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86)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86화(186/273)
박현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올라벤 그리미어…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익숙한 이름이다.
직접 마주친 건 처음이지만, 확실히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 간부 중 하나가 답을 알려주었다.
“연합군의 사령관 중 하나입니다.”“연합군 사령관? 사령관 올라벤 그리미어… 설마!?”
무언가를 떠오른 듯 박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시발, 어쩐지 피비린내가 난다 했더니. 용사 학살자였어?”
오래전부터 용사들 사이에서 괴담처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다.
연합군 세력 중 용사를 죽이는 자가 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현아는 거짓으로 치부했었다.
알아서 마왕군과 싸워주는 용사를 죽이다니.
그런 멍청한 짓을 구태여 벌일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온 지 3년이 조금 넘은 시점의 어느 날.
그녀는 용사 학살자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후.
그녀는 자신을 습격한 자들이 용사 학살자라 불린다는 것을 직감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들의 배후에 드라센 제국의 올라벤 그리미어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 이거 재미있네.”
불쾌한 과거의 기억에 박현아의 눈이 사납게 떠졌다.
“누추한 곳에 연합군의 사령관씩이나 되는 양반이 무슨 일이지?”“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오. 나는 대화를 하러 온 것이니. 이렇게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찾아왔지 않소?”
올라벤 그리미어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태연하게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박현아가 코웃음을 쳤다.
“딱 봐도 본체는 다른 곳에 있구만 당당한 척은.”“호오! 이걸 한눈에 꿰뚫어 본 건 그대가 처음이군. 홀로 가트렌과 싸운 신의 대적자라는 이명이 마냥 허상은 아니었던 모양이오.”“잡소리 치우고 본론이나 말해. 당신 때문에 당장 여길 떠야 하니까.”
울티문 페스의 위치가 들킨 이상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나 신성 제국 가트렌은 항상 이들을 추적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주의가 필요했다.
눈앞의 올라벤 그리미어는 드라센 제국 소속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굳이 조직의 거처를 옮길 할 필요는 없소. 내가 신성 제국에게 정보를 흘릴 일은 없을 테니.”“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
올라벤은 비어 있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먼저 몇 가지 오해를 정정해야겠군.”
그가 천천히 회의장을 둘러봤다.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기이함을 담고 있었다.
“먼저, 나는 더 이상 연합군의 사령관이 아니오. 연합군의 역할은 이제 성전의 군대가 대신하고 있소.”
연합군은 사실상 해체됐다.
대부분 국가가 성전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군대 또한 데우시스 교의 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연합군은 본래 규모의 4분의 1이 채 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다.
“둘째. 내가 용사 학살자인 것은 맞으나, 그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소.”
“무슨 이유?”
“가트렌의 용사 육성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서요.”
순간 박현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랄하고 있네. 용사 학살자 이야기가 나온 게 언제부터인지는 알고 있나? 십 년도 넘어.”“정확히는 16년 전이오.”“아주 잘 알고 계시네.”“애초에 용사를 죽이자는 계획을 세운 게 바로 나였소.”
올라벤 그리미어는 당연하다는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가트렌의 용사 육성 프로젝트가 수면 밖으로 드러난 지 이제 고작 5년이 넘었어. 그런데 16년 전부터 용사를 죽인 놈 말을 믿으라고?”“허허, 이건 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게요.”
올라벤 그리미어가 입꼬리를 올렸다.
“드라센 제국은 이미 20년 전부터 용사 육성에 관해 알아채고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소이다.”
“뭐…?”
박현아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라벤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산더미처럼 쌓인 증거물을 보여드릴 수도 있소. 나와 같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
“아무튼, 용사를 처치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어차피 가트렌에 세뇌돼 적이 될 게 뻔한데 어찌 살려둘 수 있겠소?”
올라벤의 표정과 몸짓, 말투에서는 전혀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연기의 달인일 수도 있었으나, 그럴 가능성은 작다.
애초에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박현아의 눈치를 봐서 믿지도 않을 거짓을 말한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올라벤 그리미어가 아닌 다른 자를 보내는 게 나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올라벤 그리미어가 좌중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제국은 울티문 페스의 존재 또한 알고 있었소. 이곳의 위치 또한 마찬가지요.”
“…”
“다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군.”
올라벨이 설리번을 바라봤다.
“그대가 아마 참모 역할을 하는 설리번이겠지.”
“그걸 어떻게…”
“울티문 페스가 이 장소로 거처를 옮긴 건 3년 전이지 않소?”
“…”
설리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모두의 시선이 수장 케어베 코웰에게 모일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새어 나갔다면, 같은 드라센 제국 출신인 케어베 코웰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기 있는 코웰 경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오. 코웰 경은 이미 백 년 전에 제국의 품을 떠난 분이지 않소?”
“…”
“모든 건 제국에서 독자적인 정보망을 통해 알아낸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라겠소.”“시발, 끄나풀이 있었네.”
박현아가 미간을 좁히며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대들의 자유에 맡기겠소.”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올라벤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으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겠소.”
“…”
대답은 없었다.
침묵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올라벤이 말을 이었다.
“울티문 페스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하오.”
“그게 무엇인가?”
케어베 코웰이 대표로 물었다.
올라벤은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 성전을 막아줬으면 하오.”
성전을 막아달라.
예상치 못한 말에 간부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성전을 막아달라니…”“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마왕을 지켜달라는 건가?”“다들 조용.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지.”
케어베 코웰이 상황을 정리하자 올라벤이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에 관해 말해야겠군.”“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드라센 제국. 도미스 왕국, 아그로스 왕국, 펜텐 왕국, 오드리아 연합.”
올라벤이 다섯 국가의 이름을 차례대로 말했다.
“모두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이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강대국들이군요. 어떤 식으로든 대륙 정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만한.”
설리번의 대답에 올라벤이 감탄했다.
“역시 참모로군! 정답이오. 이들 다섯 국가는 모두가 강한 국력을 지녔소.”
드라센은 대륙의 단 둘뿐인 제국이다.
국력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일.
도미스 왕국은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강한 기사의 나라였다.
아그로스 왕국은 대륙 제일의 해군을 지녔다.
펜텐 왕국은 방대한 광물 매장량과 뛰어난 대장 기술로 유명했다.
어떤 전쟁이든 펜텐의 무기와 갑옷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
오드리아 도시 국가 연합은 상인의 나라로, 대륙의 경제를 움직인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상단 열 개중 일곱 개가 오드리아 연합 소속일 정도로 그들의 경제력은 남달랐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점은 단지 국력이 강한 것뿐만이 아니오.”“전부 광신도 놈들이 세력을 뻗지 못한 국가들이야.”
박현아의 말에 올라벤이 손뼉을 쳤다.
“그것도 정답이오! 다섯 국가 모두 데우시스 교가 성행하지 않는 국가들이지.”“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아직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남았소.”“이봐. 스무고개 하러 온 게 아니라면 그냥 말해. 슬슬 짜증 나려 하니까.”
박현아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올라벤은 곤란하다는 듯 손을 내밀며 웃었다.
“하하, 알겠소. 그대가 기운을 뿜어내면 소름이 돋아서 제대로 말을 하기 힘드니 자제해 줬으면 하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모습이라 설득력이 없었다.
어쨌든 드디어 본론을 꺼낼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올라벤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거짓이었던 듯 분위기가 한순간에 180도로 변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실 거요. 우리 인간과 마왕의 밀약으로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인간과 마왕의 밀약.
딱히 새삼스러울 게 없는 주제였다.
고위 귀족이나 왕족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때 올라벤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이들 다섯 국가가 바로 밀약의 주체들이오. 정확히는 가트렌까지 여섯 국가라고 해야겠군.”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왕과의 밀약.
다들 그런 게 있겠거니 추측만 했을 뿐이지,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느 국가가 관계돼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인지.
자세한 내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올라벤이 처음으로 밀약의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여섯 국가의 수장과 마왕은 밀약을 체결했소. 영원히 이 전쟁이 끝나지 않도록 말이오.”“그런데 가트렌이 뒤통수를 쳤다?”“그렇소. 가트렌은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성전을 일으켰소. 사실상 밀약을 깨뜨린 것이지.”
올라벤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 국가는 여전히 협정이 이어지길 원하고 있소. 마왕은 아직 죽어선 안 되오. 그가 죽는 순간 대륙은 더 큰 전란에 빠질 게 분명하니.”
올라벤의 말에 박현아가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네. 누구보다 전쟁에 미쳐있기로 유명한 드라센 제국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주 설득력이 넘쳐.”“하하하! 그건 옛말이오. 선조께는 송구하지만, 우리 드라센 제국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소.”
“이유는?”
박현아의 물음에 올라벤 그리미어가 히죽 웃었다.
“이미 모든 걸 가졌기 때문이오.”
그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 강력한 군대. 온갖 진귀한 재화가 모두 드라센 제국의 것이오. 거기에 마족이라는 외부의 적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제국 내부는 안정된 상황.”
“…”
“이미 평화를 맛본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소. 이건 황제 폐하의 뜻이기도 하오.”
올라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대륙의 단 둘뿐인 제국, 드라센과 가트렌.
둘 중 어느 국가가 대륙 최고냐 물으면, 대부분은 신성 제국 가트렌이 아닌 드라센 제국을 꼽는다.
가트렌의 저력은 데우시스 교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국가의 경쟁력만 놓고 드라센이 가트렌보다 한 수 위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상황은 이해했어. 지금 이 거짓된 평화가 마음에 드니 계속 이어가고 싶단 거잖아?”
“그렇소.”
“그러면 직접 나서면 되겠네. 마왕을 살리든 죽이든 그쪽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해.”
박현아의 말에 올라벤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움직일 수 없소. 그것이야말로 가트렌이 가장 바라는 일일 테니.”
“어째서지?”
“명분이 가트렌에 있기 때문이요. 성전을 막는 순간 우리는 대륙의 공적이 될 테고, 그때부터 성전의 광신도는 마왕이 아닌 우리의 목을 치기 위해 달려오겠지.”
“…”
“아마 가트렌은 우리가 나서서 성전을 막아주길 신께 기도하고 있을게요.”
“흐음…”
올라벤의 말에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 쐐기를 박듯 올라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성전이 성공하면 더는 가트렌을 막을 수 없소이다.”
무려 500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의 종식.
대륙 모두가 원하는 꿈을 이뤄낸 가트렌과 데우시스 교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최악의 경우 성전에 참여한 국가들이 가트렌의 속국이 될 수도 있소. 아니, 가트렌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렇게 만들 것이오.”
성전을 성공한 가트렌은 그 위세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사령술로 이미 위태롭던 국가들을 시작으로, 성전에 참여한 군소 왕국들을 돕는 척하며 차례차례 발아래에 둘 게 뻔했다.
“그러면 아슬하게 이뤄지던 대륙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고…”
가트렌의 덩치가 커지면 대륙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군소 왕국 연합.
드라센 제국.
가트렌 제국.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던 상황에서 한쪽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다음은 뻔하다.
“그 순간 가트렌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할 것이오.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가리는 진짜 전쟁을.”
올라벤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내 장담하건대 그건 여태껏 치러왔던 그 어떤 전쟁보다 치열하고 잔혹할 것이오.”
“…”
“마족과의 다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오.”
마족이 있으므로 유지해 왔던 거짓된 평화와 거짓된 전쟁.
성전은 이 모든 것을 종식하고 진짜 전쟁이 시작됨을 알리는 전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