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5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57화(257/273)
헤미스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일었다.
교황이 이런 젊은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 힘.
빈말로도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과거라면 모를까, 약해진 지금의 자신이라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괴식가… 오랜만이군요.”
교황이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그 말투가 마치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어머, 나를 알고 있니?”
지금 교황이 선출된 건 수십 년 전.
헤미스는 대략 백 년 전을 마지막으로 흑색 거성에 박혀 인간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당연히 접점이 없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알 거 없습니다. 그보다 품에 든 그것. 내놓으시지요.”
“싫은데~?”
“아무리 당신이라 한들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것도 약해진 당신이?”
교황에게서 위협적인 마력이 흘러나왔다.
강대한 신성력과 어우러지는 마력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순간 헤미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띠었다.
“흐응~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그녀는 교황과 똑같은 마력을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너 최후의 용사라 불리던 놈이구나?”
최후의 용사.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전대 마왕 테그라드에게 마지막으로 도전한 용사.
당시 그녀가 직접 나서서 마왕성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줬었다.
강한 인간과의 싸움으로 테그라드가 경각심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단순하게 마왕님이 이긴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뒷거래가 있었나 보네?’
최후의 용사와 마왕.
둘의 전투는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돼서 아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마왕이나 교황이나 엉큼한 인물들이기에 대화가 잘 통했던 것 같았다.
“그때 그 용사가 이렇게 교황 행세를 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니?”“늙은 괴물의 대화 상대를 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순순히 최현석을 내놓으시지요.”
“싫어.”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까지 기괴하게 찢어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교황이 움직이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하아암~”
헤미스가 삽시간에 최현석을 삼켜버렸다.
‘죽은 건가?’ -라고 생각하던 교황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방금 그것은 ‘식사’가 아닌 ‘보관’에 가까웠다.
설령 방금 행위가 식사였다고 해도, 최현석의 죽음을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절대 못 보낸다.
지금 죽이지 못한다면 최현석은 또 성장해서 돌아올 것이다.
저 괴물 같은 성장 속도.
머지않아 자신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최현석은 죽었습니까?”
“글쎄~?”
교황의 눈이 한층 더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 배를 갈라서 확인할 수밖에 없겠군요.”“오호호호! 누가 누구 배를 가른다는 거니? 재미있어~”“못할 것 같습니까!?”
교황의 신형이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공간이동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
헤미스는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라 회피했다.
“최현석을 두고 가면 목숨은 살려드리겠습니다!”
“흐응~ 싫은데~?”
“그럼 여기서 죽으십시오!”
교황에게서 마력이 폭사된다.
공기의 떨림과 함께 그 앞에 방대한 마력이 모이더니, 이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초고온의 플라스마.
그 어떤 물질이든 닿는 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담은 마법이었다.
게다가 자유자재로 움직이기에 피하는 것도 무리.
그때 헤미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콰아아아-!
거대한 입 안으로 플라스마가 빨려 들어간다.
교황은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마력을 방출했으나, 헤미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퓌쉬시…
이내 마법이 완전히 사라지고.
작게 트림을 한 헤미스가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머, 실례.”
교황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번 공격은 탐색전.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상대는 대륙을 떨게 했던 괴식가다.
고작 마법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전투는 이제 시작입니다!”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헤미스의 능력이 불가사의하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괴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마족. 신성력에 취약하다.’
이곳에 성녀나 신의 은총 기사단이 없다는 게 아쉬웠으나, 문제 될 건 없다.
이곳에는 무수히 많은 사제가 있었기에.
“교황으로서 명합니다! 당장 신성력을 방출해 괴식가를 압박하세요!”
교황의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연계 마법을 사용해 결계를 펼치면 훨씬 더 효과가 좋겠지만, 지금은 무리다.
대신 궁여지책으로 신성력 방출을 명한 것이다.
화아아아-!
전장에 있던 사제들이 신성력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막무가내 뱉어내는 불과한 이 행동도 일만에 달하는 사제가 함께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것만으로도 전장에 신성력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이는 괴식가에게 확실한 압박을 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괴식가의 입이 다시 벌어지기 전까진.
쩌어어어어억-!
벌어진 입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왔다.
교황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공격일 줄 알았건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수히 많은 마족이었다.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을 뵙습니다.”
20명 정도 되는 마족.
모두 헤미스에게 충성을 바친 권속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영웅 최상급에서 준전설에 달하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무력은 가진 마기의 양으로 측정된 것일 뿐.
이들의 진짜 무서움은 오랜 시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얻은 풍부한 경험과 전투 실력이었다.
“지금 역겨운 기운을 흘리는 놈들 보이지? 쓸어버려.”
“명을 받듭니다.”
20명의 마족이 지상에 내려가고.
학살이 시작됐다.
“끄아아아아!”
“이놈들은 뭐야!?”
“막아! 사제들은 뒤로 빠져!”“성기사! 성기사를 불러와!”
사실 헤미스의 권속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가트렌의 정예병 10만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최정예 기사단과 전설, 지휘관이 대거 빠진 상황.
진형은 진작 무너져 있었고, 워낙 많은 숫자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됐다.
“흐응~ 시간이나 벌려고 보낸 건데, 잘하면 3분의 1은 쓸어버릴 수 있겠어?”
헤미스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얼른 가봐야 하는 거 아니니?”
교황이 나서면 피해가 커지기 전에 저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헤미스는 반드시 도망친다.
“이익…!”
“우유부단한 남자는 별로인데~ 내가 좀 도와줄까?”
헤미스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하늘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그 틈으로 마기 다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
강렬에 마기에 맞은 병사들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비명이 난무하고, 사상자의 숫자가 단숨에 천 단위를 넘어간다.
아무리 정예라 한들.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면 헤미스에겐 길가의 벌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건 교황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저 벌레들이 죽든 말든! 내가 신경 쓸 것 같나!?”
병사를 지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교황은 곧장 헤미스에게 날아들었다.
“괴식가! 너는 절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하아, 그거 아니?”
헤미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몸에서 끈적한 마기가 흘러나와 검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구질구질한 남자도 별로야.”
이 질척대는 남자를 떨어뜨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듯했다.
***
“끄으윽…!”
“여기 위급 환자다! 사제! 사제는 어디 있나!?”“지금 위급한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주,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참혹했던 전투가 끝났다.
전장에 가득했던 함성과 비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상자의 신음이 대신했다.
“피해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겠군요.”
최현석과 박현아에 이어 헤미스까지.
총 한나절 정도 이어진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4만이 넘는다.
중상자까지 합치면 피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대신전을 지키느라 많은 병력이 당했으니, 가트렌 전체로 보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터였다.
그들 모두가 일반 병사가 아닌, 정예병, 사제, 성기사였다는 게 더욱더 뼈아프다.
“박현아는 잡았습니까?”“죄송합니다. 드라센의 방해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수많은 정예병, 사제, 성기사, 영웅, 전설이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데우시스 교의 교세가 빠르게 줄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피해를 입다니.
여기서 최현석과 박현아를 모두 죽여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런데 둘 다 놓치고 말았다.
박현아는 드라센의 원호로 무사히 대피했고.
최현석은 헤미스와 함께 사라져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교황이 주먹을 꽉 쥐었다.
‘괴식가…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
예상한 대로 헤미스는 강했다.
약해진 상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패배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싸웠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헤미스는 이 자리에서 끝을 볼 생각이 아니었다.
계속 혼란을 가중하면서 적당히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그녀는 단숨에 도주했다.
이미 결계와 공간이동을 막는 역장이 모두 사라진 상태라 그녀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대신전은 어떻게 됐습니까?”“다행히 4개가 부서지는 선에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냥개 단장, 쿠안 오브리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교황은 눈을 감았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
오늘 전투로 가트렌은 치명상을 입었다.
이만한 피해를 복구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가늠할 수 없다.
아니, 이제 곧 드라센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됐으니 복구는 무리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적을 맞이하게 됐다.
승산은 5대5 정도.
그것도 자신이 직접 두 발로 뛴다는 가정 하에서의 승산이다.
여기서 만약 최현석과 박현아가 회복해서 참전한다면 전세는 단숨에 1대9로 기울어진다.
사실상 패배는 확정된 미래였다.
신성 제국 가트렌.
데우시스 교는 이제 끝이다.
“허허…”
교황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을 위한 백 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동안 노력했다.
매 순간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흘렸던 피를 모으면 강을 이룰 것이다.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교황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다시 시작해서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한들.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슴을 가득 채웠던 열정과 의지는 너무 오랜 시간 타오른 탓에 새까만 재만 남았다.
불을 지피고 싶어도 더는 태울 게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서 끝을 봐야겠습니다.”
교황이 쿠안 오브리엘을 바라봤다.
“쿠안 오브리엘 경.”
“예.”
“제국의 헌신을 발동하세요.”
쿠안 오브리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성하. 그건….”“지금 시기를 놓치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트렌은 무너질 겁니다.”
쿠안 오브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로 벌벌 떨었다.
아무리 신성 제국의 그림자에서 오물을 치우던 그라 해도 제국의 헌신은 함부로 발동할 수 없었다.
수백만. 어쩌면 수천만이 죽을지도 모르는 세계의 멸망 버튼을 그 어느 누가 쉽게 누를 수 있을까.
“경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 내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지요.”
교황이 쿠안 오브리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명령은 내가 내리고. 모든 책임과 업보 또한 내가 지고 갑니다.”
쿠안 오브리엘은 눈동자로 교황을 바라봤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젊은 교황.
그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가 새하얗게 타들어 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 말. 이해했습니까?”
쿠안 오브리엘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