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56)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56화(256/273)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습니다.”
교황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오랜만에 되찾은 힘과 젊음으로 인해 한껏 격앙된 상태였다.
“그냥 직접 나서서 다 없애버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내가 너무 고상한 방식을 고집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아… 하아…”
최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도를 찾았다.
‘이젠 체력도 마력도 없어.’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상황이다.
마력을 조금 회복했다고는 하나, 고작 그 정도로 교황을 위시한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뭐, 솔직히 처음부터 일대일로 붙었다 해도… 승산은 별로 없었지.’
교황은 정말 강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왜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설사 체력과 마력이 온전한 상태에서 싸웠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적이었다.
‘누님은 이제 서 있는 게 고작인 것 같고.’
최현석은 곁눈질로 박현아를 확인했다.
그녀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신이 피투성이.
지금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도 순전히 정신력의 영역일 것이다.
‘이렇게 끝인가…’
그동안의 모험, 살기 위해 발악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당연하게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겨우겨우 이야기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뭣 같은 새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신 차려! 누구 마음대로 새드 엔딩이냐. 아직 결판 안 났어.’
최현석이 이를 꽉 깨물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자신은 아직 싸울 수 있다.
더 한계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순간 교황이 말을 걸어왔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자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최현석. 모르시겠습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해요.”
교황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다 죽어가는 적을 상대로.
심지어 대군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싸운 놈이 저런 말을 지껄이니 화가 치민다.
하지만, 이건 좋은 징조였다.
경험상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한다는 건 자신의 승리를 100% 확신하는 때.
즉, 자만했을 때다.
최현석은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그래. 인정해. 교황님이 아주 잘나셨네. 그렇게 잘나신 분이 왜 지금까지는 숨어계셨을까.”“말해도 모를 겁니다. 백 년을 넘게 계획해온 원대한 꿈을 당신처럼 무지한 작자가 어찌 알겠습니까?”“이야기해 봐. 누가 알아? 그래도 같은 용사라고 쥐꼬리만 한 공감대가 형성될지.”“같은 용사…? 당신 같은 망나니와 내가 같은 용사라고요…?”
교황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무너져 내린다.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최현석을 바라봤다.
“최현석. 당신이 이 땅에 온 지 고작 2년 정도 지났나요? 세상 참 불공평합니다.”
교황의 눈동자에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기, 질투, 분노, 원망, 회의감.
최현석을 볼 때면, 교황은 여태껏 해왔던 노력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힘을 쌓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교황은 그토록 힘겹게, 오랫동안 쌓은 힘도 봉인했다.
신분을 속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해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 수십 년째 연기를 이어가기까지.
그가 한 노력은 정말 피가 흐르는 것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
무수히 많은 이들의 피로 점철된 노력이었다.
“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
교황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광기에 번뜩이는 눈동자는 더 이상 최현석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죽였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회상하고 있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압니까!?”“미친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모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이건 내가 선택할 길이니 감수해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교황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과거를 보고 있지 않았다.
타오르는 분노와 함께 눈앞의 최현석을 바라볼 뿐이다.
“당신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어요. 내 노력이. 이 땅에서 백 년 넘게 공들인 내 피땀으로 만든 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이겁니다!”“아, 내가 잘못했네.”
최현석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이 잘못입니다! 잘 아는군요. 그런데 왜….”
지껄이는 교황을 내버려 두고 최현석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하다.’
어차피 적은 대신전이 공격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지원을 하였다.
이제 와서 더 교황을 붙잡고 있겠다고 해서 대신전의 공략 확률이 올라가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젠 탈출을 생각해야 한다.
다행히 교황이 열변을 토하는 동안 대략적인 계획은 세워 두었다.
최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박현아를 불렀다.
“누님.”
“왜.”
“아무리 생각해도 둘 다 살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뭔 소리야.”“이번에는 그냥 제 뜻에 따라주십쇼.”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 교황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내 말을 듣고 있는 겁니까!?”
최현석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시간을 벌겠습니다. 누님이라도 튀십쇼.”“지랄하네. 되지도 않는 가오 부리지 마라.”“무시하지 말란 말입니다!!!”
교황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최현석의 몸에서 마력이 폭사된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
다가가던 교황은 다급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
끔찍한 고통이 밀려온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눈에는 하얀 흰자위밖에 남지 않았다.
플로모트 3단계 – 낙화였다.
‘길어야 10초 정도 버티려나.’
이미 체력과 마력이 바닥이다.
아무리 개량을 통해 안정성을 올린 플로모트라 할지라도 10초를 유지하는 게 고작.
최현석은 곧장 박현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너 지금 뭐하는…!”
“갑니다!”
그녀의 품에 마지막 남은 포션을 밀어 넣고는 온 힘을 다해 집어 던진다.
파아앙-!
박현아가 대포알처럼 쏘아지며 대기를 갈랐다.
‘아까 대신전을 지원하러 가면서 결계는 사라졌다. 거리만 벌리면 분명 도망칠 수 있어.’
이제 이곳에 제대로 된 결계를 칠 수 있는 인력은 남지 않았다.
추적을 할 수 있는 전설도 없다.
오직 교황. 교황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박현아는 살 수 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교황이 성난 얼굴을 하며 달려왔다.
최현석도 피하지 않고 마주 달려 나갔다.
‘2초.’
박현아를 날렸으니,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교황을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그깟 플로모트를 썼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최현석은 달려 나간 속도 그대로 교황을 들이받았다.
무언가 공격을 하리라 예상했던 교황은 갑작스런 몸통 박치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큭! 이건 무슨 수작입니까!”
최현석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교황을 밀어냈다.
쐐애애애액-!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엄청난 속도로 교황을 밀어붙여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날아간다.
‘6초.’
박현아를 날리고, 교황을 밀어버리는 데 걸린 시간 6초.
앞으로 몇 초 후면 플로모트도 끝이다.
당황하던 교황은 그제야 최현석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딴 게 통할 성싶습니까!? 당신들은 이 자리에서 죽습니다! 아무도 살아나갈 수 없단 말입니다!”
교황이 최현석을 향해 방대한 마력을 방출했다.
마력에 직접 물리력을 부여해 타격하는 것이다.
파앙-! 팡-!
큰 충격에 최현석의 몸이 들썩였다.
그러나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9초…’
어느새 최현석과 교황은 수도 그라티암 안으로 진입해 있었다.
최현석은 도시 안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콰앙-! 쾅! 쾅! 쾅!
일직선상의 모든 것을 관통하면서, 최현석은 도심을 가로질렀다.
그가 달려간 길을 따라 굉음과 함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11초…’
이제 정말 한계.
아니, 한계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한계 따위는 플로모트를 시작하면서 넘어 버린 지 오래다.
최현석은 지금 마지막 생명의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조금만 더…!’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교황을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박현아가 살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
14초. 15초.
예상했던 시간을 넘어서 최현석은 계속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교황의 공격이 날아들었으나, 맷집으로 버텨내면서 교황을 밀어내는 데만 집중했다.
‘18초… 더는…’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려는 순간.
최현석의 의식이 끊어졌다.
***
“당신 뭡니까…?”
교황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신을 잃은 건지, 죽은 건지.
최현석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 본인의 목숨을 걸고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미 전투로 지쳐있던 상황이다.
그대로 계속 싸웠다면 최현석과 박현아 둘 다 죽고 말았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최현석은 나름대로 최고의 수를 뒀다.
박현아를 살리는 것.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사는 게 나았으니, 훌륭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마지막의 플로모트…’
최현석이 쓴 투기가 플로모트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사용하기 어렵다고 정평이 난 플로모트에서도 가장 높은 3단계.
교황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대단한 힘이었다.
만약 최현석이 플로모트 3단계를 장시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서 싸웠다면 아무리 교황이라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교황의 눈에 이채가 띤 것은 그때였다.
“음? 살아있었습니까?”
아주 미약하지만,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이 다가가니 끊어질 듯 위태롭게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질긴 목숨입니다… 꼭 신의 가호라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플로모트 사용 도중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계 이상으로 운용한 이후 반작용이 찾아왔음에도 살아남다니.
질긴 생명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의 짧은 인연은 여기까지군요.”
교황이 한발 물러났다.
이대로면 내버려 두면 얼마 가지 않아 죽겠지만, 지금 당장 자신의 눈으로 최현석의 최후를 보고 싶었다.
“멍청한 자.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따랐으면 함께 이 대륙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거늘.”
교황이 조금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리면서 지팡이를 들었다.
“명심하세요. 멍청함도 죄입니다.”
지팡이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그것이 최현석에게 닿기 직전.
쐐애애애액-! 콰앙!
하늘에서 검은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크윽!”
일순간 흙먼지에 시야가 가려지고.
피부를 저릿하게 하는 마기가 느껴져 교황은 본능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가 날리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고혹적인 외모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의 품에는 최현석이 안겨 있었다.
“안녕?”
여성이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든다.
교황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괴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