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13)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13화(213/273)
첫 만남은 명백히 ‘악연’이었다.
마왕군의 군단장과 일개 병사.
헤미스는 심지어 최현석이 용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한 일이라곤 최현석을 먹잇감으로 던져준 게 전부였다.
생존율 0%의 보직.
사실상 죽으라고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현석은 살아남았다.
버티고 버텼다.
“한 달. 그 안에 내가 골라준 녀석과 싸워서 이겨. 승리할 때마다 보호 기간을 한 달씩 연장해줄게.”
이후로 시작된, 거부할 수 없는 생존 게임.
임무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수준에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극악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최현석은 성공했다.
매번 살아남았고 그때마다 더 강해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최현석을 대하는 헤미스의 태도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단순 유희를 넘어서 무언가 기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과 달리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이어져 최현석은 강해졌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헤미스가 없었다면… 아마 이런 성장은 불가능했겠지.’
이 세계의 특성상 높은 확률로 어딘가에서 객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헤미스를 보면 복잡한 감정이 밀려든다.
원망스러우면서도 고마운.
굳이 비유하자면 애증과 닮았다.
돌연 최현석은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헤미스 님.”
박현아와의 설전 이후.
할 일이 있다며 떠난다는 헤미스를 최현석이 붙잡았다.
“왜 그러니?”
돌아서는 헤미스.
최현석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막상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원래도 아름다우셨지만, 지금은 훨씬 더 미인이 되셨습니다! 하하하…!”
최현석의 가슴이 타들어 갔다.
‘병신! 이게 아니잖아!’
기껏 불러놓고 한다는 소리가 외모 칭찬이라니.
물론, 헤미스가 미친 듯이 예뻐진 건 맞았지만.
지금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오호호호! 혓바닥은 여전하구나.”“과찬이십니다! 하하하!”
둘의 어색한 웃음이 이어지던 그때.
갑자기 헤미스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니?”“어… 다시 마왕군에 돌아오시는 겁니까?”“글쎄. 아직 잘 모르겠네.”
헤미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마왕군을 떠나서 다녀 보니 이것도 제법 재미가 있더라고.”
“그렇습니까?”
“인간의 도시는 흥미로워. 마족의 생활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과 재미를 주지.”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미스의 정체가 들통나면 도시가 발칵 뒤집히는 걸 넘어 국왕까지 벌벌 떨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조용히 즐기다 떠나면 모두에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헤미스는 미녀였으니까.
“어… 이전의 모습으로는 이제 안 돌아오시는 겁니까?”“이전의 모습? 아, 이걸 말하니?”
순간 헤미스의 이목구비가 사라지면서 입술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알던 입술 괴물의 모습이 된 것이다.
최현석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PTSD 같은 건가…’
아무리 강해져도 저 모습만 보면 식은땀부터 흘러내렸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모습이야. 힘이 너무 강해져서 육체의 형태가 유지되지 않더라고.”
헤미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계속 붕괴되는 육체를 회복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유지가 가능한 형태로 바꿔버렸지.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렇군요.”
힘이 너무 강해서 육체가 붕괴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박현아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
“너야말로 옛날이랑 느낌이 많이 다른데? 마기가 3분의 1은 날아갔잖아.”
헤미스가 약해졌다.
최현석이 느끼기엔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헤미스는 육체의 형태가 붕괴할 만큼 강한 힘을 지닌 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조금 전, 최현석은 몰래 그녀의 전투력을 확인했었다.
결과는 역시나 측정 불가.
현재 가진 고급 전투력 측정기는 최대 60만까지 측정할 수 있다.
즉, 약해진 헤미스라 해도 전투력이 60만은 넘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끝났니?”
헤미스의 말에 최현석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그러니까…”
말을 끌던 최현석이 돌연 고개를 숙였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헤미스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뭐 하는 거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한 최현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감사하다니. 뭐가?”“그냥. 이렇게 인사를 해서 털어내고 싶었습니다.”
“흐응~?”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최현석 본인조차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헤미스는 마치 모두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그걸로 끝?”
“예.”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재미있는 사건이 있으면 좋겠네.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헤미스가 새하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멀어지는 그녀를 뒤로하고.
최현석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에게 돌아왔다.
“야. 네가 주둥이한테 고마울 게 뭐가 있다고 인사를 해? 저년이 얼마나 악독한 년인데.”
박현아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용사님!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용사가 마왕군 군단장에게 고맙다니!”
숨어있던 라헬 또한 어디서 기어나더니 박현아의 말에 호응했다.
민망해진 최현석은 볼을 긁적였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죠. 그리고 라헬. 너는 헤미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어있다가 가자마자 아주 살판났네?”
헤미스가 있을 때는 숨소리조차 죽이던 라헬이다.
그런데 떠나자마자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흥! 라헬은 그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것뿐이라구요!”
“네~ 그러시겠죠.”
“진짜라니까요! 이게 다 용사님을 배려해서 그런….”“그래그래. 알겠다니까.”
최현석과 라헬이 티격태격하던 때.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사라 던피가 다가왔다.
“저자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보이는구나.”“뭐, 이런저런 신세를 많이 지기는 했습니다.”
“그래…?”
사라 던피는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헤미스가 떠나간 방향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아니.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신기하다?”
사라 던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서 다시 깨어난 이후. 개인적으로 마족과 마수에 관해 연구했다. 내가 있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던 생명체니, 흥미가 갔지.”
사라 던피는 마족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당연히 처음 보는 마족과 마수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마족과 마수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을 알게 됐다.”“호오, 그건 나도 흥미가 가는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박현아가 끼어들었다.
인간에게는 아직 마수와 마족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애초에 여러 종족의 집합체를 마족이라 뭉뚱그리는 것만 봐도 인간이 마족에 관해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었다.
“보통 대화가 가능하면 마족, 불가능하면 마수라 표현하긴 하는데, 이것도 경계가 모호해. 마수라 불리는 것 중에서도 고등한 지능을 지니고 대화가 통하는 개체가 있거든.”“그렇다. 지성이나 대화의 여부는 둘을 나누는 데 딱히 관련이 없다.”
“그럼 뭐야?”
“간단하게 설명하면 마기를 수용하는 방식의 차이다.”“마기를 수용하는 방식…?”
박현아와 최현석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사라 던피가 설명을 이었다.
“마족은 인간이 마력을 수용하는 것과 유사하게 마기를 수용하고, 마수는 그것과 완전히 다른 체계로 마기를 수용한다.”“으음, 이해가 잘 안 가네요.”“굳이 그대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 딱히 중요한 사실도 아니니. 단지, 내가 의문인 것은…”
순간 사라 던피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담겼다.
“저 헤미스라는 자. 마족인지 마수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예?”
“둘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눈으로 보면서도 어떻게 저런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신기할 따름이구나.”
마수와 마족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니.
들으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여러모로 해박한 지식을 지닌 박현아조차도 고심하는 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박현아. 그대에게는 차후에 내가 설명해 주도록 하지.”
“어, 그래.”
“아무튼, 기회가 된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겠나?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구나.”“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말은 해보겠습니다.”
헤미스의 성격이 워낙 종잡을 수 없으니, 확답은 해줄 수 없다.
그래도 사라 던피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해서 시도는 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떡합니까?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난 것 같은데. 돌아갈까요?”
헤미스에 관한 것은 일단 뒤로하고.
이제부터 앞으로 일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야 했다.
목표였던 시드리엘을 마왕으로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달성돼버린 상황.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쪽에 남아서 시드리엘을 돕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원래 근거지던 울티문 페스도 사라진 상황.
여기 모인 이들의 힘만으로는 성전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마왕군과 힘을 합쳐 대항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글쎄. 여기서 마왕군이랑 같이 신성 제국을 막아도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박현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는 시드리엘이 마족을 단합해서 저항하겠지. 그리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야.”
마왕군이 빠르게 무너진 것은 외부의 요인이라기보다는 내부의 문제였다.
가장 골칫거리였던 집안일이 해결됐으니 앞으로의 전투는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굳이 여기 있기보다는 일단 마리어트 왕국으로 돌아가자. 이쪽과는 연결만 해두고, 우리는 우리대로 신성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하는 거지.”“나 또한 박현아의 말에 동의한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굳이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아.”
“좋습니다.”
최현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단 누님 치료도 마저 해야 하니, 마리어트 왕국으로 복귀해서 다음 일을 생각하도록 하죠.”
***
새로운 마왕의 등장.
시드리엘의 이야기는 금세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왕이 바뀌는 것은 마족이 등장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인지라 순식간에 대륙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뜨거운 반응에 화답하듯, 새로운 마왕은 전혀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마족이 평화를 원한다.
인간은 어처구니가 없었고, 같은 마족은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화로운 마족?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마족은 일생이 투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칠다.
사실상 전쟁광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평화를 부르짖는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모두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마왕, 시드리엘은 진지했다.
“마족의 영역을 존중한다면 마족
또한 인간의 땅을 넘보지 않겠다.”“다만, 침략자에 대해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응징할 것이다.”
새로운 마왕의 선언은 필히 많은 이야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제 인간과의 전쟁을 그만둘 때도 됐지.”
“나도 지쳤어.”
어떤 마족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고.
“전쟁에서 도망치다니! 새로운 마왕은 겁쟁이다!”“마족답지 않다! 나약하다!”
누군가는 인간과 마족은 양립할 수 없다며 성을 냈다.
이런 상황은 인간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흐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입니다.”
교황 오르반 4세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갑자기 몰아친 일에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마왕이 등장하는 것도 모자라서 평화를 원하다니요.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추기경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성하. 민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맞습니다. 마족이 평화를 약속했는데, 전쟁을 이어갈 필요가 있겠냐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이미 성전을 멈추고 평화를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중입니다.”
교황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게 팼다.
“벌써부터 그런 움직임을 보이다니… 배후가 있는 게 분명하군요.”
이러나저러나 성전은 역사 이래로 최고의 성과를 내는 중이다.
사람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땅에서 영영 마족을 지워버릴 수 있든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마족이 평화를 원한다는 말 한마디에 이리도 쉽게 흔들리다니.
누군가 뒤에서 여론전을 펼치는 게 분명했다.
“전부 잡아들일까요?”“안됩니다. 그랬다간 민심이 더 흔들릴 수 있어요.”
교황이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아쉽습니다. 거의 다 된 일이었건만.”
“…”
“정보부는 뭘 했습니까. 마족이 저런 수를 준비하는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죄송합니다!”
정보부를 담당하는 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교황은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쯧, 일단은 이대로 성전을 이어가며 상황을 지켜봅시다. 어차피 놈들은 궁지에 몰린 상황. 서두른다면 충분히 이 전쟁을 승리로 매듭지을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리고 평화를 외치는 자들의 뒤를 조사하세요. 분명 드라센 제국이나 도미스 왕국의 끄나풀이 숨어들어 있을 겁니다.”“맡겨만 주십시오!”
정보부에서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마저도 실패한다면 정보부의 존재 가치 없어진다.
그리고 교황은 절대 가치 없는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하, 머리가 아프군요.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잠시 후.
회의가 끝나고 홀로 남은 교황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대업이 시작부터 삐걱대니, 좋지 않습니다.”
교황의 말에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답변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경께서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
교황 오르반 4세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후우, 다음 작전의 시기를 앞당겨야겠습니다. 준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