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89)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89화(189/273)
맥스윈 고든은 현재 마리어트 왕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했다.
“…해서 지금의 왕국은 절벽 끝에 내몰린 상황입니다.”
약 10분가량의 설명이 끝나고.
“…”
아벨슨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떠난 이후 왕국의 실정을 처음 들은 상황.
왕국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망가져 있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왕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때 자신이 마리어트 왕국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다못해 레이스를 죽이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비록 가족을 죽인 패륜아긴 하지만, 그의 능력은 뛰어나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레이스 마리어트의 머리를 깨부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왕국은 무사할 수 있었지 않을까.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괜찮으십니까?”
최현석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아벨슨을 바라봤다.
“아벨슨 씨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전부 신성 제국 놈들이 문제죠.”
“네…”
“심란할 거 없어요. 우리는 그냥 어떻게 놈들을 깨부술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맞습니다! 우효!”
최현석이 힘차게 소리치자 라헬이 호응했다.
그제야 아벨슨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고든 씨.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으음…”
맥스윈 고든은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황에, 갑작스러운 질문이 던져진 상황.
당황할 법도 했지만, 오랜 시간 정글과도 같은 정계에서 살아온 그는 곧바로 해답을 찾아냈다.
“우선 공주님에게 씌워진 반역죄를 해명해야 합니다.”
“반역죄?”
“예. 그날… 공주님은 국왕 일가를 살해하고 역모를 일으킨 죄로 반역자가 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족과도 결탁해 죄질이 몹시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역은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본인과 일가족이 함께 사형에 처할 만큼 중죄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족의 손까지 잡았으니.
정상적인 재판을 거친다면 아벨슨의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상황이다.
“만약 그날의 진실을 밝힐 수만 있다면 모든 명분은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레이스 마리어트가 반역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신성 제국 가트렌의 개입이 있었다.
이것을 밝혀내기만 하면 왕궁의 상황은 180도로 변할 것이다.
“정통 왕위 계승자인 공주님께서 계시니 피를 흘리지 않고 왕위를 탈환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희망찬 이야기였다.
아벨슨의 누명을 벗기고.
동시에 상대를 곤경에 빠뜨린다.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최현석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흠…”
턱을 쓰다듬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떻게 밝혀냅니까? 뭐, 증거 같은 게 남아있을 리도 없고.”
아벨슨이 그녀의 동생 레이스를 죽이는 것을 본 목격자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을 뒤집으려면 그만큼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고든 경.”
돌연 아벨슨이 맥스윈 고든을 불렀다.
“예. 공주님.”
“고든 경은 혹시 왕궁의 비밀 창고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비밀 창고라… 선왕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가의 혈통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혹시 그곳입니까?”
아벨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쩌면 거기에 증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째서입니까?”
“레이스는 철두철미한 아이였어요. 분명 가트렌과의 거래를 기록으로 남겨뒀을 거예요.”
맥스윈 고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기록이 왕가의 비밀 창고에 있다는 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중요한 기록이라면 누구도 모르는 장소에 숨겨둬야 한다.
그걸 가족
중 누군가 들어갈지 모르는 왕가의 창고에 보관하다니.
맥스윈 고든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를 들은 최현석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확실히. 그러면 안전하게 보관이 가능하겠네요.”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맥스윈 고든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죄송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간단합니다. 그 개자식은 처음부터 가족을 다 죽일 생각이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최현석이 입꼬리를 비틀며 설명을 이었다.
“왕가의 피가 이어진 자가 모두 죽으면 그 비밀 창고는 자신만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금고가 되니까요.”
왕족이 모두 죽으면 왕가의 비밀 창고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된다.
오직 왕이 된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
레이스는 거사 직전에 중요한 것들을 그곳에 보관했을 게 분명했다.
거사 이후에는 자신에게 시선이 몰려 드나드는 게 쉽지 않을 테고.
어차피 다음날이면 더는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없을 테니까.
“확실히… 그렇군요.”
그제야 맥스윈 고든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스가 그런 잔혹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들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예측이 틀릴 수도 있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동의합니다.”
모두가 수긍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곧바로 움직이는 게 좋으리라.
“아벨슨 씨. 그 비밀 창고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비밀 창고는…”
아벨슨이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 창고가 있는 장소는…”
“장소는?”
“화장실이에요.”
“아, 화장실.”
순간 최현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화장실이요?”
“네. 정확히는 왕족
전용 화장실이요…”
얼굴이 살짝 붉어진 아벨슨이 설명을 이었다.
“화장실에 창고 입구가 있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비밀 창고는 이름처럼 그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다.
그러한 장소가 존재한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왕족이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눈과 귀가 붙어있는 왕족이 평소와 다른 장소에 드나든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왕족이 방문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장소가 그 조건이다.
둘째. 안전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여야만 한다.
수행원들이 함께 드나든다면 더 이상 비밀 창고가 아니게 되니 당연한 일이다.
“왕궁 내의 왕족
전용 화장실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히 충족해요.”“으음,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최현석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족의 비밀 창고가 화장실에 있다는 게 모양 빠지긴 했지만, 실용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본관의 1층에 위치한 왕족
전용 화장실의 거울을 일정 패턴으로 만지면 비밀 창고로 가는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좋습니다. 그러면 일단…”
최현석이 저 멀리 스콜본을 바라봤다.
“다시 수도로 들어가는 게 일차적인 문제네요.”
“아까의 일이 있으니 분명 수도의 검문이 강화됐을 겁니다.”“확실히 분주해 보이는구나. 경비의 수도 훨씬 늘었어.”“이 거리에서 그게 보이십니까?”
사라 던피의 말에 최현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어지간한 거리는 눈으로 보는 게 가능하지만, 이만한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형체를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라 던피는 비교적 자세하게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전처럼은 힘들 것 같다. 특히 최현석. 그대는 너무 체격이 커서 눈에 띈다.”“아까처럼 다른 외모를 써서 들어가면 안 됩니까?”“그래도 의심을 피할 수는 없겠지. 게다가 그렇게 하면 여기 있는 이 남자는 도시로 들어갈 수 없지 않은가?”
현재 일행이 가진 가짜 신분패는 총 3개.
맥스윈 고든도 신분패가 있긴 하지만, 그의 것은 사용할 수 없다.
즉, 모습을 바꾼다고 해도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세 명뿐이라는 것이다.
“고든 경을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어요.”“내 생각도 같다. 이 자의 무력은 거의 없는 수준이니 불안할 거야.”
여전히 적의 추격대가 도시 밖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상황.
맨몸의 노인이 홀로 추격을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칫 맥스윈 고든이 잡히기라도 하면 계획이 들통날 가능성도 있었다.
“흠, 이걸 어떡한다…”
모두가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돌연 사라 던피가 씨익 웃었다.
“나에게 좋은 계획이 있는데, 들어보지 않겠느냐?”
***
기사 토디.
그는 스콜본으로 들어가는 4개의 입구 중 하나인 동문(東門)을 담당하는 자였다.
“모두 경계를 철저히 해라! 신원이나 방문 목적이 확실치 않다면 누구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토디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금 전.
대역죄인의 사형식 도중 사고가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사형수를 데리고 수도 밖으로 도망친 것이다.
상부에서는 언제 괴한이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철저한 검문을 지시한 상황.
“안 돼. 돌아가.”
“어, 어제는 들어갈 수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글쎄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덕분에 수많은 시민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성문 입구는 아비규환이 됐다.
“지금 고기를 팔지 못하면 상하고 말 겁니다!”“그럼 제대로 된 신분패를 가져와. 왜 세릴 영지의 농노가 고기를 가져오는 건데?”“그건 살림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이놈 불법 이주민 아니야? 잡아들여!”“아, 아닙니다! 저는 정식으로 영주님의 허가를 받고…, 아악!”
평소라면 검문이 강화돼도 이 정도로 큰 혼란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신원이 확실한 자만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달랐다.
각지에서 몰려든 미녀들이 편하게 들어올 수 있게 하라는 상부의 밀명.
그 덕에 약화됐던 검문이 갑작스레 강해지니 시민들의 당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쯧. 적당히 뇌물을 받고 들여보내 줄 것이지.’
병사들이 몽둥이로 시민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기사 토디가 조소했다.
사실 그는 이런 검문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이딴 검문으로 그 괴한을 어떻게 잡을 건데?’
토디는 잠깐이지만 도시 밖으로 도망치는 괴한을 본 적이 있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
그런 실력을 지닌 자가 허술하게 검문 따위에 걸릴 리가 있을까.
토디는 이 기회에 한동안 받지 못했던 뒷돈이나 두둑이 받으면 그걸로 족했다.
그때 아버지와 두 딸로 추정되는 자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호오, 제법 미녀군.’
말에 탄 여성 둘과 그 말을 끄는 중년 남성.
특히 장발의 여성은 눈이 번뜩 뜨일 정도로 미녀다.
토디는 직접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지.”
그들을 막아 세운 토디가 중년 남성에게 다가갔다.
“신분패를 확인하겠다.”
“여기 있습니다.”
“흠, 돌라 영지에서 왔군. 수도에는 무슨 일이지?”
“그게…”
중년 남성은 얼굴이 붉힌 채로 속삭였다.
“뒤에 있는 것들은 제 여식입니다…”
“그런데?”
“수도로 가면 그…”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됐다.
애초에 묻기 전부터 토디 또한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저들의 신분패도 확인하도록 하지.”
“물론입니다!”
셋의 신분패를 확인한 토디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확인되었다. 하지만, 수도로 들어가는 건 생각해 봐야겠군.”
수도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중년 남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어째서입니까…!?”“방문 목적이 확실치 않아. 아무나 수도로 들이지 말라는 높으신 분들의 엄명이 떨어졌다.”“아이고 기사님… 수도로 오기 위해 열흘 거리를 걸어왔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흐음~ 어떻게 할까?”
토디가 말을 끌며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자 장발의 여성이 말에서 내리고는 다가왔다.
“기사님. 저희 가족을 가엾이 여겨 주세요.”
여성이 토디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고개를 파묻었다.
‘무, 무슨…’
코끝을 찌르는 여성이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토디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이, 이러면 안 되는….”“기사님. 저희는 그저 일확천금을 꿈꾸는 천한 것들일 뿐입니다.”
순간 여성이 손이 슬며시 토디의 바지춤으로 들어갔다.
토디의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량을 베풀어 주신다면… 수도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토디의 눈이 풀리기 직전.
순간 여성이 언제 다가왔냐는 듯 다시 멀어졌다.
동시에 토디의 정신이 돌아왔다.
‘이건… 은화로군.’
자신의 주머니에 은화가 세 개 들어있었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토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감사합니다!”
여성이 토디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수도 안으로 들어갔다.
토디는 다리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을 겨우 참아냈다.
“후우, 정말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뇌물을 받긴 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확천금은 문제없겠군…”
저 여성이라면 국왕의 간택을 받아 재물을 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