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6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67화(267/273)
마족
선발대의 전멸은 예견된 일이었다.
애초부터 목적이 그러했으니까.
거대한 함정에 빠진 선발대는 예상대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와해됐다.
“그래도 아쉽지 않소? 마지막 전투에서 그만한 전력이 함께한다면 큰 힘이 됐을 텐데.”“안타까운 건 사실이다. 그들 또한 마족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으니.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힘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시드리엘의 의사는 확고했다.
오만한 권위로 똘똘 뭉친 세 가문은, 언젠가 문제를 일으켰을 테니.
분란의 불씨가 되어 재앙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힘이었다.
그런 불안정한 힘 따위, 차라리 없으니만 못했다.
이번에 잠깐이라도 적의 진격을 늦추는 데 사용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했다.
“그럼 이제 우리들이 나설 차례인가.”
“가보자고.”
“부탁드리겠소.”
최현석을 비롯한 전설들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두 개의 팀으로 나눠 한 팀은 광신도 본대를 저지하고, 다른 팀은 새로운 광신도 무리가 집결하는 것을 저지한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투와 전투의 연속.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최현석은 다가오는 광신도 무리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가 얼마나 치열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는지.
몇 번의 사선을 넘나들고.
얼마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는지.
단편적으로, 성장한 레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름 : 최현석
▫칭호 : 전설적인 용사
▫레벨 : 1713
·근력 : 626
·민첩 : 629
·체력 : 627
·마나 : 683
·카리스마 : 175
·투지 : 201
잠깐 사이에 무려 400레벨가량 성장했다.
덕분에 전투력 100을 넘긴 터라 더는 측정도 불가능하다.
분명 대단한 일이었으나, 그 과정을 생각하면 결코 웃을 수 없었다.
“하아…”
지친 얼굴을 한 최현석이 마른세수를 했다.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광신도를 죽였을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이 죽었다.
하나하나, 직접 머리와 심장을 파괴해서인지 그 생명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 피난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일단 작전은 성공했네.”“다들 고생하셨소.”
그래도 치열하게 싸운 덕분에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현재 피난은 99.9% 완료된 상황.
그동안의 피해는 거의 전무했다.
이는 대단한 일이었고, 최현석은 애써 이 사실에 더 집중했다.
자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를 생각하다가는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그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는가.
이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최현석은 그래야만 했다.
최후의 결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속죄하든, 망가져서 미쳐버리든, 지옥에 떨어지든.
적어도 마지막 전투를 끝낸 이후에 생각할 일이다.
지금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생명과 희생의 무게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내일이면 놈들이 온다.”“드디어 마지막이군.”“그렇죠. 마지막 전투…”
물경 4,000만에 이르는 초대규모 광신도 무리.
수많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를 더욱 불린 놈들이 수도 드락셀의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은 싸늘한 비수가 되어 모두의 가슴에 꽂혔다.
“…”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다.
억지로라도 밝게 웃으며 괜찮은 척하기엔 모두 너무 지쳐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싸웠다.
정확히는 쉬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흘리게 한 피를 모으면 거대한 강을 이루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만든 피의 강에 빠진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누구도 침묵을 깨뜨릴 생각을 하지 못하던 그때.
최현석이 입을 열었다.
“이길 겁니다. 그러기 위한 시간들이었으니까.”
차분한 목소리에는 기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전투 중에는 씻을 겨를도 없어서.
지금은 씻는 것을 아예 잊어서 완전히 몰골이 된 그다.
하지만, 두 눈동자만은 또렷했다.
그는 이미 생각의 정리를 마쳤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슬슬 시작해주시죠. 다들 모인 것 같은데.”
“… 알겠소.”
올라벤 그리미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마지막 작전의 브리핑을 시작했다.
“여러분께서 애써준 덕에 피난은 거의 끝났소. 드라센 국민은 물론, 타국의 피난민들까지 안전하게 후방으로 이동한 상황이오. 다시 한번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리오.”
올라벤 그리미어가 가볍게 묵례했다.
여기 있는 전설들이 아니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류를 지켜야 한다는 희망마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기에 올라벤 그리미어는 진심으로 이들의 노고에 감사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적은 현재 수도 드락셀에서 반나절 떨어진 장소에 집결 중이오. 예상대로라면 내일 새벽, 동이 틀 무렵 이곳 드락셀에 도착할 것이오.”“적의 숫자가 사천만이라는 말이 있던데, 맞습니까?”“그렇소. 마법으로 관측한 결과 현재까지 4,076만 정도가 모였다고 하는군.”
모두 침음을 흘렸다.
사천만.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다.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이쪽도 나름대로 모든 전력을 끌어모으긴 했지만, 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여러분의 역할이 막중하오.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주었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소.”“입바른 소리는 치우고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지. 한시라도 아껴야 하는데.”
박현아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어조가 다소 공격적이긴 하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이들에게 한가히 서로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시간이 곧 살릴 수 있는 생명과 직결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났기에 지금은 멈추지 않고 달려야 했다.
올라벤 그리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은 교황을 처치하는 것. 교황을 없애면 사람들의 정신 지배가 풀릴 것이오.”
사실 여기까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정신이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비교적 사태 초반에 밝혀진 사실.
그것이 교황과 연관됐으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다만, 확신을 가지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해서 치밀한 연구 끝에 드라센 제국의 마법사들은 사흘 전에 이러한 사실을 밝혀냈다.
모든 광신도의 정신은 교황과 연결돼 있다.
교황을 죽이면 정신 지배가 풀린다.
“말했듯, 이제 피난은 끝났으니 마지막 전투를 해야 할 때가 왔소.”
이 사실을 알고서도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피난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였다.
일단은 피난민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보내는 게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이제는 피난이 끝났으니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였다.
“교황은 가트렌의 수도 그라티암. 그 중심에 있는 황궁에 있소.”“위치야 처음부터 뻔한 거였고. 거기를 지키는 병력이 문제지.”“병력은 광신도 이천만. 그리고 추기경으로 추측되는 높은 신성력을 지닌 개체도 다수 확인됐소.”
“으음…”
추기경이라는 말에 좌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두 광신도와 싸우며 추기경과 맞붙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의 수가 정확히 몇이지?”“최소 열 이상. 확실하진 않지만 스물 정도로 추측되고 있소.”
“쉽지 않겠군.”
추기경은 하나하나가 전설급 무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절대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이가 무려 스물.
어쩌면 그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예상됐다.
“정면 승부로는 힘들 것이라 판단되오. 추기경뿐만이 아니라, 광신도까지 함께 상대해야 하니.”
“그럼 어떡하죠?”
“누군가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나머지가 교황을 처리해야겠지.”
“나쁘지 않군.”
“자칫하면 힘이 나뉘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전멸할 수도 있다.”“뭉쳐서 정면으로 쳐들어가면 뭐가 돼? 그러다 교황 면상 구경도 못 하고 다 뒤지면 누가 책임질 건데.”“저도 확실히 미끼 작전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일단 나는 미끼로 갈 수밖에 없겠군. 교황을 상대하는 건 무리니.”
전설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면서 어떤 식으로 공략할지 의견을 나눴다.
그렇게 역할 분담을 끝낸 뒤 최종 브리핑까지 모두 끝마치고.
“이야기는 여기까지. 슬슬 출발하자고.”
“갑시다.”
전설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서둘러 마지막 전장을 향해 움직여야 했다.
“끄아아~ 시발! 이번 일 끝나면 어디 바닷가에 별장이나 구해서 조용히 살란다. 거기서 뒤질 때까지 안 나올 거야.”“누님 성격에 그게 되겠습니까?”“내 성격이 어때서 새꺄.”“본인이 잘 알면서 묻기는.”“이 새끼가 은근슬쩍 반말하네? 아주 대가리 굵어졌다 이거지?”“오해입니다. 오해~ 바쁜데 얼른 가죠!”
최현석과 박현아도 아옹다옹하며 이동했다.
가벼운 장난을 하고 나니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누님도 은근히 낭만파였네.’
그라티암으로 향하는 길.
어째서인지 박현아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바다가 보이는 별장에서 산다…
제법 멋진 이야기다.
박현아의 성격에 얼마나 들러붙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뭘 할까.’
최현석의 생각은 자연스레 자신의 미래로 이어졌다.
만약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리고 살아남는다면.
자신은 뭘 해야 할까.
‘뭐,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긴 하지만.’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계속 싸우고 발버둥 쳐 왔다.
언젠가 이뤄낼 꿈과 목표를 위해서.
‘이제 진짜 거의 다 왔어. 드디어 출발 지점에 설 준비가 된 거지.’
조금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목표를 향하는 길의 출발 지점에조차 서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최현석은 더더욱 간절하게 다짐한다.
원하는 ‘그것’을 이루고 말겠다고.
***
제국의 헌신이 발동하고 광신도가 창궐한 작금의 사태는 재앙이었다.
그것도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거대한 재앙.
재앙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성별, 재산, 계급 따위와 관계없이 모든 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순간에 나라가 멸망하고.
가족과 친구가 죽거나 미쳐버리고.
고향을 떠나 대륙 횡단이라 해도 좋을 만큼 먼 거리를 이동했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흐르고, 발톱이 빠져도 멈출 수 없다.
광신도 무리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리고 멀리 이동해야 했으니까.
고통과 불안에 속에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로.
계속되는 혹사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다.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버려야 했다.
한가로이 시체를 묻어줄 시간도, 그럴 만한 체력도 없으니까.
그렇게 인고의 시간 끝에 겨우 도착한 드라센 제국의 수도 드락셀.
이제 겨우 살았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피난민에게 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드락셀 앞에 엄청난 수의 광신도가 모인 것이다.
그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놈들을 막기 위해 많은 군인이 나섰으나, 승산은 희박하다.
적의 숫자는 이쪽의 열 배에 달했으니까.
군인이 쓰러지고 나면 다음은 이 도시가 될 것이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사람들은 깨달았다.
맞서 싸우지 않는 이상 놈들은 대륙 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광신도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터벅, 터벅…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동이 트기 전,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든 새벽녘.
하나둘 도시를 빠져나오던 피난민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거대한 강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칼 한 자루조차 없었지만, 조악한 무기라도 힘껏 꼬나쥐었다.
드락셀 앞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군인이 진형을 짜고 대기 중이었다.
피난민은 자연스레 그들과 섞였다.
군인의 뒤를 지키고, 옆을 지켰다.
군인은 피난민을 제지하지 않았다.
애초에 군인들도 온갖 나라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부대였기에 별다른 이질감도 없었다.
각자의 소속을 상징하는 깃발만 해도 수백 개가 넘었다.
어느 하나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
원래라면 결코 만날 일도, 함께할 일도 없었을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직 하나의 목적으로 모였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이 순간에도 고통과 불안 속에 떨고 있을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더는 잃을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었기에.
맞서기 위해 나섰다.
휘이이잉-!
불어온 돌풍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었다.
마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 있는지 헤아리는 것처럼.
바람은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늘어진 전열을 빠르게 스치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두두두…!
미약한 진동과 함께 소음이 들려온다.
동이 트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려왔다.
저 멀리서 바글대며 달려오는 군체.
놈들의 규모는 순식간에 평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했다.
“…”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장된 호흡.
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진동이 점차 커진다.
땅을 두드리는 소음과 함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겹도록 들어온 웃음소리.
안식을 외치는, 광기에 찌든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일순간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뿌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전장이 떠나가라 울리는 뿔피리 소리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군가는 인류를 외치고.
누군가는 죽음을 외치고.
누군가는 그저 악을 쓰며 달려간다.
부르튼 발이 찢어지도록 달려간 끝에는 안식을 부르짖는 광신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과과-!
두 집단이 격돌하며 얽힌다.
훗날,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처참했던 전투로 기록되는 날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