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195)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195화(195/273)
비명과 폭음이 귀를 찔러온다.
비릿하게 풍겨오는 혈향은 끊임없이 코끝을 맴돌았다.
찰박-!
발아래서 끈덕지게 들러붙는 붉은 웅덩이.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모여 만들어진 샘이었다.
그 위에 선 박현아가 검을 꼬나쥐며 소리쳤다.
“이런 개씨발새끼들! 도대체 뭐 하자는 건데!?”“박현아 님! 후퇴해야 합니다!”
울티문 페스 소속의 전사들이 다가왔다.
그들 또한 치열한 전투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후퇴…? 또 후퇴하자고?”
박현아가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온 건데? 그냥 집어치우고 전부 돌아가!”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된다.
울티문 페스의 전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했다.
박현아는 어째서 이토록 흥분한 것일까.
“어차피 후퇴만 할 거 뭐 하러 나와서 개고생하냐고! 시발!”
거듭된 패배.
전쟁에 참여한 이후, 울티문 페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승리를 맛보지 못했다.
전체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소규모 국지전에서의 승리뿐.
그 외에 중요한 전투에서 울티문 페스는 모조리 패배했다.
계속되는 후퇴의 반복.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마왕군 제3사단의 중요 거점 중 하나인 소드리카 공성전.
울티문 페스는 마왕군을 도와 소드리카 성을 사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쯤 하게. 박현아 군.”
울티문 페스의 수장 케어베 코웰이 다가왔다.
“우리가 죽으면 다음도 없네.”
“영감…!”
“어차피 성은 함락됐네. 홀로 여기 남아서 뭘 할 텐가? 일단은 후퇴하고 작전을 가다듬도록 하지.”
케어베 코웰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현아는 잠시 그의 눈을 응시하다 혀를 차며 돌아섰다.
“몰라 시발. 작전을 짜든 말든 알아서 해.”
“고맙네.”
케어베 코웰이 씨익 웃으며 박현아를 뒤따랐다.
그 둘을 따라 울티문 페스의 전사들 또한 서서히 전장에서 물러난다.
또다시 반복되는 후퇴.
때마침 내리는 비가 도망치는 그들의 흔적을 지워주었다.
***
“지원 요청이요?”
최현석이 눈을 끔뻑였다.
아벨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종이를 읽었다.
“네. 자고 일어나니 박현아 님한테서 이런 편지가 와 있었어요.”“정확히 뭐라 적혀 있는데요?”“당장 튀어와라.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될 지경이니까. 음, 고사리손이라는 게 무슨 뜻이죠?”
아벨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말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제가 어린애다. 뭐 그런 뜻이죠.”
“아하.”
“하여간 말하는 뽄새 하고는 쯧.”
최현석이 혀를 차며 중얼거리던 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라 던피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모르겠네요. 아직 이쪽 상황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는데.”
즉위식 이후 이 주가 흘렀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리어트 왕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가트렌은 여전히 호시탐탐 마리어트 왕국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추기경 빈센조가 저지른 만행은 데우시스 교, 가트렌과 무관하다.”
가트렌 제국은 추기경 빈센조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꼬리 자르기였다.
마리어트 왕국에서 일어난 일은 순전히 빈센조 개인이 벌인 일.
그동안 갈취한 부 또한 빈센조의 자택에서 발견되었다는 게 가트렌의 설명이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신경을 쓰는 가트렌다운 결정이었다.
물론,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어트 왕국을 압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아벨슨 마리어트가 마족과 결탁했다는 의혹은 아직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기에 이 사실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마리어트 왕국과의 모든 국교를 중단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최현석은 왕국 내부의 불씨를 잠재우며, 가트렌의 암약을 막아내느라 동분서주한 상황.
“아벨슨 씨. 마리어트 왕국에는 전설이 없지 않습니까.”“네. 왕국과 뜻을 함께하는 전설은 없어요.”
설상가상으로 마리어트 왕국에는 전설도 없었다.
물론, 왕국 어딘가에는 이름 모를 전설이 있을 수도 있다.
전설 중에는 초야에 묻힌 채로 평범한 여생을 보내는 이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벨슨과 뜻을 함께하는 건 아니니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신성 제국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제가 빠지는 건 좀…”
이런 상황에서 최현석이 빠진다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가트렌이 작정하고 움직였을 때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전설급 강자를 보내 아벨슨을 암살 시도한다면 이쪽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지 않느냐.”
사라 던피가 말했다.
“어차피 나는 이곳에서 해야 할 연구가 남았다. 그동안은 내가 아벨슨을 돕도록 하마.”“그게 정말입니까?”
“잘은 모르지만, 박현아가 있는 곳의 일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그 자존심 강한 마법사가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절박한 상황이겠지.”
박현아의 성격상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어렵다는 것이리라.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긴 한데…”
최현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사라 던피는 아직 완전히 아군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돕는 이유는 오직 신체를 연구하기 위해서다.
그 외에 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라 던피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최현석은 고민하며 앓기보다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사라 씨가 저를 돕는 건 연구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제가 아닌 아벨슨 씨를 돕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사라 던피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의 말이 옳다. 내가 저기 있는 처자를 도울 이유는 없지.”
“그렇다면 왜….”
“그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사라 던피가 고개를 돌려 아벨슨을 바라봤다.
“마음에 들었으니 도와주는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이것을 믿고 말고는 그대의 자유니라.”
“흠…”
최현석이 눈을 감았다.
어떡해야 할까.
이건 아벨슨의 안위가 달린 문제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사라 던피가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는 일.
“저는 괜찮아요.”
아벨슨이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언제까지나 최현석 씨에게 의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여기 계신 사라 던피 씨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벨슨이 잠시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저는 이 나라의 국왕이잖아요? 모두의 의지가 되어야 할 제가 짐이 될 수는 없죠.”
그녀의 표정에서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최현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벨슨의 의사에 반하는 건 그녀를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었다.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최현석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지원을 가죠?”“여기 좌표가 있어요.”
아벨슨이 쪽지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숫자가 길게 적혀 있었다.
사라 던피가 함께 숫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 좌표다. 내가 이동을 도와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감사합니다.”
이후 최현석은 간단히 짐을 챙기고 수도 스콜본을 벗어났다.
수도에는 공간 이동을 막는 역장이 펼쳐져 있었기에 어느 정도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수고스럽게 해서 죄송하네요.”“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수도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역장의 범위를 벗어난 그는 떠나기 전 사라 던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 이걸 받거라.”
사라 던피가 작은 구체를 내밀었다.
신비한 묵빛을 내는 구체는 지름 4cm 정도로 손안에 쏙 들어왔다.
“그대의 목숨이 위험할 때엔 언제든 이 구슬을 깨뜨려라. 그대가 대륙 어디에 있든 5분 안에 그곳으로 가겠다고 약속하마.”
“뭘 이런 걸 다…”
최현석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사라 던피는 어서 받으라는 듯 재차 구슬을 내밀었다.
“그대가 싸늘한 주검이 된다면 내 삶의 낙이 사라질 터니 주는 것이다. 부담 갖지 말고 받거라.”
“감사합니다.”
최현석이 고개를 숙이며 구체를 받았다.
“그럼, 슬슬 이별의 시간이구나.”“예! 가보겠습니다.”“공간 이동을 시작하겠다. 눈을 감고 내가 보내는 마기를 받아들여라.”
최현석은 눈을 감았다.
곧이어 사라 던피가 흘려보내는 마기가 몸을 지배한다고 느낀 그 순간.
익숙한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
최현석이 슬며시 눈꺼풀을 들었다.
“여긴…?”
낯선 오두막이다.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진 상태.
오두막 안에는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시선을 돌리자 오두막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는 박현아가 보였다.
“누님?”
가까이 다가가며 박현아를 불렀다.
“…”
대답이 없다.
자세히 보니 박현아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상태로 졸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이런 데서….”
박현아를 흔들어 깨우려던 최현석이 멈칫했다.
‘잠시만…’
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차분하게 볼 기회가 없었지.’
박현아를 만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최현석은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죽일 듯 눈을 부라리니 곧바로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박현아는 잠을 자면서도 미간을 잔뜩 좁힌 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최현석은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바라봤다.
‘확실히 외모만 보면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말이지.’
최현석의 나이는 스물아홉.
워낙 덩치가 크고 운동을 많이 한 탓인지 얼굴이 동안인 편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박현아는 아무리 많게 봐도 이십 대 중반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원래 전설쯤 되면 나이가 거꾸로 먹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야.’
인간은 일정 수준이 넘어설 때마다 신체가 젊어진다.
최현석도 최근 전투력 30만을 넘어서며 약간이지만 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걸 인지했다.
전설들이 수백 년씩 살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누님은 그걸 감안해도 너무 어려.’
하지만 박현아의 외모는 그러한 회춘을 고려해도 너무 어렸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
‘그만큼 이 세계에 어릴 때 왔다는 뜻이겠지.’
어린 나이에 이 세계에 온 것이다.
어린 나이에 빠르게 경지가 상승해서 다시 어려지니 시간이 흘러도 이런 외모를 지니게 됐으리라.
‘고생도 많이 했을 거야.’
어린 나이에 낯선 세계에 떨어졌다.
치안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냉혹한 세상.
남성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특히나 어린 여성은 고초를 겪을 일이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이런 성격을 지니게 된 것도 일종의 방어 기제가 아닐까 싶었다.
‘왜 왔냐고 하면 욕먹겠지…?’
문득 최현석은 궁금해졌다.
이 세계에 오려면 일단 지구에서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박현아는 어째서 그토록 어린 나이에 죽은 걸까.
그가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귓가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사님! 뭐 하세요!?”
“시발! 깜짝이야!”
최현석은 화들짝 놀라며 라헬을 노려봤다.
“무슨 짓이야!?”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지금 뭐 하시는 거죠!?”“나는 그냥 관찰을….”
말을 하던 최현석이 화들짝 놀랐다.
옆에서 날카로운 마력이 쏘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오? 관찰~?”
시선을 옮기자 사납게 웃고 있는 박현아가 보였다.
“어… 일어나셨습니까?”“이 새끼 봐라? 너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짓 하려 했냐?”“오, 오해입니다! 그냥…”
“그냥 뭐?”
우물쭈물하던 최현석이 말을 이었다.
“… 그냥 쳐다봤습니다.”
최현석은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자신은 그냥 쳐다본 게 전부다.
그때 라헬이 끼어들었다.
“아니죠아니죠! 용사님이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걸 이 라헬이 봤다구요! 분명 속으로 온갖 파렴치한 생각을 했을 거예요!”
“저, 저, 저런…!”
최현석이 당황하며 라헬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넌 뒤졌다.”
박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풀었다.
“오늘 네 썩어빠진 사상에 혁명을 일으켜주마.”“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최현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으나…
“그냥 뒤져!”
대답 대신 날아오는 건 혁명의 주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