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8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87화(187/273)
최현석과 박현아는 회의장 밖으로 나왔다.
가볍게 산책을 하며 머릿속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누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최현석의 물음에 박현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별수 있어? 아무리 드라센이 마음에 안 들어도, 할 건 해야지.”
사실 선택권이 없는 문제다.
올라벤 그리미어는 단지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명확하게 했을 뿐.
그가 말한 내용은 이미 울티문 페스에서도 걱정하던 것이다.
애초에 오늘 모인 이유가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기도 하고.
“그나저나 드라센 제국도 엄청나네요. 저는 신성 제국 놈들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은 최현석에게도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인류는 신성 제국 가트렌을 제외하면 별다른 힘을 지닌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마족
이전에 대륙에서 가장 악명을 떨치던 건 드라센 제국이었다네.”
그때 울티문 페스의 수장인 케어베 코웰이 나타났다.
그는 자연스레 최현석과 박현아 사이로 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가트렌은 체면치레를 중시하지.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답게 겉으로는 순한 양인 척 연기하네.”“드라센 제국은 다릅니까?”“다르고말고. 내 모국인 드라센은 노골적으로 약자를 짓밟고, 그 힘을 과시했어. 공포야말로 드라센의 가장 큰 무기였지.”
말을 하는 케어베 코웰의 눈은 먼 과거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전장의 광기에 몸을 맡겼던 그 시절.
케어베 코웰 또한 드라센 제국의 악명을 드높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였다.
“… 그리고 드라센은 대륙 제일의 정보력으로 유명하네.”
“정보력?”
“어느 국가든 정보조직을 운영하지만, 드라센은 늘 몇 수나 앞서 있었어. 오늘 보니 여전히 실력이 녹슬지 않은 것 같구먼. 허허…”
누구도 몰랐던 울티문 페스의 위치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대륙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모아 큰 흐름을 꿰뚫었다.
이것만 봐도 드라센 제국의 정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네 이름이 최현석이라고 했나?”
“예.”
“어떡할 생각인가.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제안’이라 함은 올라벤 그리미어의 것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최현석과 아벨슨을 보며 말했다.
“둘에게는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소.”
뒤이어지는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마리어트 왕국의 왕권을 되찾아 주시오.”
아벨슨 마리어트가 마리어트 왕국의 국왕이 되어달라는 것.
“현재 마리어트 왕국은 가트렌의 꼭두각시가 됐소이다.”
현재 마리어트 왕국은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국왕과 왕비를 비롯해 두 왕자까지.
왕족
모두가 한순간에 죽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가트렌은 허수아비 왕을 앉혀 놓고, 도움을 명분으로 마리어트 왕국을 마음껏 주무르는 중이었다.
“성전이 성공하면 마리어트 왕국 또한 자연스레 가트렌의 속국이 될 것이오. 그전에 왕권을 되찾고 가트렌의 마수를 떨쳐내야 하오.”
이야기를 들은 아벨슨 마리어트의 표정은 어두웠다.
모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혼란스럽고 괴로운 듯했다.
“자네들은 울티문 페스 소속이 아니야. 도와준다면 고맙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네.”
케어베 코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의 선택에 맡기도록 하지.”
“하겠습니다.”
최현석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는 처음부터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아벨슨 씨도 분명 그러고 싶을 거야.’
태어나고 자란 모국이 멸망하게 생겼는데 어찌 걱정되지 않을까.
심지어 모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뿐이라면?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모국을 구하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만약 아벨슨 씨가 국왕이 되면… 나는 국왕의 남편이 되는 건가? 아니지. 내가 왕이 되나? 아무튼, 그렇게 되면 대저택 같은 건 필요 없어. 바로 왕궁이 펼쳐진다…’
더불어 이 일은 최현석의 망상을 충족시키기에도 아주 좋은 일이었다.
“이번 일은 저와 아벨슨 씨만 가겠습니다. 누님은 성전을 막기 위해 다른 분들을 도와주시죠.”
최현석의 말에 박현아가 미간을 좁혔다.
“뭔 깡이냐. 거기에 신성 제국 놈들이 얼마나 진을 치고 있을 줄 알고.”“우리한테는 아주 강력한 지원군이 있지 않습니까?”“지원군? 설마 너…”
박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는 언데드야. 도와준다고 어떻게 장담할 건데?”
최현석은 사라 던피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인 게 분명했다.
박현아는 딱히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언데드를 데리고 이런 민감한 일을 진행하다니.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잘 설득해서 데리고 다니면 어떻게 되지 않겠습니까?”“어휴. 네가 내 말을 들어 처먹겠냐. 그래. 꼴리는 대로 해라.”
***
최현석은 말을 잘 듣는다.
박현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했으니 곧장 실행에 옮겼다.
“우리는 지금부터 마리어트 왕국을 구합니다!”
우선 아벨슨에게 일을 수락했음을 통보하고.
곧바로 이네모시트로 달려가 사라 던피에게 제안했다.
“저랑 같이 왕국을 구하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그거 재미있겠구나.”
사라 던피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뭔가 일이 척척 진행되는 느낌이 들어 묘하게 뿌듯했다.
“이제부터 어떡하실 생각인가요?”
아벨슨의 물음에 최현석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왕궁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요?”
“윗대가리를 싹 날리고 아벨슨 씨가 국왕이 되는 거죠.”
“끝…?”
아벨슨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최현석은 어째서 이런 계획이 나온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지금 아벨슨 씨는 왕국의 유일한 정통 왕위 계승자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더 고민할 게 있습니까. 가서 쓸어버리고 내가 왕이 된다! 선언하면 그만이지.”
아벨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왕위 계승이란 건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애초에 저는 반역자로 낙인찍힌 상황이고요.”“으음, 그렇습니까?”
그때 옆에 있던 라헬이 끼어들었다.
“당연하죠! 용사님. 여기가 무슨 마왕군인 줄 알아요? 윗대가리를 싹 날리고 왕에 앉는다니. 사고방식이 너무 야만적이네요!”
“…”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벨슨과 라헬의 말이 맞았다.
‘너무 마왕군에 물들었나.’
힘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이 세계.
그 안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성향이 짙은 집단에서 지낸 영향일까.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애초에 왕정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모르는 탓도 컸고.
“이들의 말이 맞다. 이런 일일수록 명분이 중요한 법이지.”“높은 사람들은 항상 명분을 중요시하네요.”
회의장의 올라벤 그리미어 공작.
이곳의 사라 던피.
모두가 명분을 찾는다.
최현석은 그 명분이라는 게 왜 그리 중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대의명분 없이는 큰 일을 할 수 없다. 이건 인간의 본질과도 관계가 깊지.”
“으음…”
“아무튼, 여기 신성력을 쓰는 처자가 왕녀였다니 흥미롭구나. 지금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고?”
아벨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그대의 왕국을 찾아가서 어떤 상황인지 보는 게 먼저겠구나. 정당한 계승자라는 걸 이용해 평화적으로 왕권을 가져올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
“그게 안 되면?”
“그러면 힘으로라도 뺏어야겠지.”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다니.
최현석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대의가 어쩌고 명분이 어쩌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대의명분이 중요한 건 맞으나,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딱히 필요 없는 것도 사실이다.”“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네요.”
최현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사라 던피가 씨익 웃었다.
“원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런 법이느니라.”
인간사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응할 뿐.
그것이 반 천년을 살아온 사라 던피의 소신이었다.
***
라브룬 마리어트.
마리어트 왕국의 전대 국왕인 ‘발테어 마리어트’의 여동생, ‘리오사 마리어트’의 아들이다.
즉, 아벨슨 마리어트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폐하. 다음 안건은….”“그만. 오늘은 쉬고 싶군.”
정기 보고가 시작된 지 이제 겨우 5분이 흐른 상황.
라브룬 마리어트는 대놓고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런 복잡한 문제는 모두 전문가에게 맡기라고.”“하오나 폐하의 승인이 있어야….”“쯧! 그것도 경에게 맡긴다고 말했지 않은가? 도대체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만족할 텐가!?”
“죄송합니다…”
보고를 하던 맥스윈 고든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라브룬 마리어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맥스윈 고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게. 국왕이 사사건건 잡무에 관여하면 아랫사람들이 일하기 힘든 법이오.”“송구합니다. 제가 폐하의 혜안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그럼 또 남은 업무가 있는가?”“오늘은 이걸로 끝입니다.”
업무가 끝났다는 말에 라브룬 마리어트가 씨익 웃었다.
“그럼 축배를 들어야겠군.”
축배란 수도의 미녀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잠자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라브룬이 국왕이 된 이래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여는 행사였다.
“그 소식 들었나? 국왕 폐하의 간택을 받으면 금은보화가 잔뜩 떨어진다더군!”“우리 딸도 한 미모 하는데… 어떻게 수도로 보내야 하나?”
이미 나라 전체에 소문이 파다했다.
수도에서 국왕과 잠자리를 가지면 평생 먹고살 돈을 받는다.
이런 소문 덕에 전국에서 미모가 뛰어나다 싶은 처자가 모조리 수도 스콜본으로 몰려들었다.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군.’
국왕 일가가 하룻밤에 죽은 이후.
마리어트 왕국은 매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새롭게 앉혀진 국왕은 멍청했으며, 신성 제국 가트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그로 인해 국가의 모든 재산이 알게 모르게 가트렌으로 흘러간다.
현재 수도에 미녀들이 몰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세금이 오르고, 모든 부가 가트렌으로 흘러가니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일.
그들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고자 국왕과 잠자리를 가지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린 배를 부여잡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대로라면 반란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저마다 마리어트의 피가 섞인 자를 내세워 다음 국왕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현 국왕인 라브룬 마리어트를 암살하기 위해 온 암살자가 이번 주에만 무려 셋이다.
저 멍청이는 일말의 경각심조차 가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암살? 걱정 마시오! 우리에게는 신성 제국 가트렌이 있으니!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데 그깟 암살에 당할 리가 없지 않소?”
맥스윈 고든은 이런 상황이 답답했으나, 별수 없다.
지금 마리어트 왕국은 데우시스 교가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기에.
가장 강한 권력을 쥔 귀족이라 해도, 데우시스 교의 후광 앞에서는 한낱 발가벗은 인간일 뿐이었다.
“그럼 고든 경. 나는 이만….”
국왕 라브룬 마리어트가 자리를 뜨려 하던 그때.
시종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폐하! 빈센조 추기경께서 오셨습니다!”
“추기경이?”
“예! 지금 당장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원래 국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며칠 전부터 방문을 알리고 허락을 기다려야 함이 옳았으나.
“오랜만입니다. 폐하.”
빈센조 추기경은 그런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알현실에 들이닥쳤다.
심지어 완전 무장한 데우시스 교의 성기사들까지 대동한 채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무례를 범한 점. 용서해주시길.”“하하! 추기경이라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소.”
라브룬 마리어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오?”“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변을 물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라브룬 마리어트가 주변을 지키던 호위와 시종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빈센조 추기경과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다들 나가 있거라.”“폐하. 호위를 물리는 것은 재고해 보심이…”
맥스윈 고든이 왕실 기사만은 남겨두라 간청했으나, 라브룬이 고개를 저었다.
“추기경이 내게 해코지라도 한단 말인가? 괜한 걱정 말고 가보시오.”“명을 받듭니다…”
잠시 후.
시종과 왕실 기사까지 모두 알현실을 나섰다.
하지만, 가트렌의 성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왕의 알현실에 데우시스 교의 사제와 무장한 성기사가 남은 것이다.
명백히 잘못된 상황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자, 이제 이야기 해봅시다. 추기경께서 어쩐 일로 발걸음을 하셨소?”
라브룬 마리어트가 왕좌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빈센조 추기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움직여 라브룬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건방진 놈…! 감히 신의 사자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다니.”
빈센조 추기경의 얼굴은 이전과 달리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제야 라브룬이 고개를 숙이며 벌벌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에 머리를 박는 라브룬.
빈센조 추기경은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 자연스럽게 왕좌에 앉았다.
“라브룬 마리어트. 네놈이 알량한 국왕 자리를 유지하는 게 누구 덕인지를 잊지 마라.”
빈센조 추기경이 라브룬의 머리 위에 발을 얹었다.
“너는 가트렌의 개다. 짖으라면 짖고, 구르라면 구르는 게 네 역할이란 말이다.”
라브룬을 구속한 성기사들이 더욱 우악스럽게 짓누른다.
라브룬은 고통을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내가 말했을 텐데. 네놈이 환장하는 계집이나 술은 원 없이 줄 테니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예! 저는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아무것도….”“그런데 이건 뭐지?”
빈센조 추기경이 종이 한 장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보는 라브룬 마리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팔레인 영지의 세금을 낮추고 국고를 풀어 영지의 난민을 구휼한다는 왕의 명령서다.”
“…”
“말해 봐라. 누가 이런 짓을 벌여도 된다 했지?”“저는 결백합니다! 결단코 이런…”
그 순간 라브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고든! 맥스윈 고든입니다! 그자가 한 짓이 분명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신하를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