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4)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4화(4/273)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이는 금발.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뚜렷한 이목구비.
등에서 나온 새하얀 날개까지.
최현석 앞에 나타난 라헬은 처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너무도 작다는 것.
그녀의 키는 30cm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마치 피규어 같은 모습이다.
어째서 작아졌는지 궁금할 법도 했지만, 최현석은 묻지 않았다.
그저 라헬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분노했다.
“용사 포인트가 궁금하시다고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런 최현석의 속도 모른 채 라헬은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용사 포인트는 용사를 육성하기 위해 만든 중요한…. 으아악!”
최현석이 라헬을 붙잡았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당황하며 소리치려던 라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너…”
불꽃.
자신을 바라보는 최현석의 눈이 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원래도 인상이 사나운 편인 최현석이 화를 내자 고위 마족
뺨치도록 무서웠다.
“저… 용사님…?”
“일단 좀 맞자.”
“네?”
최현석이 라헬의 발목을 붙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퍼억! 퍽!
“우선 말을 으겍! 말을 좀, 으갹! 잠시! 으헉! 잠시만! 으학!”
그래도 차마 돌바닥에 후려칠 수는 없었는지 냄새나는 볏짚을 향해 라헬을 내리치는 최현석이었다.
물론, 라헬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온갖 오물이 묻은 볏짚에 처박히며 라헬은 그녀의 상관 프리젤라를 원망했다.
사실 그녀도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로 마왕군 요새에 처박힌 사람 앞에 무슨 낯짝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라헬이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프리젤라의 강요 때문이었다.
“최현석의 전담 요정이 돼라.”
전담 요정이란 별 게 아니다.
그냥 용사 뒤치다꺼리를 하며 가이드를 해주는 잡일꾼이라 보면 된다.
“저보고 전담 요정이 되라니요!?”“그래. 원래 용사 특전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니 문제없겠지.”
당연히 라헬은 항의했다.
“전담 요정 딱지는 백 년도 전에 뗐다고요!”“전담 요정이 싫으면 그냥 인간으로 지상에 내려보내 주지.”“네…? 저보고 인간이 되라니… 농담이시죠…?”
라헬이 당황하며 물었으나, 프리젤라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농담 같나?”
“…”
“전담 요정이 싫다면 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능력도 없이 마왕군 요새에 처박아 줄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마왕군 요새에서 인간의 몸으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기간은 최현석이 마왕을 물리칠 때까지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라헬은 결국 최현석의 전담 요정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프리젤라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라헬은 집에 꿍쳐둔 마카롱도 챙기지 못한 채 최현석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지금은 볏짚과 오물에 머리가 처박히는 신세다.
“으겍! 자, 잠시만! 으갹! 말을 좀! 하고! 으햑!”
최현석은 미친 사람처럼 라헬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으아아아아아!”
풍차 돌리기로 라헬을 빙빙 휘두르다가 마치 메이저 야구 선수가 빙의하기라도 한 듯 온 힘을 다해 볏짚에 내리꽂는다.
파악!
완전히 걸레짝이 된 라헬이 비틀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으어어… 요, 용사님. 진정하시고 일단 제 말을….”
“진정?”
진정이라는 말에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그의 눈은 기이한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꺄아아아!”
“죽어어!”
그렇게 지옥 안에 또 다른 지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최현석은 조금씩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야겠지.’
당장 라헬을 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일단 어째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전후 사정을 들어야 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설명을 끝낸 라헬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지금까지의 일은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했기에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내 매니저가 됐다. 이거야?”“네. 기간은 최현석 용사님이 마왕을 처치할 때까지예요.”“마왕을 처치할 때까지라…”
중얼거리던 최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용사는 됐어.”
“네?”
“안 한다고. 용사.”
“그게 무슨 소리세요…?”
라헬의 물음에 최현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내가 왜 마왕이랑 싸워서 세계를 구해야 하는데? 들어보니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용사가 대부분이라며.”“물론, 그런 예비 용사님들이 많기는 해요. 대부분 평범한 삶을 살다 죽죠. 하지만!”
라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현석 용사님은 달라요. 말씀드렸잖아요! 무려 SSS급의 잠재력!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거라구요!”“네 말을 어떻게 믿어? 또 거짓말이면 어떡하려고?”“그러니까 그건 실수…”
최현석이 변명하려는 라헬의 말을 끊어냈다.
“됐고. 네 말이 맞다 치자. 내가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쳐. 그런데 그게 내가 나서서 희생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
“내 목표는 이 요새를 탈출하고 모험가가 되는 것. 그뿐이야.”
진심이었다.
애초에 그가 용사가 되기로 한 것도 단순히 라헬의 말에 혹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자유롭게 다시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많이 팍팍했으니까.’
세계 격투기 챔피언이라는 자리는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식단도 철저하게 지킨다.
모든 날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이 흘러갔다.
경기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날이 제법 많기는 했지만, 관광은 꿈도 꾸지 못한다.
컨디션을 조절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최현석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제 더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현석 용사님.”
“왜.”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이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많이 위험하죠. 용사님이 원하는 모험가가 되려고 해도 힘이 필요할 거예요.”
라헬의 말에 최현석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 당연히 강해질 생각이야. 모처럼 이세계에 떨어졌는데, 마법도 배우고 검술도 배우고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면 왜…”
“다만, 용사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없던 사명감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을 거란 이야기야.”
최현석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것이 더 라헬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처음에는 운동만 한 단순 무식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용사로 보낼 때도 빠르게 몰아붙인 건데,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마왕을 무찌르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데…’
라헬은 이제 최현석에게 완전히 예속된 처지다.
최현석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며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한다.
최현석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조언은 해줄 수 있을지언정, 강요할 수는 없다.
“아무튼, 너는 무조건 내 말에 따라야 한다 했지? 나는 앞으로 요새를 나갈 생각이니 협조해.”
“알겠어요…”
라헬이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릴 때였다.
“응?”
갑자기 라헬의 모습이 사라졌다.
최현석이 당황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서 라헬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사님. 누가 다가오고 있어요!’
“다가와 누가?”
최현석의 의문은 금세 해결됐다.
“인간! 인간!”
고블린 간수 쟈크가 쇠창살을 두드렸다.
“나와라.”
“어?”
“뭘 멍청하게 서 있나! 나오란 말이다!”
이제 곧 취침 시간이다.
그런데 왜 자신만 밖으로 내보낸다는 말인가?
다른 노예들도 말은 없지만 은근히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자식 설마…’
밖으로 나온 최현석은 떨떠름한 얼굴로 쟈크를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놈의 손에 들린 거대한 검을 바라봤다.
‘여차하면 죽여야 할지도…’
쟈크는 처음부터 유독 자신을 괴롭혔다.
놈이 만약 은밀히 자신을 해할 생각이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쟈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레이드런 님의 호출이다.”
***
2.5m의 큰 키에 전신을 뒤덮은 붉은색의 근육.
황소머리에 뿔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고위 마족
레이드런.
그가 집무실에 앉아 최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성실히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예…?”
“쟈크에게 들었다. 요즘 노예들 중 가장 열성적으로 일을 한다고.”
최현석은 깜짝 놀라 쟈크를 바라봤다.
‘이 땅딸보가 내 칭찬을 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쟈크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으나, 레이드런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다른 머저리들처럼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 열심히 하는 게 보기 좋더군. 그래서 말인데.”
레이드런이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노예장을 할 생각 없나?”
“예?”
“요즘 작업 속도가 영 좋지 않아. 이곳은 격전지 코앞이다. 언제 인간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요새 증축이 이렇게 늦어서야 큰일이지.”
“…”
“그러니 최현석. 네가 노예장이 되어 작업 능률을 올려주면 좋겠군.”
레이드런의 말이 끝날 때였다.
‘절대 안 돼요!!!’
머릿속에서 또다시 라헬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사보고 마왕군 꼬붕이 되라니 그게 말이에요 똥이에요!?’
천사인 라헬의 입에서 꼬붕이라는 몰상식한 단어가 나온 게 더 의아했지만, 최현석은 물을 수 없었다.
“지금 뭐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레이드런이 눈을 치켜뜨며 최현석을 노려봤다.
‘헙!’
설마 레이드런이 기척을 느낄지 몰랐는지 라헬조차 깜짝 놀라며 다시 입을 닫았다.
“저는…”
최현석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감사합니다! 레이드런 님!”
“오호.”
“최선을 다해 노예들을 굴려 보겠습니다!”
최현석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하하하! 좋아. 첫인상과 다르게 마음에 드는 놈이야.”
레이드런이 최현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일이 잘 해결되면 내가 특별히 마왕군 정식 입단서를 넣어주지.”
무려 용사에게 마왕군 입단서를 넣어주겠단다.
용사 최현석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라헬이 모기처럼 시끄럽게 최현석의 주위를 맴돌았다.
“미쳤냐고요! 어떻게 그런 제안을 받아요! 그러고도 용사예요!?”“아, 귀찮아 죽겠네.”“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빨리 다시 가서 못하겠다 해요! 어서!”“자꾸 정신 사납게 할래? 그리고 너. 아까 그 황소 대가리 얼굴 못 봤어?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하면 나를 산채로 찢어버릴걸.”
“…”
정말 그럴 것 같아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레이드런은 정말 무섭게 생겼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신 거예요…”“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마.”
최현석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그곳에는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다.
바로 용사 퀘스트란 것이었다.
★☆★☆ 용사 퀘스트! ★☆★☆
(어떤 멍청이의 실수로 시작부터 마왕군 요새에 떨어진 당신!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것처럼 우울하겠지만, 낙담은 금물!
다행히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마왕군 간부 레이드런의 환심을 사세요.
진짜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적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목표 : 레이드런의 호감· 보상 : 용사 포인트 100
용사 퀘스트를 확인하며 최현석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용사 포인트를 모을 수 있는 기회야.’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