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5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57화(157/273)
최현석이 눈을 번뜩였다.
조금 전부터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마침내 이유를 알았다.
‘너무 조용해.’
왕궁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보이는 것은 널브러진 사체뿐.
전투의 소음은 물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벨슨과 자신을 습격했던 정체불명의 복면인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함정인가…?’
불길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그때.
앞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레이스와 그를 수행하는 기사들이었다.
“레이스…!”
아벨슨이 달려가려 했으나, 최현석이 붙잡았다.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잠시만 제 뒤에 서 계세요.”
최현석의 눈빛이 진중하다.
아벨슨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누님. 무사하셨군요!”
레이스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누이를 걱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현석은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아.’
최현석이 아벨슨을 가지 못하게 했듯, 레이스 또한 일행과 거리를 뒀다.
결과적으로 서로 떨어져 대치하는 형국이 됐다.
“무사하셨군요.”
“예. 최현석 씨도 크게 다치지 않으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최현석이 먼저 말을 걸고, 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국왕님의 침소에서 오시는 길 같은데, 혹시 만나셨습니까?”
국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레이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발 늦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안 돼…!”
레이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아벨슨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최현석만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적이 누군지 보셨습니까?”
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마족일 겁니다. 저도 갑자기 마족이 나타나 전투를 벌였으니까요.”“검은 후드에 복면을 쓴 괴한들은 못 보셨습니까?”“복면? 그건 금시초문입니다만.”“그럼 오직 마족과 싸웠다는 말씀이시군요.”
계속되는 추궁에 레이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뭐 찔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그만하시죠. 아무리 누님의 은인이라 해도 더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습니다.”
레이스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최현석이 피식 웃었다.
“지랄하고 있네.”
“뭐…?”
“입에 침은 바르고 거짓말해라. 사람을 호구로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최현석이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당신들 검에 묻은 피. 그거 사람 피잖아.”
대부분의 마족은 피의 색이 인간과 다르다.
간혹 인간처럼 피가 붉은 마족도 있긴 해도 점성이나 피가 굳는 형태, 색깔, 냄새가 달랐다.
보통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미묘한 차이였으나, 경험이 풍부한 최현석은 한눈에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최현석에게 마족의 피는 절대 인간과 같을 수 없었다.
“마족이랑 싸웠다는 새끼들 검에 사람 피만 잔뜩 묻어있는데, 네 말을 믿으라고?”
“…”
“사실 처음부터 이상했어. 아무리 왕실 기사단이 없어도 왕궁이 이렇게 쉽게 털린다는 게 말이야.”
이곳은 국왕이 기거하는 왕궁이자 동시에 왕국의 수도 스콜본이다.
적이 왕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도를 둘러싼 높은 성벽과 수많은 수도 경비대, 기사단을 넘어야 한다.
“한둘도 아니고, 이만한 규모의 무장 병력이 마찰 없이 수도에 들어오는 건 내부의 조력자가 있지 않고는 힘든 일이겠지.”
설명이 이어질수록 아벨슨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최현석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스. 설마… 네가 아버지를 죽인 거야?”
아벨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대답해! 어서!”
“하아…”
레이스가 한숨을 쉬더니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가 고개를 들자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용사들은 전부 병신이라 들었는데. 눈치가 제법이야.”
레이스가 입꼬리를 잔뜩 비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아버지를 죽였어. 그뿐만 아니라 형님도. 어머니도. 모두 내가 죽였지.”“어째서!? 도대체 왜!”
아벨슨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레이스도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네년 때문이다! 반역자 아벨슨 마리어트!”
“그게 무슨…?”
“후우…”
레이스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가트렌 신성 제국이 너희를 쫓고 있다. 그런데 국왕이라는 작자가 제국의 뜻을 거스르려 하니 내가 나설 수밖에 없잖아?”
“…”
“겸사겸사 미래에 물려받을 왕위를 조금 일찍 받은 것뿐이야.”
아벨슨이 절망 어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네가… 네가 어째서…”“밖을 나돌아다닌 넌 모를 거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말이야.”
말을 하는 레이스의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그 병신들은 한 국가를 통치할 자격이 없어! 내 가족! 같은 핏줄이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라고!”
“…”
“이제 너만 죽으면 모든 게 완벽해져. 그러니 순순히 죽어.”
병사와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수도를 지키는 수비대와 스콜본 기사단이었다.
“드디어 왔나.”
레이스가 피식 웃더니 돌아섰다.
“마족이 국왕 폐하를 시해했다! 여기 마족과 결탁한 반역자 아벨슨 마리어트를 죽여라!!!”
마법으로 확성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와아아아-!”
병사와 기사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숫자가 가능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도저히 일행이 막을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최현석은 가만히 아벨슨을 바라봤다.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최현석의 눈을 마주하던 아벨슨이 고개를 숙였다.
“죽이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보보. 이리 줘.”
“여기요.”
뒤에 서 있던 라헬에게서 보보를 건네받았다.
보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말한다.
“보보. 가자.”
“헦! 헦!”
보보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
최현석은 그런 보보를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조져!”
매섭게 날아가는 보보는 레이스의 앞에서 거대해졌다.
“크와아앙-!”
보보의 포효에 왕궁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레이스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보보를 막아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끄아아아!”
왕실 기사단에 버금갈 정도로 수준 높은 기사가 앞발질 한 번에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이, 이게 뭐야!? 이딴 마수가 있다는 말은 없었다고!”
깜짝 놀란 레이스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스콜본 기사단은 뭘 하나!? 빨리! 빨리 저 마수와 배신자 년을 처리하란 말이다!”
“어딜 도망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최현석이 손을 뻗었다.
레이스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며 손을 피했다.
그 또한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검사.
재능 또한 뛰어났기에 20살의 나이에도 제법 높은 수준의 경지에 올라선 상태였다.
“죽어!”
레이스가 검을 휘둘렀다.
단번에 목을 벨 작정이었다.
하지만, 검은 너무나 쉽게 최현석의 손에 붙잡혔다.
“이익…!”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줘도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최현석이 레이스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커헉!”
레이스는 피를 토해내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곳에는 금발의 전직 성녀, 아벨슨 마리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쐐애애액-!
짧은 순간.
아벨슨은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레이스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히 보인다.
치이익…!
메이스를 양손으로 쥐고는 힘차게 두 다리를 벌렸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의 무게 중심은 6 대 4.
왼쪽 팔꿈치는 빠르게 스윙이 나갈 수 있도록 높게 들어준다.
턱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시선은 날아오는 자신의 동생, 레이스를 바라봤다.
화아아아-!
메이스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방대한 신성력에 메이스가 부서질 것처럼 떨렸다.
“아, 안… 돼에…!”
당황하는 레이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안 돼!’ -라고 소리치는 그의 입 모양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아벨슨은 입가에 말라붙은 눈물을 핥으며 웃었다.
“돼.”
이내 레이스가 눈앞에 당도하고.
아벨슨이 전력으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
메이스가 정확히 정수리를 가격하며 굉음이 일었다.
동시에 레이스의 육체가 분쇄되기 시작했다.
마치 내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육체가 수천 조각으로 나뉘며 피가 허공에 비산했다.
너무 잘게 쪼개진 탓에 순간적으로 피로 만들어진 안개가 생겨났다.
“…”
왕궁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왕자의 충격적인 죽음에 모두가 입을 닫고 피 안개를 바라봤다.
오직 최현석의 박수 소리만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나이스 스윙.”
손뼉을 치던 최현석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보보 위에 올라탔다.
“좋아… 이제 일도 다 봤겠다.”
최현석이 냅다 보보의 엉덩이를 때렸다.
“튀어!”
***
일행은 왕궁을 벗어나 곧장 수도 밖으로 향했다.
대로에서 보보를 마주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꺄아아악-!”
“으아아! 도망쳐!”
“마수, 마수가 나타났다!”“예예. 우리 마수는 안 물어요. 다들 안심하고 비키세요.”
수도의 기사단과 수비대가 일행을 쫓았지만, 보보의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무리였다.
게다가 레이스가 죽으며 생긴 혼란으로 인해 체계적인 추격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일행은 비교적 손쉽게 수도 스콜본을 벗어날 수 있었다.
“흐음…”
수도 밖으로 나오고.
평원을 가로지르며 최현석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상해.”
어깨에 앉아있던 라헬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뭐가 이상해요?”
“너무 쉽잖아. 신성 제국이 얽혀있는 게 분명한데, 이렇게 보내주는 게 말이 돼?”“그만큼 우리가 대단한 거죠!”“그런가… 아까 검은 천으로 둘둘 두른 놈들도 갑자기 사라졌고.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데…”
검은 후드에 복면을 쓴 적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사실이 내심 마음에 걸린다고 생각하던 그때.
최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너무 쉽다 했어.”
사방에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용사님! 숫자가 장난 아니에요!”
“나도 알아!”
얼추 느껴지는 마력이 수백이다.
심지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상당한 수준의 강자였다.
마왕군으로 치면 대대장에서 연대장 정도.
쉽게 만나기 힘든 강자가 떼거리로 모여 포위망을 펼치고 있었다.
“보보! 저쪽 방향으로!”
최현석이 마력을 쏘아 보보를 인도했다.
최대한 포위망이 얇은 방향으로 움직여 단번에 돌파할 생각이었다.
‘절대 싸워서 이길 수준이 아니야. 어떻게든 추격을 뿌리친다.’
일행이 이동함에 따라 적은 실시간으로 움직이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쉽지 않겠는데…’
최현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점차 포위망에 가까워짐에 따라 마법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콰앙! 쾅!
주위에서 마법이 폭발하며 땅이 흔들리고, 시야가 가려졌다.
“용사님! 마법이 너무 많이 날아와요!”“마력 가져가도 되니까 어떻게든 막아!”“방어는 저한테 맡기세요!”
아벨슨이 신성 마법으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러자 일행에게 날아오던 마법이 보호막에 부딪혀 소멸했다.
“보보! 저쪽으로!”
“크왕!”
앞을 가로막는 적은 보보가 발을 휘둘러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거의 다 뚫었어! 조금만 더…!”
마침내 포위망의 끝에 다다르던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연달아 4개의 기둥이 떨어지고, 각 기둥이 연결되며 거대한 결계가 만들어졌다.
“이런 썅…”
최현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대로 걸렸다.’
포위망을 돌파하고 있다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일행은 오히려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적은 일부러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노출시켜 이곳으로 향하게끔 만든 것이다.
“하늘도 막혔어.”
마력 결계는 단순히 지상만 막은 게 아닌, 하늘까지 뒤덮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공중을 날아간다 해도 무리였다.
“용사님 어떡해요?”
“기다려 봐.”
보보의 등에서 내려온 최현석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결계를 부술 생각이었다.
레이드런식 격투술
제1형 – 초전박살(初戰搏殺)
주먹에서 마기의 폭풍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결계가 흔들린다.
하지만, 요란한 소음에 비해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결계에 약간의 금이 생긴 게 전부.
그마저도 순식간에 원래대로 복구됐다.
“포기해라. 너희 수준에서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자취를 감췄던 복면인들과 함께, 남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드디어 잡았다. 최현석.”
교황의 명으로 최현석을 추격하던 사냥개 키아란.
그가 마침내 최현석과 대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