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63)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63화(263/273)
올라벤 그리미어는 깜짝 놀랐다.
어지간해선 평정을 유지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최현석 경! 어, 어떻게 여기를…, 아니. 그보다 살아 있었….”
최현석을 본 놀람에 소리치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사령부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간 여성 때문에.
“야이, 미친 새끼야아아!!!”
박현아가 미친 듯이 질주하더니 그대로 점프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쿠웅-!
단숨에 벽에 처박힌 최현석은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누, 누님. 왜 그러십니까?”“왜 그러십니까!? 시발! 그걸 몰라서 물어!?”
박현아는 날아 차기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연신 주먹을 휘둘렀다.
최현석은 주먹을 하나하나 막으면서 저항했다.
“아, 아픕니다! 그만 하십쇼!”“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아니, 그냥 뒤져! 너 같은 새끼는 뒤져야 해!”“너무한 거 아닙니까!? 내가 누님 살리려고 얼마나 개고생했는데!”“누가 살려달래!? 너한테 구해달라 했냐고…! 야이 개새끼야… 나는… 나는 진짜…”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르던 박현아가 서서히 멈추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들썩이는 어깨가 그녀의 심정을 말해주었다.
“또 그러면 진짜…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알겠냐?”
최현석은 말없이 박현아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박현아가 다시 말했다.
“대답해… 알겠냐고…!”
“누님. 우십니까?”
“울긴 누가 울어!”
박현아가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무방비하게 복부를 맞은 최현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커헉! 마, 마력을 실어서 때리면 어떡합니까!?”
예고도 없이 날아온 전력 펀치에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엄살이 아니라 진심이다.
“됐고!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
박현아는 쌩 하고 돌아서더니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라헬이 씨익 웃었다.
“용사님. 운 것 같죠?”
“울었네.”
“울었어요! 울보래요! 히힛.”
용사와 전담 요정이 낄낄거리는 소리에 박현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 울었다고 이 새끼들아!”
***
잠깐의 소란 이후.
다시 모인 일행은 마족의 합류에 관해 이야기하고, 더불어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의논했다.
“그렇군. 마족은 이번 사건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을 테니. 아직 전력이 온전하겠어.”
이엔과 최현석이 마왕의 협력을 얻어냈다는 대목에서 올라벤 그리미어는 크게 감탄했다.
드라센 제국에 있는 무수히 많은 엘리트.
그중 누구도 마족에게 손을 뻗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마족은 수백 년간 싸워온 적이었으니.
평화 협정을 맺었다 한들, 고정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족의 본대가 이곳 드락셀까지 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2주가 걸린다고 했어요.”“2주라… 너무 늦습니다.”
적의 이동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2주.
버티려면 버틸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피해가 너무 커진다.
“제국 북부 지역은 초토화될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상상도 할 수 없다.
최소 천만 단위의 사람이 희생될 게 분명하다.
이엔 넬 체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작전이 있어요.”“묘안이 있으십니까?”“성을 모두 버리고 북부 지역을 텅 비우세요.”
“예…?”
“제국 북부 전역에 대피령을 내리고 이곳 수도 드락셀을 처음이자 마지막 보루로 정합니다.”
올라벤 그리미어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설명했다.
“폐하. 그만한 규모의 피난은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북부를 비우면 적의 진격이 더 빨라질 겁니다.”
방어를 포기하고 모두 도망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계획이다.
피난민의 속도는 적의 속도에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
적이 500km 이동할 때 피난민은 50km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거리를 계산하면 지금 당장 피난을 시작한다 쳐도 드락셀에 오기 전에 뒤가 잡힐 게 분명했다.
공간 이동 게이트를 총동원해도 무리다.
수천만 단위의 사람이 이동하기엔 마력이 턱없이 부족할 테니.
“피난민 도중 광신도가 덮쳐올 거고, 그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희생으로 마무리될 겁니다.”
피난 도중 뒤를 잡히면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성에 박혀 있으면 죽겠지만, 적어도 시간이라도 끌 수 있다.
하지만, 허허벌판에서 적에게 뒤를 잡혀 죽으면 그건 그냥 개죽음이다.
“선발대를 보내서 전의 진군을 늦춰야죠. 이건 마족
측에서도 협조하기로 한 부분이에요.”“적의 진격을 늦추는 게 목적이라면 수성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수성을 하면. 적이 공성전을 해준다는 보장은 있나요?”
“그건…”
“적은 인간이 아니에요. 살육에 미친 광신도 집단이죠.”
적을 인간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
그들은 땅이나 금품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저 더 많은 인간을 죽이는 것.
그렇기에 광신도에게 성과 요새는 매력적인 사냥감이 아니다.
“적이 병사가 모인 주요 성을 지나쳐서 후방으로 이동하면 그때야말로 대참사가 일어날 거예요.”
병력을 분산시킨 대가는 불 보듯 뻔했다.
사람들은 말라 죽어가다가 약한 곳부터 차례차례 격파당할 것이다.
그럼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대륙이 광신도 손에 넘어가게 된다.
“어차피 정공법으론 승산이 없어요. 그러니 도박이라도 해야죠.”
“허어…”
올라벤 그리미어가 고뇌에 빠졌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발상이다.
광활한 대륙 북부를 모조리 버리고, 천만 단위의 피난민을 옮기겠다니.
적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자살 특공대를 보낸다는 것도 그렇고.
정상적인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만한 작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올라벤 그리미어는 설득됐다.
이엔의 말은 허황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가장 훌륭한 계획임은 틀림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
그날 저녁, 황제의 승낙이 떨어졌다.
그리고 대규모 피난이 시작됐다.
드라센 제국의 북부.
정확히는 수도 드락셀을 중심으로 북동쪽(가트렌이 있는 방향)에 거주하는 사람이 모두 이동하는 초대규모 피난이다.
드라센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은 국가이다.
거기에 더불어 대륙 전역에서 모여든 피난민까지 합세해서 이동하는 사람의 숫자만 오천만이 넘어간다고 한다.
“용사님. 사람들이 제때 피난할 수 있을까요?”“가능하도록 우리가 만들어야지.”
라헬의 물음에 최현석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그는 적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한 특별 부대로 편성됐다.
전원이 전설급 강자로 이뤄진 부대.
멤버는 여섯이었다.
최현석과 박현아.
드라센 제국의 전설 둘.
도미스 왕국의 전설 하나.
그리고 재야에 숨어 있던, 무소속의 전설까지.
원래는 더 많은 전설이 모일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미 광신도에게 당한 건지 이후로 부대를 찾는 전설은 없었다.
아무튼, 이들 여섯이 주축으로 움직이고 후방에서 드라센 제국의 마법 병단이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던 도중.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부대에 합류했다.
“킨리 퓨셀.”
신성 제국 가트렌의 전설 삼인방 중 하나인 킨리 퓨셀.
그녀가 드락셀을 찾아온 것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빌려고?”
박현아가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킨리 퓨셀은 가트렌의 핵심 인물이다.
과연 그녀가 제국의 헌신에 대해 몰랐을까.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제 와서 광신도 무리를 막겠다고 나서는 모양새가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킨리 퓨셀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계획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 제국의 신민을 모두 군인으로 바꾸는 최후의 계획이라 들었지.”“그래서. 너는 자세히 몰랐으니 잘못이 없다. 뭐 이딴 개소리를 하러 여기까지 행차하셨나?”
킨리 퓨셀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강하게 쥐고 있었다.
“면죄부를 받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다만… 복수를 원한다.”
복수.
킨리 퓨셀은 복수하고 싶었다.
죽어간 그녀의 동료를 위해서.
이성을 잃고 광신도가 된 그녀의 후손들을 위해서.
“너희가 죽인 아스문드. 그 자식은 전장에서 죽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거니 그놈도 후회는 없을 거야. 우리 같은 놈들에겐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전설 삼인방 중 하나인 아스문드.
그는 그라티암에서 최현석과 박현아에게 죽임을 당했다.
킨리 퓨셀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분노했으나, 거기서 끝이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싸웠으니까.
언제고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게 맞았고.
패배의 결과에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겔링은 달랐다… 그놈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광신도 무리에 파묻혀서 죽었어…”
겔링 무스탄.
킨리는 아직도 그가 죽던 때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라티암의 신민이 한순간에 광신도로 변해버린 그 날.
킨리는 다급히 도망쳤으나, 겔링은 광신도 무리에 붙잡히고 말았다.
“겔링! 뭐하는 거야! 빨리 투기든 마법이든 써서 빠져나와!”“이, 이 사람들은 제국의 신민이다! 다치게 할 순 없어…!”“정신 차려! 이놈들은 전부 미쳐버렸어! 사람이 아니라고!”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일지도 모르는 광신도 무리에 파묻힌 채로 죽음을 맞이한 겔링 무스탄.
그는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않았다.
킨리는 보았다.
가장 먼저 겔링에게 달려든 것은 평소 그가 귀여워하던 후손, 어린 소녀였다는 것을.
사실 그는 저항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신도의 특성상 죽여야만 떨쳐낼 수 있었으니까.
그는 차마 자신의 후손을, 그것도 어린 소녀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뒤를 부탁, 한다… 킨리.”
그렇게 수백 년을 함께한 동료 겔링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조국의 사람들에 의해.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킨리 퓨셀은 몸이 뜨거워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몰랐다고 변명하지 않겠다… 너희와 함께한다고, 이제 와서 교황과 맞선다고 해서 속죄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킨리 퓨셀이 무릎을 꿇었다.
“부탁이다. 어떻게 부려 먹어도 좋으니 내게 기회를 줘라. 복수할 기회를…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기회를.”
“…”
“이 모든 게 끝나면 죽음으로서 확실하게 죗값을 치른다고 약속하지.”
무거운 침묵이 좌중을 휩쓸었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킨리 퓨셀은 무릎을 꿇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다들 뭐합니까. 한시가 급한데.”
“… 최현석.”
“뭘 멀뚱멀뚱 쳐다봐. 지금부터 밤낮없이 돌아다녀야 하니까 쓸데없는 고해성사는 집어치우고 일어나.”
최현석은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킨리 퓨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모두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암묵적이지만, 킨리 퓨셀의 합류에 동의한 것이다.
“…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장 최전선에 서도록 하지.”
킨리 퓨셀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지랄하지 마. 최대한 오래 굴러야지. 나가자마자 뒤지려고?”
“…”
“최현석 말대로 헛짓거리하지 말고 구르기나 해라.”
킨리 퓨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무장을 점검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모든 준비를 마친 대륙의 전설들이 드락셀을 나섰다.
행복과 살육에 미친 광신도를 저지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