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94)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94화(194/273)
바람이 불어온다.
추기경 빈센조의 재가 불어온 바람을 타고 허공에 흩날렸다.
날리는 재를 보며 최현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 늙은이 끝까지 귀찮게 하고 가네.”
“왜요?”
라헬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니.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으음, 엄청 강하다는 거 아닐까요!?”“그러니까 그 엄청이 얼마나 강한 거냐고.”
강자의 끝은 어디일까.
만인의 위에 선 전설.
그러한 전설 중에서도 강한 박현아.
그런 박현아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마왕군 군단장.
그런 군단장 중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헤미스.
그 헤미스와 견줄 수 있거나 혹은 이상일지 모르는 마왕.
“강함에는 끝이 없어. 빈센조라는 노인이 알지 못하는 강자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기경 빈센조의 시선에서 본 이야기다.
그가 헤미스의 무력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마왕의 힘은?
그들보다 교황이 강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어지간한 군단장보다는 강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그러면 어차피 용사님은 발린다는 거니까. 계속 정진하셔야죠.”“말 좀 곱게 해라. 발린다가 뭐냐 발린다가.”
최현석이 핀잔을 주자 라헬이 콧방귀를 뀌었다.
“욕을 달고 사시는 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참 가슴에 와닿네요.”“시발.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냐.”“훌륭한 용사님 덕분이죠!”
라헬이 빙긋 웃었다.
최현석은 꿀밤을 한대 먹여주려다 그만뒀다.
지금은 라헬과 장난을 칠 만한 체력도 남지 않았다.
“벌써 끝난 것이냐?”
그때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라 던피와 최고 전사 리암이 보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뒤에 있는 것들은 뭐고요?”
리암의 어깨에는 갑옷 덩어리가 잔뜩 얹혀 있고.
그의 뒤에도 그런 갑옷 덩어리 10개가 도열해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이 있어서 챙겨왔다.”
“재미…?”
“차차 설명해주도록 하마.”
사라 던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상황은 다 정리된 듯하구나.”“예. 방금 막 전투가 끝났습니다.”“상대의 사체는 어디 있지?”
사라 던피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왕실 기사의 주검으로 보이는 것이 몇 있긴 했으나, 최현석이 싸운 상대로 짐작되는 적의 사체는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게…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그렇지 않아도 이것과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최현석은 추기경 빈센조에 관해 설명했다.
허약해 보이는 노구가 갑자기 거대해지며 엄청난 힘을 낸 것.
완력만 치면 최현석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체감상 박현아와 비슷하거나 미세하게 우위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으음, 확실히 이상하구나. 강화 마법으로는 한계가 있을 텐데.”“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엄청난 리스크를 지닌 플로모트도 기존보다 두세 배 정도의 힘을 내는 게 전부다.
아무리 목숨을 건 마법을 사용했다 해도 힘없는 노인네를 저런 괴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니겠느냐?”“저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렇다기엔 이상한 점이 많아서요.”
빈센조는 자신이 가진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가 노력으로 쌓아온 힘이라기엔 여러모로 어색한 부분들이 있다.
나이가 들며 판단력이 흐려지는 등 다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현석이 보기에는 자신에게 과분한 힘을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간극으로 느껴졌다.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구나.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알겠습니다.”
하필이면 빈센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 온 터라, 사라 던피가 그를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저… 최현석 씨.”
“예?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아벨슨이 최현석을 불렀다.
“잠시 혼자 있어도 될까요? 무리를 했는지 피곤한 것 같아서.”“물론입니다. 적의 잔당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너무 멀리 가진 마십쇼.”
“고마워요.”
아벨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으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최현석이 신음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냐?”“그냥… 힘들겠다 싶어서요.”
“힘이 들어?”
사라 던피는 아벨슨이 겪은 일을 모른다.
최현석은 간략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가족의 죽음.
자신의 손으로 동생과 사촌을 죽인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사라 던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신경 쓰지 말거라.”
“그게 나을까요?”
“그녀는 이제 이 나라의 국왕이다.”
사라 던피의 시선이 왕궁 안으로 사라지는 아벨슨의 등을 향했다.
“왕이란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는 자. 그렇기에 누구보다 외로울 수밖에 없지.”
“…”
“이건 그녀가 왕으로서의 내딛는 첫걸음이다.”
사라 던피가 아벨슨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스스로 걷지 못하는 자를 왕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
왕궁은 전투의 여파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아벨슨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 안을 돌아다녔다.
뚝… 뚝…
그녀의 메이스 끝에 맺힌 핏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이 핏방울 중 일부는 라브룬 마리어트의 것이리라.
마치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
부서진 왕궁 바닥에 반복적으로 붉은 점이 찍혔다.
“…”
아벨슨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부서진 장소 하나하나에 그녀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아벨슨은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어느 장소에 멈춰 섰다.
과거 자신이 지내던 방이었다.
‘여긴 변하지 않았구나…’
왕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사용하던 침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벨슨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그녀의 손으로 죽인 동생, 레이스 마리어트의 기록이 담긴 상자였다.
“…”
말없이 상자를 응시하던 아벨슨이 손을 뻗었다.
딸깍-
상자의 잠금장치가 열리고.
어린 시절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남겨둔 쪽지가 보였다.
그녀는 가장 앞에 있는 쪽지를 펼쳤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크리어 마리어트-
첫째 크리어 마리어트의 쪽지였다.
어릴 적부터 심성이 착했던 그녀는 타국의 왕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언니는 이때도 똑같았구나.’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남기기로 했으면서 이런 말을 쓰다니.
크리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벨슨은 미소 지으며 다음 쪽지를 열었다.
“나는 누구보다 뛰어난 국왕이 될 거야. 백성들과 함께 마리어트 왕국의 번영을 이끌겠어.”
-호그 마리어트-
둘째 호그의 쪽지였다.
‘이때 오빠의 나이가 열 살 때쯤이었나?’
호그 또한 어린 나이였는데, 나름의 포부가 느껴졌다.
아벨슨은 다음 쪽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자신이 쓴 쪽지였다.
“아마 국왕은 호그 오빠가 되겠지? 나는 오빠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아벨슨 마리어트-
차가운 지금과 달리 어린 시절 아벨슨은 밝은 성격이었다.
쪽지에는 그 시절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
어른이 된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입안이 썼다.
아벨슨은 마지막으로 남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게 레이스가 쓴 것…”
유독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자세히 확인하니 이미 몇 번이고 열었다 접은 흔적이 보였다.
아마 레이스가 반복해서 쪽지를 읽었던 것 같았다.
“…”
아벨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과연 무슨 말을 남겼을까.
어떤 포부를 지녔기에 가족을 죽이고, 조국을 팔아넘기는 그런 결단을 내렸던 걸까.
그녀가 떨리는 손을 움직여 쪽지를 펼쳤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더는 가트렌에 휘둘리지 않는 강국을 만들겠습니다.”
-레이스 마리어트-
내용을 본 아벨슨이 실소했다.
“하, 하하…”
바람이 새듯 흘러나오던 웃음이 점차 커진다.
“하하하하하!”
아벨슨은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을 웃어댔다.
“하하… 하아, 하…”
이내 웃음이 진정되고.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레이스. 이 쪽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니?”
마리어트 왕국은 그저 그런 군소 왕국 중 하나다.
그런데 초거대강국인 가트렌에 지리적으로 밀접한 탓에 이런저런 고초를 많이 겪었다.
레이스가 이런 글귀를 적은 것도 이해가 갔다.
‘가트렌에 휘둘리지 않는 강국을 만든다…’
이 말을 새기면서 정작 가트렌의 힘을 빌려 나라를 전복시킨 동생 레이스 마리어트.
그는 수없이 이 쪽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까.
어쩌면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레이스… 바보 같은 놈…”
아벨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왜…”
아무리 물어도 대답할 동생은 이미 죽었다.
폐허가 된 방에 아벨슨의 울음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마리어트 왕국은 매일매일이 폭풍과도 같았다.
국왕 라브룬 마리어트의 죽음.
믿었던 데우시스 교의 배신.
레이스 마리어트가 저지른 만행.
이런 때에 갑자기 나타나 새로운 국왕을 자처한 아벨슨 마리어트.
누군가는 새 시대가 열렸다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아벨슨을 반역자 취급했다.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났고.
몇몇 영지에서는 아예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아벨슨을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으나, 실상은 다르다.
어둡고 추악한 이해관계.
데우시스 교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영지거나, 혹은 아예 데우시스 교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세력도 상당수였다.
“다녀왔습니다.”
최현석이 집무실에 들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아벨슨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반겼다.
“매번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 일도 하다 보니 나름 재미있네요.”
오늘도 어느 영주와 평화적인 협조 관계를 만들어 낸 최현석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 과정에서 영주 일가가 피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뭐 어떠한가.
결과적으로 평화가 이뤄졌으니 그거면 된 거다.
“국왕 일은 어떠십니까?”“할 일이 너무 많네요. 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갔는지…”
아벨슨은 밤잠조차 줄여가며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처리해도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는 느낌이다.
이전에 같은 업무를 보던 맥스윈 고든이 없었다면 이렇게 버티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표정이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런가요?”
“며칠 전까지는 정말 죽을 사람처럼 하고 있었거든요.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아벨슨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최현석의 걱정했다는 말이 어째서인지 반갑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벌써 즉위식이네요.”
내일 오후.
아벨슨 마리어트의 국왕 즉위식이 진행된다.
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은 너무 불안정한 상황이라 즉위식을 미뤄왔으나, 이제는 정말 때가 됐다.
“아벨슨 씨.”
최현석의 부름에 아벨슨이 돌아봤다.
어째서인지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벨슨 씨가 국왕이 되면. 앞으로는 같이 다니기 힘들겠죠?”
“그건…”
아벨슨이 눈을 감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던 듯,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저는 여행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요.”“국왕이 자리를 비워도 됩니까?”“한동안은 힘들겠죠. 하지만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함께할게요.”
그녀의 말에 최현석이 피식 웃었다.
“믿어도 됩니까?”
“물론이에요. 그도 그럴 게…”
아벨슨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해야 하잖아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여정.
아벨슨은 아직 여정의 막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
“지금부터 국왕 즉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으로 확성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광장에 쩌렁쩌렁한 함성이 울린다.
와아아아아-!
수도 스콜본의 중앙 광장에 사람이 빼곡히 들어찼다.
수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내지르는 함성에 최현석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네요.”
“그대는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가?”“전쟁 말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이죠.”
최현석의 말에 사라 던피가 빙긋 웃었다.
“그대도 참으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구나.”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중앙 첨탑 위로 화려하게 치장한 아벨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아-!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커진 함성.
사라 던피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 생각 하십니까?”
최현석이 물었다.
그동안 사라 던피와 지내며 그녀가 한 국가의 국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눈빛이 뭔가 아련해 보여서요.”“하하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나.”
사라 던피가 멋쩍게 웃었다.
최현석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죠. 사라 던피 씨도 저런 때가 있었을 테니까요.”“그렇구나. 분명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한다. 나 또한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환하게 웃던 사라 던피의 표정이 돌연 차갑게 식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일까?”
“예?”
“모두의 왕으로 군림하던 나는 죽었다. 그와 함께 내 영혼은 진작 이 세상을 떠났을 터. 그렇다면 천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
“떠나간 영혼을 붙잡아온 것이냐? 아니면 단지 마법에 따라 만들어진 기억으로 움직이는, 영혼 없는 공허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냐.”
최현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데드인 그녀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지 알지 못하니까.
아니, 그것을 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주제였다.
“이런, 내가 그대를 심란하게 했구나. 사사로운 상념에 불과하니 그리 마음 쓸 것 없다.”
사라 던피가 피식 웃을 때였다.
피이이잉! 퍼엉!
마법으로 만들어진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마침내 즉위식의 피날레에 이르고.
모두의 함성과 함께 아벨슨이 손을 흔들었다.
‘묘하네…’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왕.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왕.
1,500년의 세월을 넘어서 두 사람이 교차하는 듯한 느낌이다.
최현석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