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79)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79화(179/273)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박현아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뚝뚝 흘러내린다.
동시에 그녀의 몸 안에서 마력이 용솟음쳤다.
언제라도 마법을 날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손님이다. 도시를 지켜달라는 의뢰를 받았지.”
사라 던피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이었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사실을 말한 것뿐이다만.”
박현아의 기세가 점차 흉포해진다.
보통 사람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앉을 만큼 사나운 기세였다.
그때 시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둘 사이를 막았다.
“용사님. 진정하시지요. 이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뭐?”
“여기 계신 사라 던피 님은 영주님께서 초대한 손님이십니다.”
박현아가 미간을 좁히며 시종을 노려봤다.
“밀프턴 영주님이 저 여자를 불렀다고?”“예. 혹여나 용사님께서 언데드 군단을 패퇴시키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도시의 방비를 맡기셨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언데드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언데드를 부른다.
영주는 아마 사라 던피의 정체가 언데드란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저 구릿빛 피부에 화려한 보석을 두른, 이국적인 외모의 미녀일 뿐이었으니까.
내부의 마기도 그녀의 실력을 생각하면 철저히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오해가 풀렸는가?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 박현아여.”“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
박현아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마법사답지 않게 냉철하지 않구나. 하긴, 그 폭력성이 그대의 정체성이자 매력이었지.”
사라 던피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간 영주의 땅이다. 이런 장소에서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쳇…”
박현아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다.
이곳에서는 싸울 수 없다는 걸.
사라 던피와 박현아가 부딪히는 순간 밀프턴 영지에 대재앙이 들이닥칠 것이다.
전투의 여파는 영지 전체에 영향을 끼칠지도 몰랐다.
마법사의 싸움은 특히나 그렇다.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 애초에 싸울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았겠지.’
사라 던피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행을 불러 세웠다.
기습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건 대화가 목적인 것 같았다.
박현아는 일단 사라 던피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뭐? 대화라도 하자고? 딱히 그럴 기분은 아닌데.”“오늘은 그대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라 던피가 손을 들어 뒤쪽에 있던 최현석을 가리켰다.
“내가 볼일이 있는 것은 그쪽에 있는 전사다.”
모두의 시선이 최현석에게 모였다.
최현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그렇다.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전사여. 잠시 나에게 시간을 내주겠는가?”
“으음…”
최현석이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무턱대고 받아들이자니 어떤 위험이 기다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굳이 자신을 지목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언젠가 다시 싸워야 할지 모르는 강적, 사라 던피의 정보를 캐낼 기회였다.
“그대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안다.”
사라 던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가슴에 올렸다.
“나, 사라 던피의 이름을 걸고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고작 약속 같은 걸로…”“이래 봬도 일국의 왕으로서 수많은 백성을 이끌었던 몸이다. 이 말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아.”
사라 던피가 웃음기를 지우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를 지켜보던 박현아가 최현석의 어깨를 툭 쳤다.
“다녀와.”
“그래도 됩니까?”
“이 세계에는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병신들이 많거든.”
그녀가 사라 던피를 흘겨보고는 말을 이었다.
“딱 봐도 어떤 부류인지 사이즈 나와. 내뱉은 말은 지킬 거야.”
“알겠습니다.”
“간 김에 이것저것 알아 와.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이죠.”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 던피에게 다가갔다.
사라 던피는 다시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잠시 걷도록 할까? 오늘 이곳에 있으면서 느낀 것이다만, 정원이 참으로 아름답더구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품, 분위기에 압도된 최현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
최현석과 사라 던피는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한 최현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용건이 뭡니까?”
순간 ‘용건이 뭐야’라고 말하려던 최현석은 말을 높였다.
적에게는 항상 반말을 일관해왔던 그이지만, 사라 던피는 알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겨와 쉬이 대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그대를 보고 참 감명받았다. 강자에게도 움츠리지 않고 맞서 싸우는 기개와 투지. 강인한 정신력까지. 전사의 덕목을 두루 갖췄더구나.”“칭찬해도 딱히 나올 건 없습니다.”
최현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라 던피도 마주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대의 환심을 사려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말했을 뿐.”
대화하는 사이 석양이 완전히 저물었다.
어느새 노을빛도 사라져 하늘에 푸른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에 맞춰 정원의 마법등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노을에 물든 정원도 좋았지만, 조명에 비치는 밤의 정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말 감명받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사라 던피가 멈춰 서더니 돌아봤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 안에 최현석의 얼굴이 담겼다.
“잠깐이지만 나는 보았다. 그대가 신비한 힘을 다루는 것을.”
“신비한 힘?”
“그동안 이 시대를 나름대로 조사했다. 마력과 마기, 신성력이 공존하는 시대. 하지만 그대가 다뤘던 힘은 또 다르더구나.”
“…”
“그대가 사용한 그 보랏빛 기운. 그 우아하고도 강대한 힘은 순식간에 나를 매료시켰다.”
그제야 사라 던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노빌레이스를 봤구나.’
마력과 마기를 합쳐서 사용하는 투기 노빌레이스.
그것을 사용할 때는 보라색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아마 그 모습을 사라 던피가 본 것 같았다.
“이런 힘이었지?”
그때 사라 던피의 손끝에서 보라색 기운이 방출됐다.
최현석의 눈을 부릅떠지고, 저도 모르게 소리친다.
“어떻게!?”
마력과 마기가 합쳐진 보라색 기운.
최현석이 농담으로 원마력이라 이름 붙였던 이 힘은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누구도 다를 수 없다.
애초에 마력과 마기를 동시에 지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제조건부터가 최현석 말고는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일.
다음 단계인 두 합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겁니까? 설마 언데드는 마력과 마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겁니까?”“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사라 던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녀의 손끝에 있던 보라색 기운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최현석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마력과 마기를 합쳐야 쓰는 힘이지 않습니까!?”“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 힘은 그런 게 아니다만?”
“예…?”
사라 던피와 최현석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사라 던피였다.
“이건 마력과 마기를 합친 기운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상위의 기원. 원류에 가까운 힘이지.”“그게 무슨 말입니까?”“설마… 그대는 몰랐던 건가?”
최현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마력과 마기를 합치면서 나타난 힘이었으니까.
다른 경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성질을 지닌 두 가지 힘을 강제로 한데 모으다 보니 자연스레 그 기원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된 거였나.”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린 사라 던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어. 참으로 대단한 운과 재능이구나.”“잠시. 이야기를 따라가기 너무 벅찬데, 설명 좀 해주시죠.”
사라 던피의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최현석의 머릿속에서는 온통 보라색 기운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행히도 사라 던피는 그것에 대해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의 기원이 되는 힘이다. 나도 그대 덕분에 알게 된 것이지.”
“기원이라면…?”
“마력, 마기, 신성력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힘. 아주 순수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최현석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마력, 마기, 신성력이 모두 이 보라색 기운에서 시작됐다. 이겁니까?”
“그렇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방금 내가 그 보라색 기운을 다룬 게 근거다. 그대의 말대로 마력과 마기가 합쳐진 기운이라면, 나는 사용할 수 없어야 정상이지 않은가?”
현재 사라 던피에게서는 마기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최현석이 추측했던 대로 보라색 기운이 마력과 마기가 합쳐진 힘이라면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현재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뿐.
사라 던피의 말대로 보라색 힘이 모든 것의 원류라는 것.
그렇다면 그녀가 보라색 기운을 다루는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마기의 성질을 버리고 그 원류가 되는 힘을 끌어낸 것이었으니까.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지만, 내 생각은 이렇지.”
사라 던피가 말을 이었다.
“마력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고, 마기는 마족과 조화를 이룬다. 다만, 신성력은 조금 궤가 다른데, 마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성질을 변화시킨 것으로 보인다.”“어쨌든 시작은 모두 이 보라색 기운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그 힘을 다루게 된 겁니까? 저는 단지 마력과 마기를 합치려 했을 뿐인데.”
최현석의 의문은 합당했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저 두 힘을 하나로 모으려 했을 뿐이다.
그 결과였던 보라색 기운은 당연히 새로운 성질을 지닌 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다니.
“답은 간단하다.”
사라 던피는 딱히 어려운 것 없다는 듯 막힘없이 말했다.
“성질이 달라져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힘은 결국 자신의 성질을 모두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나가 됐다. 이런 거겠지.”“그것도 가설입니까?”“그렇다만, 나는 확신하고 있다.”
“흐음…”
최현석이 신음했다.
이 충격적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마냥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어.’
지금까지 사라 던피가 했던 말 중 모순되는 점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녀가 직접 보라색 기운을 다루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고 있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그때 사라 던피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최현석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최현석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런 중요한 때에… 설마 미인계인가!?’
사라 던피의 정체가 어떻든, 현재 그녀는 매력적인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피부의 질감,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감촉까지 모두 인간의 그것과 같다.
최현석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정신 차려라 최현석! 상대는 뼈다귀! 리치다!’
최현석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부여잡으며 물러났다.
“크흠, 흠! 떨어지시죠.”“아, 실례했군. 어떻게 그런 기운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사라 던피가 미소 지으며 한걸음 물러났다.
“아무튼, 그대에게 짙은 호기심이 생겼다. 두 가지 힘을 담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원류가 되는 이 보라색 기운을 다룰 수 있는 육체.”
“…”
“아쉽게도 나는 가질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인간이 아니라 언데드가 되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만, 아니야.”
최현석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에 야릇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단지 그대가 특별한 것이었을 뿐.”
최현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스킨십 이후 저렇게 열정적인 눈빛을 보내니 심장이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주장을 펼쳤다.
‘구, 굳이 금발의 귀족
영애가 아니라도 괜찮을지도…’
이상형과 어느 하나 일치하는 부분이 없는 사라 던피였으나, 아무렴 어떤가.
상대는 이국적인 미녀 국왕이다.
최현석의 망상이 끝도 없이 뻗어가던 그때.
“그래서 말이다만…”
사라 던피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대와 함께하고 싶군.”“예…? 바, 바, 방금 뭐라고…?”
당황한 최현석이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사라 던피는 그 반응이 재미있는 듯 작게 웃었다.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했다.”
“…”
이세계에 온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최현석은 처음으로 이 지옥 같은 세계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껴졌다.
“저…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쇼. 의도는 없고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무엇이든 말해보아라. 내 성심성의껏 대답해줄 터니.”
최현석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언데드도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