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272)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272화(272/273)
기쁨과 환희가 느껴진다.
길고 길었던 전쟁의 끝.
누군가는 승리에 환호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소중한 이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요동치는 감정.
최현석은 그 모든 게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건 현실이겠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정과는 반대로,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이 아닌 꿈을 꾸는 것 같다.
최현석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건 그래서였다.
“따뜻하네.”
손바닥을 펼치자 하얀 결정이 내려앉았다.
분명 눈과 닮아 있었지만, 한없이 따뜻한 결정.
대륙을 죽음으로 몰고 간 힘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따스했다.
‘따스한 눈이라…’
어쩌면 이 모순된 결정이야말로 작금의 현실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라헬. 있냐?”
“여기 있어요!”
최현석의 부름에 라헬이 나타났다.
그녀가 최현석의 어깨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턱을 한껏 치켜들고는 하늘 가득 반짝이는 결정을 바라본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내가 성공한 거야?”“그럼요! 용사님은 세상을 구했잖아요!”
라헬이 하늘로 날아올라 떨어지는 결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이 꼭 눈이 와서 신이 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였다.
“얍! 얍!”
워낙 몸치였던지라 잡히는 건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손을 뻗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날아다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최현석의 품으로 돌아왔다.
“용사님.”
“왜.”
“용사님은 계속 용사로 남아주시면 안 될까요?”“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용사에게 계속 용사로 남아달라니.
농담을 하는 건가 싶어 바라보니, 라헬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어째서인지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낀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용사라면 모름지기 모험을 해야죠! 대마왕을 처치했다고 은퇴해서 시골에 처박힐 생각은 아니시죠!?”
최현석은 쓰게 웃었다.
“글쎄. 나는 이제 용사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그동안 손에 묻힌 피가 너무 많다.
아무리 많은 생명을 구했다 한들.
이렇게 짙게 밴 피 냄새를 씻어낼 수 있을까.
“용사 자격이 없다니. 무슨 말이에요!?”
라헬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소리쳤다.
“용사님! 따라 하세요!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
“…”
“따라 하시라니까요?”
“됐어.”
“에잇!”
돌연 라헬이 정권을 내질렀다.
갑자기 눈동자에 주먹이 틀어박힌 최현석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물러났다.
“시발! 무슨 짓이야!?”“따라 하세요!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
“됐다니까.”
“아아아아! 따라 하시라구요오!”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꼴을 보아하니 따라 할 때까지 칭얼댈 것 같았다.
최현석은 하는 수 없이 작게 말했다.
“…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더 크고! 당당하게!”“후우…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
“좋았어요!”
라헬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따라 하세요!”
“또 뭔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야이! 네가 그러고도 요정이냐!”
최종 빌런이나 할 법한 대사를 지껄이는 전담 요정을 향해 딱밤을 날렸다.
“아악! 때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멸망할 뻔한 세상을 구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요!? 죽인 사람보다 살린 사람이 훨씬 더 많잖아요!”“멍청하기는! 이건 단순한 덧셈 뺄셈 같은 게 아니라고!”
새하얀 세상에서 용사와 전담 요정이 서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렇게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며 싸우다가 문득 허무해진 최현석은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원래 최현석은 지나간 일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지금 사건은 단순히 과거라 치부해버리기엔 지나치게 큰일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였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을 구했다.
다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고통받았을 뿐.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의 결정과 행동은 딱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번에는 라헬 네 말이 맞다고 치자.”“맞다고 치는 게 아니라 맞는 거거든요.”“그래그래. 그렇다 치자고.”“아니, 용사님! 그렇다 치는 게 아니고 진짜….”
최현석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옆에서 라헬이 계속 조잘거렸지만, 익숙한 일이기에 무시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뜬 것은 그때였다.
[용사 목표 달성!] [보상을 위해 의식을 전이합니다!]“어?”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최현석의 의식이 끊어졌다.
***
“여기는…”
최현석이 주변을 둘러봤다.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새파란 하늘과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바닥에 깔린 새하얀 구름은 그 어떤 침대보다 푹신푹신했다.
“오랜만이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까.
이 공간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선명했다.
그가 지구에서 죽고 난 직후 도착한 장소.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됐다.
라헬의 감언이설에 껌뻑 속아 마왕군 요새에 떨어지면서 말이다.
-환영합니다. 용사 최현석.
공간 전체에 목소리가 울렸다.
최현석은 목소리의 주인이 신이라 불렸던 자.
그리고 자신을 이세계로 오게 한 존재임을 눈치챘다.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네. 아, 말은 편하게 해도 되지?”-물론입니다.
최현석은 이 존재와의 대화를 꽤나 오랫동안 고대했다.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으니까.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한가?”-이곳은 영혼과 의식의 공간. 현실의 시간 흐름과는 다르기에 대화를 할 여유는 충분합니다.
다행히 조급하게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될 듯했다.
최현석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뭐부터 물어야 할까. 막상 자리를 깔아주니 생각나는 게 없네.”
말문이 쉽게 트이지 않았다.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다가 흩어진다.
최현석의 고민이 길어지는 듯하자,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괜찮다면 먼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 인사?”
-당신이 교황을 물리친 덕분에 뺏겼던 힘이 회복되며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을 구한 것과 더불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그렇게 된 거였나.”
교황이 어떻게 막대한 신성력을 불러왔는지 궁금했는데, 이 존재의 힘을 이용했던 것 같았다.
최현석은 자연스럽게 이것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너는 정체가 뭐지? 정말 신인가?”-저는 신처럼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의 염원이 마나와 반응해 만들어진 정신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이해하기 어려우시면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라 받아들이셔도 무방합니다.
최현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마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기에.
이런 신과 유사한 존재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이 뭐지?”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호칭이 필요하시다면… 엑스 정도로 칭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엑스(X).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엑스. 교황은 뭐였지? 본인도 용사였다고 하던데. 네 힘은 어떻게 가져간 거고?”-교황 오르반 4세. 본명은 토마스 야콥슨. 그는 대략 134년 전 이곳으로 온 용사입니다.
이 부분에서 최현석은 나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오르반 4세가 본명이 아니었다니.
-그는 당신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용사였습니다. 정의감이 아주 투철했죠.
“그런데 왜 그 꼴이 된 거야?”-그건…
이어지는 설명을 정리하면 이러했다.
X는 일찍이 교황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다.
뛰어난 재능과 X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교황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했다.
역대 모든 용사를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했을 정도로.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돌변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놈이 예고도 없이 변했다고?”-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흐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어째서 교황이 변했는가.
최현석은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정한 구원. 영원한 평화. 그런 건 모두 허상입니다.”“내가 죽고, 가트렌과 데우시스 교가 무너진다 한들. 이 대륙에 평화가 올 것 같습니까?”“세계를 구원한다? 허울뿐인 명분입니다. 오직 용사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선전이나 다름없지요.”
용사 생활을 이어가면서 교황은 깨달았을 것이다.
세상의 불합리함과 인간의 추악함에 대해.
이 세계는 현대 지구와 다르게 계급 사회이다.
덕분에 인간의 모습이 좀 더 날것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런 현실을 본 후에 ‘구원은 존재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구원은 없다.’
마족을 모두 죽인다 한들 고혈을 쥐어짜는 귀족이 남아 있는 이상 평민에게 구원은 없다.
귀족을 모두 죽이고 세상에 계급을 없앤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가.
어차피 구원받을 수 없는 세계를 위해 용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현석도 한때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교황의 기저에 깔린 생각을 유추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뭐, 이 이야기는 됐어.”
최현석은 이미 여기에 관한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끝난 일이기도 하고.
굳이 다시 의문을 던져 머리 아파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무튼, 너는 모든 걸 쏟아서 교황 뒷바라지를 했는데, 놈이 배신해서 쪽박을 차게 된 거네.”-맞습니다.
“그래서 나를 지켜보면서 계속 간을 봤던 거고?”-그 또한 사실입니다.
X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 꺼려졌을 것이다.
이미 교황이라는 실패한 선례가 있었기에.
때로는 최현석을 시험하고, 때로는 도우며 그 성장을 지켜봤으리라.
-그리고 하나 더 고백하자면 라헬에게 당신의 전이를 맡겨 마왕군으로 보낸 것도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하아… 그런 거였나.”
여기까지 들었을 때.
최현석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유추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 모험의 마지막, 최종 보상을 숨겼는가.
“혹시 용사 퀘스트에서 말한, 세계를 구했을 때의 보상. 그걸 숨긴 것도 같은 맥락인가?”-… 맞습니다.
“보상이 어지간히 보잘것없었나 보네.”
기껏 세계를 구원했는데 쥐꼬리만 한 보상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화가 난 용사가 교황처럼 돌변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X는 마지막까지 최종 보상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리라.
최현석은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보상이 뭐야? 그때 무슨 선택권을 주겠다고 한 것 같은데.”-정확히는 당신의 향후 거처에 관한 것입니다.
“거처라…”
-첫 번째는 당신을 지구로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선택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지구로의 귀환.
최현석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모든 힘을 사용하면 당신이 죽기 직전의 시점으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딱히 생각이 없어서. 다음 선택지는 뭐지?”
최현석은 이제 와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은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시 돌아간다 한들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다음 선택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현재 최현석 당신의 상태에 관해 말씀드려야 합니다.
“내 상태?”
-당신은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아, 이걸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었나 보네.”
초월자.
적당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자신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신 같은 전지전능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적어도 인간이라 불릴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초월자가 된 게 왜?”-초월자는 인간과 같은 차원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강한 힘으로 인해 차원 균열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도 커집니다. 이 대화가 끝나면,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는 현계를 떠나야 할 겁니다.
“시간이 별로 없네.”
일주일 안으로 대륙을 떠나야 한다.
최현석은 어쩐지 가슴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