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62)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62화(262/273)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최현석이 한때 사랑했던 여자!
이엔 넬 체르시!
짧은 만남이었지만, 워낙 강렬했던 시간이라 지금도 기억에 선명했다.
‘마지막에 형제랑 귀족이 단체로 죽어버려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잘 이겨냈나 보네.’
당시 최현석과 사라 던피는 체르시 왕국 국왕의 요청으로 내란에 개입했었다.
사건이 끝난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었기에 어떻게 됐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상황.
최현석은 그저 이엔이 역경을 딛고 일어나 훌륭한 국왕이 됐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이엔은 과거에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묘하게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
감정이 없는 듯한 공허한 눈.
레이드런의 살기를 코앞에서 받아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방금도 자신이 몇 초만 늦었다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때 들려온 레이드런의 목소리가 최현석을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최현석! 여긴 어쩐 일인가?”“아, 시드리엘한테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선약이 있었네요.”“여기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무례한 자이니.”
약속도 없이 찾아온 건 최현석도 마찬가지였지만, 레이드런은 그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나눠봐도 되겠습니까? 뭔가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레이드런 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대륙 정세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이기도 하고.”“으음… 그렇긴 하지.”
레이드런의 허락을 받은 최현석은 곧장 이엔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누구시죠?”
이엔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최현석을 바라봤다.
그제야 최현석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땐 이 모습이 아니었지.’
이엔이 최현석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당시 최현석은 드라센 제국의 마법으로 외형을 바꾸고 가짜 신분을 만들어 체르시 왕국에 갔었으니까.
최현석은 그 당시 자신이 썼던 이름을 떠올렸다.
“듀갈 폴킬이라면 기억하시겠습니까?”
“듀갈 폴킬…”
죽어있던 이엔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 깃들었다.
약간의 놀람, 반가움, 서글픔 등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서 소용돌이치기도 잠시.
그녀는 곧장 원래의 공허한 눈으로 돌아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신분이라 예상은 했는데, 원래는 이런 모습이셨군요.”“죄송합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겼어야 했어서. 하하.”
최현석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않아요. 그보다 최현석… 경인가요?”“예. 최현석 맞습니다.”“최현석 경은 어째서 이곳에 온 거죠?”“마왕 시드리엘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제가 마족이랑 친분이 좀 있거든요. 아마 이엔 씨도 저랑 같은 이유로 오신 것 같은데, 아닙니까?”
“맞아요.”
이엔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계획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최현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막연히 지원만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이엔 씨 계획이 더 구체적이고 좋아 보이네요.”“저기 있는 붉은 악몽이 막고 있어서 마왕을 만날 수 없었어요. 최현석 경께서 도와주신다면 제가 마왕을 설득할게요.”
“좋습니다.”
최현석은 곧바로 레이드런에게 다가갔다.
“레이드런 님. 여기 있는 이엔과 같이 시드리엘을 만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으음…”
“마족의 미래와도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좋다. 대신 나도 함께 가도록 하지.”
이엔이 혼자 왔을 때와 달리 만남은 너무나도 쉽게 성사됐다.
그 상황에 억울할 법도 했건만, 이엔은 말없이 두 남자의 뒤를 따라 걸어갈 뿐이었다.
***
시드리엘은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았다만, 설마 이런 지경일 줄이야…’
갑작스레 땅이 흔들리고 대기 중의 신성력 밀도가 증가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마족에게는 제법 큰 타격이었다.
강한 신성력에 노출된 몇몇 마족들이 앓아누웠으니까.
물론, 이것은 힘이 약한 마족들의 이야기이고, 마족은 약자를 취급하지 않으니 큰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 대륙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찾아온 최현석과 인간의 국왕이 한 이야기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이제 끝이군.”“네. 멸망은 예정된 미래죠.”
이엔은 쉽게 수긍했다.
애초에 그녀조차도 인간은 끝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누가 광신도 무리를 막을 수 있을까?
드라센 제국이 유일한 희망이긴 하나,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저 다른 왕국보다 조금 더 버티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마족은 어떨까요? 과연 그 광신도 무리가 인간을 멸망시키고 나면 멈출까요?”“마족은 네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광신도 무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죠.”
이엔과 시드리엘이 서로를 응시했다.
한동안 둘의 시선이 부딪히다가 시드리엘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필요하군. 잠시 레이드런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다.”
“알겠어요.”
“최현석. 미안하지만 너도 자리를 비워 주겠나.”
“그러지. 뭐.”
이엔과 최현석은 순순히 방을 나갔다.
이건 마족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이고, 인간인 그들은 어쨌거나 도움을 구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쓸데없이 질척거려 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다.
쿵-!
최현석이 이엔이 문을 닫고.
시드리엘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생각하나?”
레이드런도 그녀의 옆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명석한 자이니 분명 좋은 의견을 내줄 것이다.
“으음, 다른 군단장과 대의원들의 의견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나는 순수하게 그대의 생각을 물은 것이다.”“그러시다면… 저는 전폭적으로 도와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 국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다음 목표가 마족이 되는 순간 우리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상대는 그냥 광신도가 아니다.
빵빵한 신성력 버프를 받는 미친 스펙을 지닌 광신도다.
마족과는 여러모로 상성이 좋지 않았다.
따로 싸워서 각개격파 당할 바엔 인간과 힘을 합쳐 싸우는 게 더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마족들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습니다. 인간과의 공동 전선이라니. 분명 반발하는 대의원이 나올 겁니다.”
과거 도리투그스를 따르던 명문 가문들은 99% 확률로 인간과의 연합을 반대할 것이다.
그들을 제외하더라도, 인간과의 연합을 반대할 자들은 차고 넘쳤다.
인간과 했던 평화 조약조차 엄청난 잡음이 발생했었는데, 공동 전선이라니.
입에 게거품을 물며 달려들 고위 마족이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 트럭이다.
시드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생각은 같다. 지금 나는 아직 어리고, 내 아버지만큼 확실한 왕권을 확립하지 못했지. 여전히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는 많고 결정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나올 거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단을 내리는 건 더 쉬웠다.
“그러니 나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고자 한다.”“이용이라 하심은…?”“우리는 인간을 돕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싸우는 것이지. 그리고 그 선봉에는 평화 조약을 반대했으며 나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설 것이다.”
“아!”
레이드런이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인간과 힘을 합치는 게 아니다.
광신도 또한 인간.
그들과 싸우기 위해 마족은 움직일 것이고.
그러면 과거 시드리엘의 평화 조약에 반발했던 마족들도 모두 수긍하며 따를 것이다.
선봉에 서라는 말에도 불만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반길지도 몰랐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최대한 이용해 주는 게 도리.”
시드리엘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기존의 마족과는 달랐다.
더 지능적이며 인간만큼이나 영악하다.
전대 마왕 테그라드가 원했던 대로.
이것이 마족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
드라센 제국의 사령부.
각지에서 오는 보고서와 실시간으로 밀려드는 정보를 규합해 미래를 계획하는 장소.
이곳을 인체에 비유하자면 두뇌와 같았다.
“제국 북동부 국경 지역에서 수천의 광신도 무리가 발견됐습니다!”“인근 마을에 대피 상황은?”“대피령을 내렸습니다만, 피난민이랑 뒤섞여서 늦어지고 있습니다!”“가까운 마법 병단 연락해서 시간 끌어!”
제국의 엘리트들은 오늘도 영혼이 새하얗게 타오를 만큼 스스로를 갈아 넣어 제국의 팔다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끔 만든다.
그것은 사령관인 올라벤 그리미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으음…”
올라벤 그리미어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눈을 감아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지막으로 푹 쉬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아마 반년은 넘었지 않았을까.
“많이 피곤해 보이네.”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씨익 웃고 있는 박현아가 보였다.
올라벤 그리미어가 반색하며 그녀를 반겼다.
“오, 박현아 경! 몸은 좀 어떤가?”“덕분에 그럭저럭 회복됐어.”
제국의 헌신이 발동된 그 날.
도망치던 박현아는 드라센 제국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적을 따돌린 후, 그녀는 이곳 드락셀로 이송됐다.
그녀의 상태가 워낙 위중했기에 치료 전문 마법사가 대거 달라붙어 회복에 전념하기를 며칠.
마침내 몸을 완전히 회복한 그녀가 이곳 사령부를 방문한 것이었다.
“상황은 어때?”
“빈말로도 좋다고는 못하겠군.”
올라벤 그리미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 전을 기점으로 아그로스 왕국과의 연결이 끊어졌소.”“뱃놈들도 끝난 건가…”“예견된 미래였지.”
인근의 국가가 모두 무너진 상황.
홀로 버티던 아그로스 왕국의 멸망은 예정된 일이었다.
다만, 아그로스 왕국은 주력이 해군인 만큼 살아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전부터 군함, 어선, 무역선을 가리지 않고 동원해서 남쪽으로 사람을 옮기고 있긴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군.”
성공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 봤자 왕국민의 30%도 안 되겠지만.
모두 죽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살아남는 게 낫다.
“아무튼, 뱃놈들이 끝났으면 다음은 여기네.”“도미스와 펜텐도 있긴 하네만, 곧장 드라센으로 올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고 있소.”
“얼마나 걸려?”
“대략 열흘 전후. 길어도 2주 안으로 놈들이 국경 지대에 도달하리라 생각하고 있소.”
예상치 못한 기간에 박현아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적의 본대는 아그로스를 공격하기 위해 대륙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거기서 드라센의 국경지대까지 도달하려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아무리 기동력이 좋은 군대라 할지라도 도보로 이동하려면 3개월은 잡아야 하는 거리.
그런데 길어야 2주라니.
차이가 너무 극심했다.
“놈들은 인간이 아니오. 무언가를 먹을 필요도 없고, 휴식도 취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잠조차 자지 않소. 오직 미친 듯이 웃으며 날뛰기만 할 뿐이지.”
“…”
“솔직히 열흘이 걸릴지도 의문이오. 모든 광신도가 모여 이동하는 게 아니라 순차적으로 움직인다면 1주일 안에 대규모 무리가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소.”
박현아가 혀를 찼다.
아직 그녀는 광신도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에 모르고 있었다.
광신도가 이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췄는지.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데. 그만한 스펙의 괴물이 몇천만이라니. 어떻게 막아?”“패배를 부정하지 않겠소만,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오. 드라센 제국은 마지막까지 싸운다. 그게 황제 폐하의 의지요.”“그거 여기 있는 놈들도 다 아는 거야?”“적어도 이 사령부의 인원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박현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열심히 무언가를 작성하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 기분이 묘해진 박현아가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입안이 쓰다.
“쳇…”
“박현아 경은 충분히 할 만큼 했소. 이후로 뭘 하든 우리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뜻대로 하시오.”“누가 도망친다고…!”
통신구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올라벤 그리미어는 다급히 통신구를 확인하며 박현아의 말을 끊었다.
“잠시. 중요한 연락이오.”
활성화하자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그때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고 싶은데요.
체르시 왕국의 국왕, 이엔 넬 체르시였다.
이전에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던 그녀가 다시 연락을 해온 것이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그럼 지금 그쪽으로 갈게요.
“예? 여기를 말입니까?”
올라벤 그리미어가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물었다.
대답은 통신구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의 사령부. 듣던 대로 대단하네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엔 넬 체르시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가 서 있었다.
“최현석 경!”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최현석.
그가 이엔 넬 체르시와 함께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