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0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07화(207/273)
약속된 3일이 흘렀다.
그동안 박현아의 마력 회로는 완전히 회복됐다.
마력을 담는 그릇 또한 공간 이동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갖췄다.
준비가 끝났으니 남은 것은 이동하는 것뿐.
“그럼 곧바로 마리어트 왕국으로 가도록 하지.”“잠시. 먼저 들를 곳이 있어.”
들러야 할 곳이 있다는 말에 사라 던피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긴다.
박현아는 설명을 이었다.
“울티문 페스에 가서 보고해야 해.”
“울티문 페스?”
“내가 속해 있던 단체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은신처가 있어. 아직 연락이 오지 않은 걸 보면 은신처를 옮기지 않았다는 거겠지.”
은신처를 옮겼다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은신처가 있던 장소에 메시지를 남겼거나.
어느 경우든 돌아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 좌표로 이동해줘.”
“알겠다.”
어차피 사라 던피에게 공간 이동 마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간에 한 장소를 경유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으리라.
잠시 후, 일행이 모두 모이고.
사라 던피가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쳤다.
화악-!
약간의 어지러움이 밀려오고.
눈을 뜨자 또 다른 숲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최현석이 박현아를 바라봤다.
“여기가 어디입니까?”“은신처에서 조금 떨어진 이동 포인트. 저쪽 방향으로 30분 정도만 가면 은신처가 나올 거야.”
박현아가 앞장서서 이동하고, 나머지 일행이 뒤를 따랐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
돌연, 사라 던피가 박현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속도를 더 올려도 되지 않겠느냐. 근방에서 마력이나 신성력은 감지되지 않는다.”“방심해선 안 돼. 가트렌 놈들은 감지를 무력화하는 마도구가 많으니까.”“그대가 소속된 단체 또한 그런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나?”
“그건 아닌데.”
순간 사라 던피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이상하구나. 지금 우리가 이동하는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찮은 미물의 기운만 느껴질 뿐이야.”“그거야 결계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은신처를 옮기고 메시지를 남겨뒀을 수도 있겠지.”
“그렇군.”
사라 던피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딱히 더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일.
굳이 설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이건…”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고.
마침내 은신처가 있던 장소에 도착한 일행.
박현아는 폐허가 된 은신처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크화아악!”
“크륵, 크르르…!”
사체를 파먹던 마수들이 으르렁거린다.
이미 강한 개체들이 파티를 벌이고, 남은 찌꺼기를 먹는 놈들이라 수준은 낮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숲의 청소부 같은 마수.
박현아는 눈을 부라리며 놈들을 노려봤다.
“이 개새끼들아!”
“깨갱…!”
날카로운 기세에 마수들이 화들짝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라 던피가 다가와 박현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정해라. 적이 남아 있다면 발각될 수도 있다.”
“하아… 그래.”
박현아는 숨을 가다듬으며 은신처를 돌아봤다.
흔적으로 보아 대규모 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수천에 달하는 인원이 이 장소를 포위했고.
전투의 상흔은 전설급이 다수 참여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생존자는… 없는 건가…”
박현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티문 페스.
그들과 안면을 튼 지도 어느덧 8년이 흘렀다. 됐다.
가족처럼 동고동락한 사이까진 아니지만, 동료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는 됐고.
자연스럽게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시발…”
박현아가 욕설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이 냉혹한 세계에서 ‘동료’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그런 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박현아라 해도 마음이 쓰라렸다.
최현석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그 물음에 박현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당연히 괜찮지 새꺄. 누가 뒤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도….”
“잘 들어. 우리처럼 누군가를 죽이면서 사는 인간은 항상 각오해야 해. 언젠가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걸.”
박현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그냥 이놈들 순서가 온 것뿐이야.”
“…”
“그래. 그런 것뿐이지.”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이 낯설고도 잔인한 세계에서 20년 가까이 칼을 휘두르며 수많은 죽음을 봐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이미 죽음이라면 질릴 만큼 봤기에 이런 일로 흔들리진 않는다.
“다만…”
순간 박현아의 눈에 분노가 스쳐 갔다.
“그래도 동료니까. 복수 정도는 해줘야겠지.”
최현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짧은 시간이지만, 울티문 페스와 함께하며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
어차피 신성 제국 가트렌과 맞서야 하니, 복수의 칼날을 마음 한편에 세워두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됐으니까 슬슬 가자. 울상으로 죽치고 있어 봤자 죽은 놈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박현아가 팔을 활짝 벌리며 기지개를 켰다.
“가보자고.”
피식 웃으며 말하는 그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동 준비를 했다.
“이제 우리는 마리어트 왕국으로 가겠다.”
잠시 후.
사라 던피의 공간 이동 마법이 준비됐다.
박현아는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잘 먹고 잘살아라.”
“누님. 잠시만요!”
최현석은 용사 상점에서 고급 통신구를 사서 건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십쇼.”“일은 무슨. 너나 잘해 새꺄. 어디 가서 뒤지지 말고.”
말을 툴툴대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가 통신구를 받고는 사라 던피 옆으로 다가갔다.
“그럼 이동하겠다.”
사라 던피의 마기가 움직이고.
이내 번쩍임과 함께 두 여성이 사라진다.
마리어트 왕국 수도, 스콜본 인근으로 이동한 것이다.
보통 이만한 장거리 이동을 위해선 제법 많은 준비가 필요했으나, 사라 던피는 약간의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이동을 끝냈다.
그녀의 뛰어난 마법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 우리도 슬슬 갈까?”
최현석이 시드리엘을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둘은 제3군단의 관할 구역으로 가야 한다.
자세한 좌표를 몰랐기에 불가피하게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길을 걸으며 최현석이 물었다.
“대충 얼마나 걸려?”“빠르게 움직이면 닷새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다.”“제법 오래 걸리네.”
어지간한 자동차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이들의 속도로 닷새면 굉장히 먼 거리였다.
“어쩔 수 없다. 도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을 살피면서 가야 하니.”“뭐, 좋아. 가보자고!”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리려던 그때.
앞장서서 걷던 시드리엘이 돌연 돌아섰다.
“최현석.”
“왜?”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천국. 또 갈 수 없는 건가?”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물론 갈 수 있지! 이번 일 끝나면 아주 제대로 놀아보자고.”
“알겠다.”
최현석의 말에 시드리엘이 환하게 웃었다.
그때 어깨에 앉아 있던 라헬이 벌떡 일어났다.
“용사님! 저는 왜 빼요!”“알겠어. 너도 줄게.”“그때 한 입도 못 먹었으니 다음에는 한 개를 통째로 주셔야 해요! 아시겠죠!?”
라헬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진지함이 우스워서 최현석은 웃고 말았다.
“다 먹지도 못하면서 욕심은.”
자신의 몸집만 한 과일을 통째로 달라니.
욕심이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었으나, 라헬은 단호했다.
“먹을 수 있어요!”
“그래그래. 알겠으니까 가자.”
“꼭이에요! 꼭!”
“알겠다고!”
이번에 과일을 먹지 못한 게 어지간히 서러웠던 걸까.
이후로도 라헬은 다섯 번이나 더 물어서 확답을 받아냈다.
“알겠어. 줄 테니까 그만 좀 물어봐!”
***
제8 사단장실.
이제는 군단장 된 레이드런은 여전히 이곳을 집무실로 쓰고 있었다.
“으음…”
서류를 붙잡고 씨름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장시간의 노동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군단장이 된 후로 매일같이 겪는 일상이었으나,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부관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레이드런은 자신의 일을 믿고 맡길 인재가 필요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나는 펜대를 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템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절대로 업무를 나누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 표현.
레이드런은 포기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군단장 자리에 앉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부군단장이 되어 보좌하겠습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군단장의 자리를 주겠다니.
모템의 대답은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레이드런. 그렇게 안 봤는데, 약은 면이 있었군. 내가 권력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크흠.”
레이드런이 헛기침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모템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본인은 머리 쓰는 일과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레이드런은 잘 알고 있다.
믿을 수 있는 그가 도와준다면 분명 업무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때 모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야겠군.”
“어디 가십니까?”
“잠시 볼일이 생각나서.”
레이드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저런 거짓말을 하다니.
이곳에서 모템과 대화하는 마족은 레이드런뿐이다.
사실상 외톨이나 다름없는 그가 볼일이랄 게 뭐가 있을까.
“후우…”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는 일.
레이드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쿵-
모템이 냉정하게 집무실을 나서고.
레이드런은 다시 서류 더미에 파묻혔다.
그렇게 1분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집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레이드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볼일이 벌써 끝나셨습니까.”
보지 않아도 들어선 이가 모템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나, 아무리 모템이라 해도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옳지 않다.
자신의 일을 돕지는 않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집무실에 들어올 땐 노크하는 게 기본입니다. 주의 부탁드립니다.”
레이드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자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우리 군단장님 심기를 건드려 버렸네?”
순간 레이드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미스 님…?”
그곳에는 모템과 헤미스가 함께 서 있었다.
헤미스는 거대한 입술 괴물이 아닌, 아름다운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저 모습을 한 것을 수십 년 만에 보는지라 더욱 적응이 되지 않았다.
헤미스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레이드런.”
레이드런은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살아계셨습니까…”“어머~ 얘는. 내가 그렇게 쉽게 보였니?”“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헤미스를 제거하기 위해 신성 제국 가트렌이 총력을 기울였다.
솔직히 살아남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다들 죽었다고 믿고 있기도 했고.
“살아계셨다면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헤미스 님이 계시지 않아 군단이 와해되기 직전이었습니다.”“미안. 나름 이유가 있었어. 그래도 네가 3군단을 이어받았잖니?”
군단을 이어받았다는 말에 레이드런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감히 헤미스님의 자리를 넘볼 생각은 없었습니다.”“아니. 잘했어. 오히려 너라면 이렇게 해줄 줄 믿고 있었어.”
헤미스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오늘 왜 돌아왔는지 아니?”“마족을… 구하기 위해서입니까?”
지금 마족은 절대 위기에 봉착해 있다.
마왕성과의 연락이 두절된 것은 물론, 모든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황.
헤미스는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온 게 아닐까?
실망스럽게도 아니었다.
헤미스가 고개를 저으면 말했다.
“아니. 너에게 몇 가지 말해 줄 게 있어서야.”
“말해 줄 것…?”
“우선. 마왕님은 죽었어.”
시작부터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내심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긴 했으나, 막상 직접 듣고 나니 충격이 밀려왔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헤미스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왕님을 죽인 건 최현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