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22)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22화(222/273)
“이엔 넬 체르시라고 해요. 편하게 이엔이라 불러주세요.”
“아, 예.”
이엔이 싱긋 미소를 짓더니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 모습을 보며 최현석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듀갈 폴킬 님.”
“아, 예.”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던 최현석은 문득 생각한다.
‘이게 사랑인가.’
이엔 넬 체르시는 최현석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었다.
밝고 깨끗한 피부.
굴곡진 푸른 머리칼은 마치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머리칼과 같이 푸른 눈은 크고 초롱초롱했는데,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아 전반적으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버님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엄청 강한 기사시라고.”
“아, 예.”
표정이나 말투는 사근사근하면서 귀여웠는데, 그러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고 기품있는,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꼭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이상형이다!’
최현석 주변에는 미인이 많았다.
아벨슨 마리어트만 해도 천사로 착각할 정도로 미인이었고.
라헬도 외모만 놓고 보면 지구에서 본 어떠한 연예인보다 예뻤다.
사라 던피와 시드리엘은 조금 궤가 다르긴 했지만, 그녀들 또한 굉장한 미인인 건 명백했다.
‘한때 마음을 줬던 적이 있지만, 이젠 알았어. 내 진짜 이상형은 여기 있는 이엔이다.’
지금, 이 순간.
최현석은 깨닫고 말았다.
여태껏 자신은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일종의 방황이라 할 수도 있겠다.
진짜 이상형을 만나기 전이라 자신도 스스로의 취향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듣고 계신 가요?”
“아, 예.”
이엔의 물음에 최현석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지금 국제 정세에 따라 갈라진 파벌을….”
이엔의 목소리가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흘러나간다.
‘목소리도 예쁘네.’
최현석의 머릿속에는 그저 이엔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에요. 여기서 듀갈 님의 역할이 중요해지죠.”
“아, 예.”
“아까부터 ‘아, 예.’밖에 안 하시는데. 괜찮으세요?”
이엔이 눈앞에 손을 흔들며 물었다.
최현석은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푸흡…!”
마치 로봇처럼 한결같은 반응에 결국 이엔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최현석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네요.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차후에 더 궁금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아… 예…”
“그럼 이만.”
이엔이 싱그러운 눈웃음을 짓고는 떠나간다.
최현석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쿵…!
문이 닫히고.
이엔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최현석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폴킬 경. 괜찮소?”
몰린 국왕의 물음에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님이 미인이십니다.”“하하하! 우리 딸의 미모가 유명하긴 하지. 제국에서도 탐을 낼 정도라오.”
딸의 칭찬에 기분 좋게 웃던 몰린 국왕이 돌연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총명해서 문제지.”“총명한 게 문제입니까?”“음, 정확히는 야망이 너무 큰 게 문제라오.”
야망이 큰 게 문제다.
두루뭉술한 이야기였으나, 최현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여성이 큰 야망을 지녔다는 게 문제겠지. 이 시대는 가부장적인 사상이 강하니까.’
이곳의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어떤 일이든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
여성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
이러한 생각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있다.
특히나 왕좌나 귀족의 가주 자리 같은 경우에는 거의 99.9% 남성이 뒤를 잇게 된다.
아마 이엔 넬 체르시는 본인이 여성임에도 이러한 틀을 깨고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자 하는 것 같았다.
“여성의 몸으로 큰일을 하는 게 쉬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니 말이오.”“안타까운 일이군요.”“그래도 나는 내심 이엔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 중이외다.”
몰린 국왕이 이엔 넬 체르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
최현석은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반발이야 심하겠지. 하지만, 이엔은 총명한 아이라오.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엔이 국왕이 되는 게 옳다는 생각이오.”
“그렇군요.”
“아, 방금 한 말은 비밀로 해주시오. 딸아이도 아직 모르는 일이라.”
“물론입니다.”
그때 몰린 국왕이 은근한 시선으로 최현석을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폴킬 경께서 도와주시는 게 어떻소? 이엔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예?”
최현석이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이엔의 꿈을 이루게 돕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우리 체르시 왕국에는 전설이 없소.”
최현석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애초에 전설이란 건 그리 흔하지 않다.
네다섯 이상씩 데리고 있는 제국이 이상한 것이지.
이런 중소 왕국에선 영웅을 보는 것조차도 굉장히 힘들었다.
“만약 폴킬 경이 이엔과 혼약을 맺어준다면 이엔이 왕위를 잇는 걸 반대하는 자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 않겠소?”
“예!?”
최현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혼약(婚約).
문자 그대로 혼인을 약속한다.
즉, 결혼을 말하는 것이다.
“호, 호, 호, 혼약이라니. 갑자기 그런…!”“하하하! 폴킬 경께서도 딸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시니, 한번 해본 말이오.”“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몰린 국왕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나는 언제든 밀어줄 생각이오. 이엔게도 적극적으로 말해보겠소.”
최현석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왕의 남자가 되어 토끼 같은 자식들과 함께 왕궁에서의 행복한 노후 라이프가 펼쳐지고 있었다.
‘최현석! 드디어 인생에 볕이 드는구나!’
***
국왕을 대면한 이후.
최현석은 귀빈이 묵는 방으로 안내됐다.
“출입은 언제든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인이 항시 대기 중이니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안내를 맡은 하녀가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방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남게 된 최현석.
그 순간, 라헬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서 뿅 하고 나타났다.
“용사님!!!”
시작부터 소리를 지르는 라헬.
최현석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심드렁하게 자신의 전담 요정을 바라봤다.
“왜?”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또 뭐가 불만인데.”“그 파란 여우한테 아주 홀려 가지고! 짱구같이 멍청한 얼굴로 침을 질질 흘렸잖아요!”
최현석이 눈을 찌푸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당연히 용사님이죠! 여기 용사님 말고 다른 사람 있어요!? 용사님은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병신 마왕군 컨셉을 잡더니 진짜 병신이 됐냐구요! 이제 보니 용사가 아니라 메소드 연기의 대가! 대배우였네요!”“일단 진정하고 심호흡을 하자. 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최현석이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라헬은 전혀 진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어요! 네. 좋아요. 멍청한 마왕군 컨셉을 못 지킨 건 그렇다 치자고요! 다행히 국왕도 별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 파란 여우가 한 말. 똑바로 듣긴 했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하냐구요!”
최현석이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 보니 이엔이 말한 내용이 전혀 기억나질 않았던 것이다.
‘이엔이 뭐라고 했더라…’
도중에 뭔가 묻고 대답을 한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목소리가 예뻤지.’
이엔의 목소리는 참 고우면서도 청량하다!
그게 전부였다.
라헬은 그것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쯧쯧! 고작 여자 하나에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셔서 어떻게 큰일을 하시려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라헬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딱히 예쁜 것도 아니더만…”
“뭐?”
순간 라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잖아요! 그 파란 여우보다 라헬이 훨씬 더 예쁘고 귀엽잖아요!”“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라헬이 더 예쁘다구요! 백배! 천배는 더 귀엽다구요!”“그래. 그렇다고 치자.”“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사실이라구요! 라헬이 더 귀엽다고 인정하세요! 어서!”
최현석이 뚱한 얼굴로 라헬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심술이 났나 했더니…’
한동안 라헬을 빤히 바라보던 최현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라헬이 예쁘고 귀엽지.”
누가 봐도 마지못해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말투.
그래도 잔뜩 튀어나와 있던 라헬의 입술이 조금은 들어갔다.
“흥!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넘어가 드릴게요.”“어… 진짜 고맙다.”“아무튼, 그 파란 여우가 한 말은 라헬이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잘 들으세요.”
“그래.”
다행히 이엔의 말은 라헬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최현석은 내심 혀를 찼다.
‘평소에는 그렇게 멍청해 보이더니 이럴 때만 쓸데없이 똑똑하네.’
대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엔을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라헬이 워낙 조목조목 설명을 잘해 주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일단 참자. 여기서 또 이엔을 만난다고 하면 아주 게거품을 물 테니까.’
어쨌거나 자신은 이곳에 일을 하러 왔다.
아무리 여자에게 빠졌다고 해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 법.
‘연애 사업은 이번 일을 해결하고 해야지.’
벌써부터 미래가 그려졌다.
푸른 머리칼의 왕족
영애.
그녀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천사처럼 예쁠 게 분명했다.
“좋았어! 가자!”
최현석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긴 어딜 가요?”
“전후 사정은 알았으니 이제 현장에서 직접 부딪쳐 봐야지!”
한시라도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편하게 이엔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용사 출동!”
오랜만에 최현석의 의지에 불이 붙었다.
***
마족의 평화 선언 이후, 가트렌과 드라센은 서로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여론전을 펼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현재 체르시 왕국의 상황은 과거 마리어트 왕국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마족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파.
이제는 마족과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온건파.
강경파는 신성 제국 가트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온건파는 드라센 제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체르시 왕국의 고위층도 자연스레 둘로 나뉘었어. 대부분 본인의 신념이나 생각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가트렌이냐 드라센이냐, 어느 줄을 잡았냐에 따라 갈라진 거지.”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그들의 배후에 있는 이들에게 전쟁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영역을 차지하고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한 아귀다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무력으로 해결하기 힘들어. 무고한 시민을 전부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럼 어떡하시게요?
“솔직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가트렌을 지지하는 귀족이나 고위층을 싹 다 암살하는 건데…”
암살이라는 말에 라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용사님!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니! 그게 용사의 입에서 나올 말이에요!?”“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천할 생각은 없어.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고위층 암살.
이건 자칫하면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짓이 될 수도 있다.
국왕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건 원하지 않을 테고.
최현석 개인적으로도 탐탁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마리어트 왕국에서 했던 것처럼 민심을 잡아야 하는데, 이게 또 어렵단 말이지.”“그렇죠. 그때는 상황도 달랐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으니까요!”
마리어트 왕국은 체르시와 비슷하면서도 여러 가지가 달랐다.
가트렌 제국의 추기경 파견.
그리고 사라 던피와 드라센 제국의 도움.
이 모든 게 합쳐져 완성된 시나리오가 마리어트 왕국에서의 그것이다.
체르실톤에서 무작정 따라 하기에는 상황이 받쳐주지 않았다.
“결국은 자연스럽게 가트렌이 악당이란 걸 알게 하거나. 아니면 가트렌이 먼저 손을 떼게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최현석의 고민이 깊어져 가던 그때.
근처에서 소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광신도 놈들!”“닥쳐라! 멍청한 평화주의자 같으니라고!”
최현석은 혀를 찼다.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체르실톤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익숙해지다 못해 질려버렸다.
이곳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모였다 하면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는 것 같았다.
“광신도! 전쟁이 그렇게도 좋으냐!”“말도 안 되는 소리! 전쟁을 그만하기 위해서 마족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거다!”“마족이 평화를 약속했잖아!”“멍청한 놈! 너는 마족의 말을 믿나!”
최현석은 싸움에서 멀어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 몇 번은 혹시나 건질 게 있나 싶어 살폈지만, 이제는 안다.
이런 길거리 설전은 양쪽이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결국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고.
경비가 오면서 양쪽이 모두 체포되는 게 결말이다.
그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최현석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왕이 직접 찾아와서 약속한다면 모를까! 그놈들의 말은 절대 못 믿어!”
동시에 최현석의 머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저거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최현석을 보며 라헬이 눈을 끔뻑였다.
“뭐가 저건데요?”
이 용사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걸까.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왕을 여기로 부르자!”
“네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