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54)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54화(154/273)
레이드런은 부지런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조리 업무와 훈련으로 일정이 가득 차 있을 정도였다.
유일한 휴식 시간인 수면도 고작 세 시간 정도로 극히 짧다.
‘매일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다.’
원래 레이드런은 완전히 잠을 자지 않으려 했다.
수면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괴물 같은 육체라도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면이 필요했다.
결국, 수많은 시도로 끝에 나온 최적의 방안이 바로 지금의 세 시간 숙면이었다.
“음.”
아직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
오늘도 부지런한 레이드런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기계처럼 침소 밖으로 나온 그는 곧장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에 계획된 개인 훈련을 위해서였다.
“후우…”
훈련을 시작하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의 몸에서 땀이 흐르고,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시간을 확인한 레이드런은 마법으로 땀과 노폐물을 걷어내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해가 뜨기는 했어도, 대부분의 마족들은 잠에 빠져있을 시간.
레이드런은 항상 아침 식사를 하며 그날 해야 할 업무 미리 정리하기에 가장 먼저 출근 도장을 찍는다.
덜컥-!
집무실에 도착한 레이드런이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곧장 의자에 앉아 일을 시작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어이.”
누군가 그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인사를 하며 들어 올린 손은 상처투성이다.
한눈에 봐도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게 분명했다.
흘러나온 피가 의자는 물론이고 바닥까지 적시고 있었다.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의 부상.
하지만, 레이드런은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만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마력 통제가 완벽에 가깝다.
상당히 예민한 편인 레이드런조차도 집무실 문을 열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야.”
불청객이 말했다.
살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레이드런을 정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일찍 일찍 좀 다녀라. 기다리다 잘뻔했잖아.”“충분히 일찍 출근했습니다만.”“이 소대가리 새끼. 사단장 달았다고 바로 개기는 거 보소.”
불청객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레이드런은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닫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무리 돌발 상황이라도 해야 할 밀을 미룰 수는 없다.
그가 소파에서 업무 일지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박현아 군단장님.”“잠깐 신세 좀 지자.”“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방 하나만 내줘.”
“저희가 이런 사적인 부탁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는지 몰랐습니다.”
대화하면서도 레이드런의 시선은 계속 업무 일지를 향해 있었다.
박현아는 피식 웃더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대부분은 피에 절어 있었는데,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것을 꺼내 입에 문다.
손가락 끝에 화염을 만들어 불을 붙인 그녀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딱따구리 같은 새끼. 오늘따라 더 딱딱하게 구네.”
“… 농담입니까?”
“상관이 드립을 쳤으면 좀 웃어라.”
“…”
레이드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현아는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신세 좀 진다. 누가 찾아오면 나 없다고 말하고. 무슨 말인지 알지?”
레이드런은 업무 일지를 테이블에 내려뒀다.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무슨 일인지 전후 사정을 말씀해 주시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만.”
“…”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
“군단장님?”
박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드런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박현아 군단…”
말을 하던 레이드런이 멈췄다.
박현아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댄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레이드런은 박현아의 손에 들린 담배를 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부터 한 생각이지만, 박현아와 자신은 정말 맞지 않는다.
“귀찮게 됐군.”
***
최현석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반드시 밤에 습격이 있을 거야.’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적은 찾아온다.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날 밤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최현석이 밤새도록 들은 것이라고는 풀벌레 소리뿐.
다음날 확인해보니 왕실 기사단은 중요한 임무를 위해 떠난 것이라고 한다.
“사령술을 막기 위해 마기 밀도가 높은 이상 지역을 수색한다고 해요.”“아… 그런 거였습니까?”
전날 국왕과 대화를 나눌 때, 최현석과 아벨슨은 미리 사령술에 관해 경고했다.
마족이 대규모 사령술을 준비하고 있으니 미리 대응해야 한다.
“고위 사제나 성기사가 나서는 게 제일 좋지만, 왕실이라 해도 교단을 직접 움직일 수는 없거든요.”“그래서 왕실 기사단이 나서는 겁니까?”“네. 대기 중의 미세한 마기 밀도 차이를 눈치챌 만큼 뛰어난 실력자는 흔치 않거든요.”
아벨슨의 설명에 최현석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해서 걱정거리만 만들었네요. 죄송합니다.”“아니에요. 항상 경계하는 자세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는 모르니까요.”
아벨슨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최현석이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했다 해서 기분이 상할 이유는 없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합당한 의심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래서 더 최현석 씨를 믿을 수 있는지도 모르죠.”“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아벨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다녀올게요.”“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왕궁에 온 지 이제 겨우 2일 차.
최현석과 아벨슨은 곧바로 훈련을 재개할 예정이었다.
다만, 이곳은 왕궁인 만큼 전처럼 멋대로 할 수는 없다.
아벨슨은 우선 국왕 발테어 마리어트의 허락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오오, 아벨슨.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국왕은 환하게 웃으며 딸을 반겼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음에도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훈련하고 싶어서요. 허락을 받으러 왔어요.”“훈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뜬금없는 요청에 국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벨슨은 간단히 설명했다.
최현석과 이전부터 훈련을 해왔으며, 왕궁에서도 그것을 이어가고 싶다는 것.
“네, 네가 메이스를 쓴다는 말이냐?”
“네.”
국왕은 귀한 딸이 육박전을 벌인다는 사실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른 무기도 아니고 둔기인 메이스라니.
그는 안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아벨슨의 의사가 너무 완고했다.
“꼭 해야겠느냐…?”
“해야만 해요.”
“후우, 알겠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국왕은 포기하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왕실 기사단에게 훈련을 받거라.”
“안 돼요.”
아벨슨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왜, 왜 그러느냐?”
“최현석 씨가 뛰어나니 그에게 훈련을 받는 게 나아요.”“그래. 같이 온 용사가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우리 왕실 기사단도 그에 못지않다.”
“그래도 안 돼요.”
“아벨슨!”
결국, 참다못한 국왕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벨슨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안 돼요. 최현석 씨에게 배워야 해요.”“이건 자존심이 달린 문제다. 일국의 공주가 그것도 왕궁에 있으면서 한낱 용사에게 가르침을 받다니. 다른 기사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다른 이들의 기분을 맞추자고 제 성장을 늦출 수는 없어요.”
“하아…”
국왕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꼬…’
아벨슨이 원래 무뚝뚝한 편이긴 해도 절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은 어리광도 부리고.
어떤 날에는 웃음꽃을 피우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런데 차기 성녀로 지목되고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더니.
5년 만에 만난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와 표정.
공주가 아니라 훈련받은 암살자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해.’
국왕이 마음을 다잡았다.
험한 길을 걸어오며 굳어버린 딸의 마음을 녹여주리라.
그러기 위해선 때론 따뜻하게 보듬고 때로는 차갑게 몰아쳐야 한다.
‘일단 그 용사라는 남자와는 떨어뜨릴 필요가 있겠어.’
다른 세계에서 용사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다.
오히려 아벨슨을 지켜줬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딸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서는 사라져야 할 남자다.
결심한 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대련에서 승리한 사람이 네 스승이 되는 거다.”“누가 대련하는 거죠?”“당연히 우리 왕실 기사와 그 용사가 대련하는 것이지.”
“…”
“내가 지목하는 왕실 기사 셋을 쓰러뜨린다면 그 용사를 네 스승으로 인정하마. 어떠냐?”“한번 이야기해볼게요.”“나도 정말 많이 양보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네…”
아벨슨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말처럼, 국왕은 많은 양보를 해줬다.
여기서 더 억지를 부리는 건 하책이었다.
‘부탁드려 볼 수밖에…’
***
최현석과 왕실 기사단의 대련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장소는 왕궁 내부에 있는 연무장.
대련 상대는 왕실 기사 셋으로, 최현석은 한 명씩 차례대로 그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아벨슨은 자신 때문에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린 최현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괜찮습니다. 이런 대련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죠.”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다.
실제로 최현석은 이 상황을 아주 좋게 보고 있었다.
‘기사의 전투 능력을 파악할 좋은 기회야.’
왕실 기사단은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모인 집단이다.
앞으로 인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최현석의 앞에는 세 명의 왕실 기사가 늘어서 있었다.
그는 전투력 측정기로 기사들을 훑었다.
‘평균 전투력은 대충 연대장 정도인가.’
같은 왕실 기사라 해도 전투력은 제각각이었다.
한 명은 7만. 한 명은 9만. 나머지 한 명은 11만이었다.
대략 마왕군 대대장에서 연대장 사이라 보면 될 듯했다.
“모두 모였는가.”
그때 국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수행원을 대동한 채로 연무장에 등장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폐하를 뵙습니다.”
“자자, 오늘은 그리 딱딱한 자리가 아닐세. 우리 자랑스러운 왕실 기사단과 용사 최현석의 친선 대련이니 편히 즐기도록 하세나.”
국왕 발테어 마리어트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현석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즐기기는 개뿔.’
처음부터 기사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에라도 최현석을 찢어발길 듯한 눈빛.
국왕 앞이라 조금은 수그러들었지만, 호승심을 숨기지는 않았다.
“이번 대련은 특별히 카르디널 발다 경이 심판을 볼 것이오. 발다 경.”
“예. 폐하.”
국왕의 말에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른 왕실 기사보다 유독 화려한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최현석은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이 거의 안 느껴져.’
보통은 마력을 통제해도 미약하게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다라고 불리는 남자에게선 거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직접적으로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절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극소량이었다.
최현석은 슬쩍 전투력 측정기를 착용했다.
[ 전투력 : 측정 불가 ]측정 불가.
즉, 전투력 20만이 넘는다는 뜻이다.
그때 국왕이 말을 이었다.
“발다 경은 자랑스러운 왕국의 영웅이자 왕실 기사단의 기사단장. 그가 이번 대련의 심판을 보는 데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오. 이의 있는 자 있소?”
“없습니다.”
그제야 최현석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령술 사태가 급하다 해도 왕실 기사가 전부 왕궁을 빠져나가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저 남자 때문이었나.’
전투력 20만이 넘어가는 영웅.
그 정도라면 다른 왕실 기사가 왕궁을 비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종의 자신감인 것이다.
‘뭐, 저 영웅이랑 싸워야 되는 건 아니니 상관없겠지.’
최현석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은 적진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약간의 실력 행사를 하고 아벨슨을 교육하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저 발다라는 영웅이 있기에 더 안심할 수 있었다.
“안전한 진행을 부탁드리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첫 번째는 누가 나서지?”“가벨. 앞으로 나와라.”
“예.”
가벨이라 불린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검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동작에서 절도가 묻어나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검이라도 있으면 흉내를 냈겠지만, 아무것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기사들의 눈에 불만이 떠올랐으나, 감히 국왕 앞에서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시작해라!”
영웅 발더가 손을 들어 올리며 시작은 선언하고.
기사 가벨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왔다.
“하아압!”
기합과 함께 달려 나가는 가벨.
콰직-!
그는 달려 나간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쓰러진 가벨의 갑옷 정중앙이 움푹 파여 있었다.
“어, 어윽…!”
기사 가벨이 드러누운 채로 피를 울컥 토해낸다.
연무장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