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51)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51화(251/273)
허공을 가로지르며 최현석은 기억을 돌이켰다.
‘어떻게 된 거지?’
교황의 머리를 향해 발차기를 날린 것까지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교황과 눈이 마주쳤고.
정신을 차려보니 대신전 지붕을 뚫고 날아가고 있었다.
‘몸이 욱신거리는 걸 보면 뭔가에 맞은 건데.’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플로모트를 사용한 대가로 뒤따르는 고통과는 느낌이 다르다.
무언가 강한 충격에 맞은 여파가 확실했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순간적으로 반응해서 나를 날려버린 건 확실해.’
명색이 교황이니 숨겨둔 한 수 정도는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설마 이 속도에 반응할 줄은 몰랐다.
최현석 본인조차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든 속도였는데.
“후우…”
허공에서 몸을 틀어 자세를 바로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그를 뒤따라 대신전을 빠져나온 교황이 보였다.
최현석은 그제야 교황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다.
새하얀 의복에 가려져 있지만, 드러난 피부만 봐도 교황이 깡마른 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달리기도 하기 힘들 것 같은 노쇠한 몸으로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는지 의문이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다가, 교황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용사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은 이미 한번 죽음 몸이지 않습니까? 원래라면 윤회하는 것이 섭리이거늘, 신이라는 작자의 꾐에 넘어가 이런 세계에 떨어지고 말았지요.”“뭐, 틀린 말은 아니네.”
교황은 용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듯했다.
최현석은 적당히 맞장구치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교황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니까.
굳이 대화를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최현석. 당신은 왜 싸웁니까?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교황이 물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잠시 고민하던 최현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용사니까. 너 같은 악당을 처치하고 세계를 구하는 게 용사의 일이거든.”“세계를 구원한다? 허울뿐인 명분입니다. 오직 용사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선전(propaganda)이나 다름없지요.”“무슨 말이야?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당신은 마왕을 처치했음에도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나 봅니다.”
교황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실망감이 묻어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최현석을 응시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진정한 구원. 영원한 평화. 그런 건 모두 허상입니다. 꿈같은 일이지요. 최현석. 당신은 진심으로 그런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낙원이 오리라 생각합니까?”
“그건…”
무언가 말하려던 최현석이 입을 닫았다.
반박하고 싶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다.
그만큼 교황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최근 최현석도 비슷한 주제로 계속 고민해왔기에 알고 있다.
‘그래. 엿 같은 세상이긴 하지.’
시작할 때만 해도 단순했다.
마왕은 절대악.
그러니 마왕을 처치하면 평화가 온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마왕이 죽어도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세상이 도래했을 뿐이다.
‘이 혼란은 단순히 마족을 박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것일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세상이 바뀌지 않은 건 여전히 마족이 있으니 그런 거다.
새로운 마왕이 나타나고 그를 따르는 마족이 존재하는 이상 평화는 오지 않는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선 모든 마족을 죽여야 한다.
최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초에 마족이 문제가 아니었어.’
장담할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마족이 아니다.
설령 대륙에서 모든 마족이 사라진다 한들,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마족이 있음으로써 인간 사이에 평화가 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교황과 가트렌이 무너지면 평화가 올까?’
그때 교황의 목소리가 최현석을 상념에서 꺼냈다.
“지금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내가 절대 악이라고.”
“…”
“내가 죽고, 가트렌과 데우시스 교가 무너진다 한들. 이 대륙에 평화가 올 것 같습니까?”
마치 최현석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최현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너를 처치해도 평화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아니, 오지 않을 거야. 시간이 흐르면 제2의 교황. 제3의 교황이 줄줄이 나올 테니. 원래 미친놈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는 법이니까.”“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최현석이 교황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만두고 돌아갈 생각은 없어.”“무의미한 싸움을 하겠다는 겁니까?”“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거지.”
“어리석군요.”
교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최현석도 딱히 공감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원래 용사는 이런 거야. 악당이 용사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그래서 더 어리석다는 겁니다. 어째서 앞서 길을 걸어간 자의 조언을 듣지 않겠다는 겁니까?”
“뭐…?”
“설마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겁니까?”
최현석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앞서 길을 걸어간 자라니.
그 말인즉슨.
“네가 용사라고…?”
교황 오르반 4세가 용사다.
그런 말이었다.
교황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물러났다.
“어리석은 자를 기다리는 건 허망한 죽음뿐입니다.”
“기다려!”
“어딜 가려고!”
교황을 쫓으려던 최현석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설 킨리 퓨셀과 그녀의 동료인 겔링과 아스문드.
가트렌 신성 제국의 전설 삼인방이 앞을 막아섰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도망가는 거지?’
최현석은 이해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보인 교황의 무력.
그것은 분명 어지간한 전설보다 위였다.
일격이라곤 하나, 전설의 신체 능력을 뛰어넘은 최현석이 플로모트까지 사용한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
‘지금 전설 트리오랑 힘을 합치면 어렵지 않게 나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도망친다? 분명 이유가 있어.’
어째서 교황은 도망치듯 떠나는가.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본인이 전투할 수 없는 상황인 거겠지.’
교황은 노쇠하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녔다 한들 저런 노구로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교황에게 지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
‘여기 트리오만 처리하면 교황까지 끝낼 수 있다.’
최현석이 눈을 빛냈다.
저 셋은 전설 중에서도 최고 수준.
게다가 수백 년간 함께하며 합을 맞췄다.
최현석의 신체 스펙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쉬이 승리를 장담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에 잡졸들도 몰려들기 시작했어. 저런 놈들이라도 뭉치면 골치 아프다.’
빠르게 모여드는 신성력이 느껴진다.
아마 사제와 성기사일 터.
최현석이기에 잡졸이라 표현하는 것이지 사실 하나하나가 최정예 병력이나 다름없다.
저런 이들이 뭉쳐 시너지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전설을 뛰어넘는 건 금방이다.
‘어떡하지? 계획대로라면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그럴수록 이쪽 전투는 불리해진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해서 싸우면 시간을 채우기 전에 체력이 바닥날 거야.’
온 힘을 다할 수도 없고.
적당히 힘을 뺄 수도 없다.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라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사님! 정신 차리세요!”
“어?”
“일단은 앞에 있는 트리오를 처리하는 데 집중해야죠!”
“아, 그렇지.”
라헬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이런 잡생각을 해도 될 정도로 눈앞의 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최현석이 자세를 다잡으며 킨리 퓨셀을 노려봤다.
***
“뒤를 맡기겠습니다. 킨리 퓨셀 경.”
교황이 물러나면서 말했다.
킨리 퓨셀은 가볍게 묵례하는 것으로 답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얼른 교황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와 함께하는 건 여러모로 거북했으니까.
하지만, 뒤를 맡기겠다는 교황은 떠나지 않고 계속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지껄였다.
“최현석은 지금 신체 강화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무리해서 처치하려 하지 말고 시간을 끄세요. 체력을 빼서 승리하는 게 더 쉬울 겁니다.”
“예.”
“절대 방심하지 말고 최대한 수비적으로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고 가진 것을 모두 활용하세요. 적이 압도적인 강자라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예.”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믿는다는 말과 달리 교황은 마지막까지 못 미더운 눈빛으로 킨리를 바라보다가 물러났다.
킨리 퓨셀은 사납게 웃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젠 아주 대놓고 무시해 주시는군. 그래.”
몇 번의 실패 이후.
킨리 퓨셀에 대한 교황의 신뢰는 바닥을 치는 듯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은 대체재가 없기에 계속 사용되는 것일 뿐.
만약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부속품이 있었다면 교황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자신을 갈아버렸을 것이다.
‘뭐, 차라리 잘 됐나. 현장 지휘 권한도 내려놓고 순수하게 부속품으로만 써주니 이쪽도 편하지.’
그 덕에 킨리 퓨셀은 작전 책임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언제부터인가 지휘는 교황이 임명한 총사령관이 담당한다.
킨리는 동료들과 함께 전설이라는 장기말로 사용되는 것에 그쳤다.
그 덕에 께름칙하던 용사 부대와도 합을 맞추게 됐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패배자는 군말하지 않고 따르는 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름 배려해준다고 그 정신 나간 놈들이랑 떨어뜨려 놨다는 건가.’
용사 육성 프로젝트.
킨리는 처음부터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계획을 알게 됐을 때부터 무언가 꺼림칙했는데, 실제 대상자를 만나니 그 거북함은 더욱 심해졌다.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하나같이 공허한 눈을 한 이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밖에 없다.
때문에 킨리는 작전을 지휘했을 때 의도적으로 용사 부대를 배제했었다.
‘지금쯤 그놈들은 수도 밖에서 싸우고 있을 테니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게 여기서 끝내야겠어.’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킨리가 해머를 꼬나쥐었다.
때마침 저쪽도 싸울 마음이 들었는지 자세를 잡는 게 보였다.
킨리가 사납게 웃었다.
“이제 술래잡기는 끝났다.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
“도망? 내가?”
최현석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노답 트리오를 상대로 왜 도망을 갈 리가 없지.”“노답 트리오? 그게 무슨 말이냐.”“병신 셋이란 뜻이야.”
“이놈이…!”
시답잖은 도발이라는 걸 알지만 저도 모르게 혈압이 올랐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신을 무시하기 바쁘다.
킨리가 씹어 내뱉듯 말했다.
“유언은 그게 끝이냐…”“아니. 생각해보면 너희는 전설이라는 말을 너무 아무한테나 갖다 붙이는 거 같아. 무게감이 없잖아. 무게감이. 이참에 내가 적당한 걸로 하나 만들어 줄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최현석이 입을 열었다.
“역시 노답 트리오가 잘 어울려. 아니면 개노답 삼 형제도 괜찮고.”“그 요사스러운 입을 찢어주마!”
킨리가 소리치며 허공을 박찼다.
정면으로 가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동료들이 양옆으로 산개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는 세 명의 전설.
그 목적지에 선 남자 최현석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역시 디스전은 유치한 게 짱이야.”
어쭙잖게 신경을 긁는 것보다 이런 저속한 도발이 효과 만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