 대고 있었단 말이야.”
“그렇죠.”
“그리고 용병 길드는 내 존재를 몰라. 그놈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자금줄이 끊어져 버린 거야.”“아하! 그렇겠네요.”“그러면 용병 길드 입장에서, 지금 가장 가장 의심되는 인물은?”“어… 영주인가요?”
“정답!”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용병들만 처리한 거야. 병사는 살려두고.”
이 외에도 최현석은 교묘하게 영주와 길드장의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들을 깔아뒀었다.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으리라.
“용사님! 엄청 똑똑하시네요!”“이 정도는 기본이지.”“역시 나쁜 쪽으로는 용사님 머리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최현석이 가늘게 뜬 눈으로 라헬을 바라봤다.
“칭찬이지?”
“물론이죠!”
“크흠! 아무튼, 잘 됐어.”
최현석이 펜으로 영주와 용병 길드 사이에 새로운 선을 그었다.
“사실 워낙 변수가 많아서 이렇게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도 컸지. 솔직히 되면 말고 안되면 그만이었는데, 다행히 성공한 것 같네.”“그래서. 아까 말한 배우를 섭외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아, 그 이야기를 안 했구나.”
재미있는 생각이 난 듯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자! 우리는 지금 용병 길드에 의심의 불씨를 심었어.”
“네.”
“다음으로 할 일은 불씨 위에 기름을 들이붓는 거야.”“그 배우를 섭외해서요?”
“맞아.”
최현석이 금고를 열었다.
그곳에는 무려 수백 개에 달하는 금화가 쌓여있었다.
“총알은 충분하고.”
그런 뒤에 벨을 바라봤다.
“발이 넓은 스카우터도 있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가리켰다.
“협상의 달인인 내가 있으니까 준비는 끝난 거나 다름없지.”
“오오!”
“그럼 움직여 볼까? 시간이 촉박하니 좀 바쁠 거야.”“재미있을 것 같아요!”
라헬의 말에 최현석이 사악하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
“기대해도 좋아. 아주 끝내주게 재미있을 테니까!”
그의 머릿속에서 악랄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샘솟고 있었다.
***
“이런 개 같은!”
기사단장 홀크만이 욕설과 함께 테이블을 내리쳤다.
콰지직!
두툼한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금이 가고, 위에 올려진 서류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 자식이 감히 나를 이용해 먹으려 해!?’
오늘 아침.
영주에게 한바탕 욕을 먹은 후 홀크만은 곧장 최현석을 찾아갔다.
“죽이라는 영주는 내버려 두고 뭘 하고 다니는 건가!?”“조만간 할 거라니까 그러시네.”
홀크만이 다그쳐도 최현석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런 식이면 자네를 버릴 수밖에 없어. 잘 생각하게.”“호오? 그러면 당신도 무사하긴 힘들 텐데. 내가 워낙 입이 가벼워서 말이야.”“흥! 내가 반역을 꾀했다는 증거라도 있나? 증거 없이 입만 나불대는 범죄자. 기사단장으로 있는 나. 영주가 누구를 믿을 것 같나?”
그때 최현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허공에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서 영주 놈의 목을 잘라야지! 여기서 평생 눌러앉을 생각인가?”“저택에서 기사들을 빼내 줄 테니 자네는 그냥 빈집에 들어가서 영주의 멱을 따기만 하면 돼!”
명백히 홀크만의 목소리.
그 외에도 최현석이 가진 증거는 많았다.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으니, 괜한 생각하지 마십쇼.”
비열한 미소를 짓는 최현석을 보며 홀크만은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버릴까?
“…”
하지만 이내 그만둔다.
놈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만 버티면 되는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할 걸세.”“오늘은 무조건 처리할 테니 걱정 마십쇼.”
그렇게 최현석을 만난 이후.
씩씩거리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홀크만에게 또 다른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와 길드장이 만난다고!?”“예. 앞으로 한 시간 남았습니다.”“쯧! 병사들을 준비시켜.”
영주와 용병 길드장이 만나야 하니 호위가 필요하단다.
“이 시국에 용병 길드라니! 하여튼, 쓸데없는 짓을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보통 지역의 영주와 용병 길드장이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외부의 시선 때문이다.
용병 길드가 워낙 큰 무력 집단이다 보니 움직임 하나하나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윗선의 정치적인 문제도 엮여 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영주와 용병 길드장은 만나지 않는 게 최고지만.
만약 만나야 한다면 비밀스럽게 접선한다.
바로 지금처럼.
“기사단에서 호위 인원을 뽑고, 병사로 일대의 통행을 금지시켜.”
“알겠습니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체면치레 문제도 있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철저한 호위는 필수다.
영지 최고의 무력인 기사단장 홀크만 또한 영주의 호위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조용히 움직여라.”
잠시 후.
사복 차림으로 위장한 영주와 기사들이 성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영주의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고급 선술집.
원래는 용병 길드장을 저택으로 부르려 했으나, 그가 결사코 반대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선정된 장소였다.
“오랜만이오. 몰드베 길드장.”“영주님을 뵙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영주 페로스와 용병 길드장 몰드베가 만났다.
각자 열댓 명의 호위를 대동한 상태였는데, 용병 길드 쪽의 눈빛이 유독 사나웠다.
홀크만이 유심히 용병 쪽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더 인상이 더러워 보이는군.’
애초에 기사와 용병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다니.
아무리 몰상식한 용병들이라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 영주와 길드장의 이야기가 진행됐다.
“길드장도 알다시피. 요 며칠 도시의 분위기가 흉흉하오.”
“그렇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
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선 남자는 피투성이였는데, 복장으로 보아 용병처럼 보였다.
그가 소리쳤다.
“기, 길드가 공격받고 있습니다!”“뭐?
“도시의 경비병이 저희를 공격하고 있단 말입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간 검이 한 용병의 목에 박혔다.
“이 개새끼들이!”
“전부 족쳐!”
그렇게 한동안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용병과 기사단의 개싸움이 시작됐다.
***
브란은 원래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으나, 여동생과 함께 가게를 꾸려가며 건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용병이 된 건, 영주 페로스 때문이었다.
“노라… 노라…!”
브란의 여동생 노라.
어릴 때부터 성숙한 미모로 도시 총각들을 설레게 했던 그녀다.
마음씨도 고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동생.
그런 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주위에 물어봐도 아무도 본 이가 없다.
그 누구도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한참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브란은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알았다.
“그 소문 들었어? 영주가 도시의 처녀들에게 손을 댄다더라!”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일이 자신의 동생에게 벌어진 것이다.
브란이 동생 노라를 찾은 건 그로부터 무려 한 달이나 지난 후였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강.
빨래하던 아낙이 떠내려오는 노라의 사체를 발견했다.
“노, 노라…! 노라아!!!”
그때부터 브란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용병 일을 하는 건 물론이고,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했다.
언젠가 영주에게 복수할 날을 꿈꾸며.
“네게 부탁할 일은 간단해.”
그런 브란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자주색 머리칼에 큰 덩치, 이국적인 외모를 한 사내였다.
“내가 준비해준 옷을 입고, 준비된 장소에 가서, 준비된 대사를 날리면 끝이야.”
“…”
“어때 아주 쉽지?”
“누, 누가 부탁을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이오…”
브란이 퉁퉁 불어 터진 얼굴로 말했다.
최현석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그러니까 곱게 맞이했으면 좋았잖아. 하하!”
브란은 억울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누구냐고 소리친 게 전부였다.
갑자기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저 불청객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더니, 이제 부탁을 들어달란다.
하지만, 브란은 그 파렴치한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영주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
거절하기엔 그 열매가 너무 달아 보였다.
“돈도 얼마든지 줄게. 말만 해.”“돈은 필요 없소… 정말 영주에게 복수할 수 있는 거요?”
“물론이지!”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는 처절하게 외치기만 하면 돼. 이렇게 말이야.”
최현석이 자리에서 일어니 목을 가다듬었다.
“영주가 배신했다~! 영주의 병사들이 우리 길드를 공격한다~!”
과장된 연기 톤으로 소리친 그가 브란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면 나머지는 알아서 굴러갈 거야.”
***
브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야… 정말 싸움이 났다!’
그 남자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그저 용병들이 공격받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된 것인지 용병들은 곧이곧대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일이 이렇게 된 대에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단검도 유효했으리라.
“이런 미친 새끼들이!”“영주님을 피신시켜라!”“놓치지 마! 이 자리에서 전부 죽여야 해!”
기사와 용병들이 접전을 벌였다.
길드장 몰드베가 데려온 이들은 모두 골드, 실버 등급의 용병.
기사에게도 밀리지 않을 전력이다.
콰직! 쿠우웅-!
그리 넓지 않은 선술집은 금세 부서지고 난장판이 됐다.
격전 속에서 브란의 시선은 오직 영주 페로스에게 고정돼 있었다.
“죽인다… 죽여버리겠어…!”
여동생 노라의 원수.
드디어 놈에게 복수할 순간이 왔다.
브란이 검을 뽑고 움직이려던 그때.
“어허, 동작 그만.”
언제 들어왔는지 거구의 기사가 앞을 막아섰다.
기사가 투구의 면갑(visor)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은…”
“쉬잇!”
기사로 위장한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개죽음당할 거야?”
최현석이 다시 면갑을 내리고는 돌아섰다.
“우리 영주님 가시는 마지막은 똑똑히 봐둬야지.”
“…”
“그래야 나중에 동생한테 할 말도 생기지 않겠어?”
남자의 등이 유독 넓어 보인다.
그 뒤에서 브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