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48)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48화(248/273)
“말로만 듣던 신의 대적자를 실제로 보다니. 영광이오.”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박현아는 그녀답지 않게 예를 차렸고.
황제 람베르트 또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박현아를 추켜세웠다.
“편하게 말씀하시오. 듣기로는 그리 딱딱한 성격이 아니라던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오?”“과거 홀로 전장을 떠돌던 때 드라센이 도와준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은인에 대한 예우라고 해두죠.”“이런, 아무도 모르게 도우라 했거늘. 정보가 새어 나갔나 보오.”
황제 람베르트가 자못 엄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부터 신의 대적자라 불리며 가트렌과 전쟁을 벌여온 박현아.
그런 그녀를 도운 누구도 모르는 극비, 기밀이다.
아무리 당사자라 한들 박현아가 알고 있을 리가 없는 내용이거늘.
기밀이 새어 나갔다고 분명하다 생각하던 그때 박현아가 피식 웃었다.
“그쪽 실수라기보다는 이쪽의 눈치가 너무 빠른 거죠.”
자칫 건방져 보일 수 있는 태도에도 황제 람베르트는 마음에 들었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렇군! 맞아. 그대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사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고, 비교적 최근에 눈치챘죠.”“그랬었나… 하나, 이 또한 오해요. 내가 그대를 도우라 지시한 것은 우리 드라센 제국을 위해서였을 뿐. 그대가 그리 고마워할 이유는 없소. 그러니 무리해서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오.”“저는 결과를 중시하는 타입이라. 그래도 뭐… 그쪽이 정 원하신다면 편하게 말하고.”
박현아가 말을 이으면서 자연스럽게 평소의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보며 황제 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그 건방진 태도가 더 좋군. 아무래도 지금부터 나눠야 할 이야기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오.”
“마음에 드네.”
그 순간, 박현아의 눈이 내리깔리며 날카롭게 빛났다.
황제가 곧장 본론을 꺼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여기까지 초대한 이유가 뭐지?”“예상했겠지만, 가트렌 때문이오.”
“가트렌이 왜?”
“가트렌에서 서신이 왔소. 그대들을 넘겨주지 않으면 대륙을 몰살시키겠다더군.”
박현아가 미간을 좁히며 생가에 잠겼다.
고작 한 문장임에도 태클을 걸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일단 드라센에 우리를 넘기라 요청을 한 것부터가 웃기는데, 이건 넘어가자고. 물밑에서 드라센이 도움을 주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우리가 여기 소속이라 오해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뭐? 대륙 몰살? 그딴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라고?”
대륙을 몰살시키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을뿐더러, 가능하다 하더라도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가트렌 또한 이미 충분히 가진 게 많은 제국인데.
굳이 세계 멸망이라는 최악의 전개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단 오해를 바로잡자면, 가트렌은 우리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소. 드라센은 어디까지 조력자. 그대들을 강제할 수 없지.”“그런데 왜 그쪽에 우리를 넘기라 하지?”“여기서 두 번째. 대륙 멸망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우리가 조사해본 결과 가트렌의 말은 허언이 아니오.”“가트렌이 실제로 대륙을 몰살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그렇소. 몰살이라기보단 사실상 공멸에 가까운 것이지만. 대륙이 위험하다는 것은 마찬가지지.”“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거네.”
박현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가트렌한테 대륙을 멸망시킬 자폭 스위치가 있고. 그 스위치가 눌리는 꼴을 보기 싫으면 얌전히 우리를 넘기라 했다?”
“정확하오.”
“하지만 왜? 가트렌이 자폭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어쨌거나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 제국인데.”“가트렌이 절박해졌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연이어 활약해준 덕분이지.”
“절박해졌다?”
“겉으로 봤을 때, 가트렌은 여전히 큰 덩치를 유지하고 있소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오. 안에서부터 썩어들어 가고 있지. 그대들이 행한 것들이 알게 모르게 가트렌의 내부를 파먹은 것이오.”“아… 그렇게 된 건가.”
박현아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이전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반쯤은 의도했던 내용이니까.
가트렌의 근간이 되는 데우시스 교.
그리고 데우시스 교의 근간은 마족이다.
마족이 존재해야지만 데우시스 교가 남는다.
‘원래 가트렌은 마족을 처리해서 데우시스의 힘을 최대로 키운 다음 단숨에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다.’
마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면 데우시스 교의 세력은 대륙 전체를 뒤덮을 터.
이후는 간단하다.
남은 국가 중 몇몇 강대국만 마족과 엮어 마녀사냥하면 대륙을 차지하는 건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부터 실패했지.’
마왕을 없애기는 했으나, 마족은 여전히 남았고 심지어 평화 조약을 맺었다.
마족은 공존할 수 없는 악이라고 주장했던 데우시스 교의 교리가 뿌리부터 흔들린 것이다.
그 후 가트렌 내부에서 계속된 추격전(전쟁).
추기경들의 사망.
국력과 교의 힘이 계속해서 소모됐다.
자연스럽게 세력이 약해지면서 그동안 숨겨져 왔던 악행과 진실들이 조금씩 베일을 벗었다.
그러면 데우시스 교와 가트렌의 민심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다.
“이제 와서 그대들을 탓할 생각은 없소. 우리 드라센 또한 함께했던 일이고. 누구도 가트렌이 그런 힘을 숨기고 있었는지 몰랐으니.”“가트렌도 웃기네. 이건 사실상 자업자득이라고. 우리가 한 건 이미 썩어있던 내부를 들춘 것밖에 안 돼.”“하하하!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어쨌든 중요한 건 가트렌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오. 아직은 괜찮지만,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그래서 협박을 했다? 대륙 전체를 걸고?”
“그렇소.”
“무슨 근거로 그 말을 믿어야 하지? 뭐, 대륙 전체에 폭탄이라도 심어 뒀나?”
“비슷하오.”
“응…?”
순간 당황한 박현아가 눈을 끔뻑였다.
“대륙 전체에 폭탄을 심어뒀다고?”“정확히는 신성력을 심어 두었지.”
“신성력…”
“그동안 신성력은 마족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힘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무엇보다 치명적인 독이었던 것이오.”
이어지는 교황의 설명은 이러했다.
먼저 대륙 내에 데우시스 교의 신전이 표기된 지도를 펼쳤다.
이렇게 보면 신전은 그저 불규칙적으로 늘어져 있을 뿐이지만, 이중 대신전 위주로 선을 그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법진…?”
“그냥 마법진이 아니오. 대륙 규모의 마법진이지.”
대신전을 따라 만들어지는 마법진은 거의 대륙의 3분의 1.
인간의 영역만 봤을 때는 절반가량을 뒤덮고 있었다.
“일단 발동하면 최소 인간 절반은 범위에 들어가는 거네.”
“그렇소.”
“그래서. 마법진이 발동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신성력을 지닌 자들이 모두 폭주하게 되오.”
“폭주…?”
“광인이 되는 것이지. 일종의 언데드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군.”
박현아는 할 말을 잃었다.
인류를 수호하는 힘 신성력.
그것으로 언데드와 비슷한 상태를 만들다니.
아니, 그게 가능하다 치더라도 대륙 절반을 그렇게 만들 생각을 하는 가트렌은 도대체 뭘 하는 집단이란 말인가.
“가트렌에서는 이를 이렇게 부르더군. 제국의 헌신이라고.”“이름 한번 기깔나게 지었네…”
이 마법이 어째서 ‘제국의 헌신’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가트렌 제국의 영토 전역은 물론이고, 친 가트렌 국가 위주로 마법진이 발동하도록 설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가트렌은 어느 국가보다 신성력을 지닌 사람이 많아. 저걸 발동시키면 자국민이 전부 미쳐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 짓을 한다고?”“그러니 제국의 헌신이라 하는 것 아니겠소?”
“미친 새끼들.”
“아직 정말 중요한 게 남았소.”“아직도 뭐가 남았어…?”
박현아가 지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인류의 20% 이상이 한순간에 미치광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것보다 중요한 게 있단 말인가?
“그렇게 광인이 된 자들이 모두 가트렌의 군대가 되오. 보통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은 물론, 두려움도 모르지. 최강의 군대가 탄생하는 것이오.”
“허어…”
“저 마법이 발동되면 사실상 대륙은 멸망이라 봐야겠지.”
자국민을 모조리 희생한다.
더는 뒤가 없는 가트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륙을 정복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륙 정복은 높은 확률로 성공할 것이다.
대륙의 모든 군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더 강한 군대를 가지게 됐을 테니까.
“전쟁이 끝난 뒤에 이 땅에 뭐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트렌은 그렇게 해서라도 대륙을 가지고 싶었었나 보오.”“진짜 대단한 또라이 납셨네…”“어쨌든 그들에게도 제국의 헌신은 최후의 수단이오. 그러니 이렇게 협상을 빙자한 협박을 시도하는 것이지. 어떻게든 그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오.”“덕분에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그대들을 강제할 생각은 없소.”“안 할 수가 없잖아. 하지 않으면 대륙이 박살 나는데…”
적은 협상 카드로 대륙을 지워 버릴 핵폭탄 스위치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 버튼 누르는 꼴 보기 싫으면 와서 목숨을 바쳐라.
여기서 죽는 것 외에 무얼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그 마법 막을 수는 없는 겁니까?”
그때,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최현석이 처음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불가능하오. 아직 마법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지.”
“시간이라면?”
“대륙의 주요 대신전을 동시에 공격해서 무너뜨려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니 말이오. 만약 어중간하게 신전을 공격하려는 태도를 보이면, 적이 먼저 마법진을 발동할 수 있으니 말이오.”
“아…”
비유하자면 이렇다.
핵폭탄이 터지지 않게 하려면 스위치 전원을 완전히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대륙 전역에 퍼진 전력 공급원을 차단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섣불리 전원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가, 완전히 전원이 꺼지기 전에 적이 스위치를 눌러버리면 그땐 끝이다.
“누차 말했듯, 강요할 생각은 없소. 그대들이 지금처럼 싸워주겠다면 그것만 해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오.”
황제의 말에 박현아가 조소했다.
“너무 이미지 챙길 필요 없어. 이해하니까. 우리 둘만 죽으면 깔끔하게 대륙을 지킬 수 있는데, 솔직히 바랄 수밖에 없겠지.”“음, 오해하고 있는 듯하군.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진심이라고?”
“그대들을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평화. 그건 일시적인 것이오.”
황제 람베르트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폭탄 스위치를 가지고 있소. 그대들을 내주면 다음에는 무얼 요구할까? 인접국의 영향력? 동맹의 해체? 하나하나 내주다 보면 언젠가는 요구하겠지.”
황제의 눈은 이미 정해진 미래를 보는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 제국을 내놓으라고.”
그가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런 미래가 빤히 보이는데, 그대들에게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할 필요가 있겠소?”“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가 아니라 당장 대륙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는 드라센 제국이오.”
황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설령 대륙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대륙에 남은 마지막 국가가 될 것이오. 살아남는다면 다시 일어설 것이고, 우리가 쓰러진다면 대륙도 그걸로 끝이오.”
광오했다.
드라센 제국이 곧 인류 그 자체라는 말과 다름없는 말.
그러나 황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비록 피해가 크겠지만, 인류가 멸망하기 전에 무언가 방도를 찾으리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오.”“황제라는 작자가 참 태평하네.”“황제가 원래 그런 자리라오. 사사(些些)한 것에 신경 쓰다간 제 명에 살 수 없지.”
제국이, 나아가 대륙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이 사소한 일이라니.
농담이나 허세일지라도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 싶었다.
‘표정만 보면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흔들림 없이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인 걸 보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답을 요구하지는 않겠소. 가트렌에서도 시간을 주었으니. 사흘. 그 안에 답해주시오. 죽으러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박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금 말하지 뭐. 시간 준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미 최현석과 대화를 나눠 둘의 의견은 하나로 모인 상황.
굳이 사흘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다.
아니, 지금부터는 시간이 금.
당장 결단을 내리고 빨리 움직여야 한다.
“까짓거. 한번 죽어주자고.”
이래 봬도 둘은 용사다.
악당이 인류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데, 비겁하게 도망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악당에게 무력하게 당하는 것 또한 용사의 본분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그놈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진 않을 거야.”
그러니 놈들이 원하는 대로 목숨을 걸 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부숴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
“용사답게 악당을 물리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