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57)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57화(57/273)
사실 헤미스는 한참 전부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넘게 잔소리를 하는 레이드런을 보며 헤미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가 원래 저렇게 말이 많았나?’
같은 이야기를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건지 모르겠다.
레이드런의 말투는 진득하며 느긋한 편이다.
평소 말에 힘이 있으며 진중하다고 할까.
하지만 그런 느긋함이 지금은 독으로 변해있었다.
느린 속도로 잔소리를 하니 두 배로 듣기 싫었다.
“최현석. 너는 분명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에 헤미스 님께서 주입한 마기가 없었다면 절대 승리는….”
레이드런의 말을 들으며 헤미스가 속으로 웃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겠지만, 저건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
대략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현석은 플로모트를 극한으로 운용해 위기를 돌파했다.
‘그래. 내가 주입한 마기가 없었다면 실패했을 거야.’
헤미스의 마기가 없었다면 최현석은 플로모트를 극한으로 운용할 수 없었다.
여기까진 레이드런의 말이 맞다.
‘하지만 말이야.’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다른 놈이었으면 그 마기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걸?’
헤미스가 불어넣은 마기는 마음대로 쓰고 싶다고 해서 쓸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마기는 질적인 면만 따졌을 때 마왕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
거기에 더해 헤미스는 마기 안에 자신의 의지를 담았다.
최현석의 마기를 억누르고, 신체의 침식을 늦추겠다는 의지.
그러니 최현석의 몸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고위 마족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거야.’
최소 대대장.
아니, 연대장급은 돼야 헤미스의 마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도 겨우 중대장급에 불과한 약골이면서 내 허락도 없이 마기를 가져다가 제 것처럼 사용했다?’
농담으로도 듣지 않을 말이다.
헛소리하지 말라며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아무튼, 재미있는 놈이라니까.’
정말 최현석의 재능 하나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슬슬 가볼까?’
헤미스가 웃으며 앞으로 걸었다.
이제 둘 사이에 끼어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저대로 뒀다간 날이 새도록 떠들어 댈 기세였으니까.
“레이드런. 원래부터 그렇게 말이 많았니? 귀에 딱지 앉겠다. 이참에 최현석 보모로 보직을 바꿔줄까?”
***
레이드런의 뒤통수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헤미스 님…?”
어째서 헤미스가 여기 있는 걸까.
그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저건 헤미스가 맞았다
‘아직 회의가 끝나려면 이틀은 남았을 텐데…’
군단장 정기 회의는 최소 1주일간 진행된다.
예정 기한보다 더 늦으면 늦었지, 이렇게 일찍 돌아오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굳건하기만 하던 레이드런의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하필이면 헤미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이드런은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정신 차려라…’
일단 어째서 헤미스가 빨리 복귀한 건지 이유를 알아야 했다.
레이드런이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크흠! 헤미스 님. 올해는 회의가 일찍 끝나셨습니다?”“아니. 회의는 아직 진행 중이야.”“회의가 끝나지 않았는데 나오셨다는 말씀입니까?”“당연하지. 내 새끼들이 맞고 있다는데 어떻게 회의를 하고 있겠니? 오호호호!”
레이드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토록 당황스러웠던 적이 얼마 만일까.
30년 전, 헤미스가 사단장을 잡아먹어 부대가 발칵 뒤집혔을 때도 이 정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마왕님께는 말씀드렸습니까…?”
“아니.”
“그러면 회의는…”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
“마왕님이 조금 놀라셨을지도 모르겠어. 오호호호!”
이 순간 레이드런과 최현석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평하게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마왕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최현석도 알 수 있다.
이건 마왕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마왕이 헤미스를 숙청하기라도 하면…’
어쩌면 대학살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헤미스가 둘 사이로 들어오며 두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표정 풀어. 남자는 이런 사소한 일에 겁먹으면 멋이 없다니까?”
헤미스는 여전히 태평한 소리를 했다.
순간 최현석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아, 이게 사소한 일이면 도대체 큰일은 뭡니까?”
최현석이 시큰둥하게 말하고.
곧이어 싸늘한 침묵이 이어진다.
“…”
레이드런과 헤미스가 최현석을 빤히 바라봤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최현석이 저도 모르게 입을 턱 막았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감히 헤미스의 말에 딴죽을 걸다니, 순간적으로 미친 게 분명했다.
이가 모조리 뽑혀도 할 말이 없었다.
‘이게 전부 라헬 탓이야!’
그동안 라헬과 만담을 하며 태클을 거는 게 습관이 됐다.
만약 여기서 죽으면 꼭 라헬을 지옥에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저, 이건 그러니까…”
최현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일도 사소하게 여기시는 군단장님의 담력이 대단하다는 뜻이었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니?”
“…”
최현석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방금 큰일이 뭐냐고 물었지?”
헤미스의 붉은 입술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다.
“글쎄… 너한테는 이런 게 바로 큰일 아닐까?”
그녀의 말이 옳았다.
마왕과 군단장의 알력 다툼?
최현석에게 그딴 건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진짜 큰일이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최현석. 네 생각은 어떠니?”“사, 살려만 주시면 정말 개처럼 굴러보겠습니다…”“어머, 우리 귀염둥이 보보에게 친구가 생기겠구나! 오호호!”
세상에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보다 큰일은 없었다.
***
다행히 헤미스는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 정도 보보의 옆에서 개 행세를 하는 것으로 용서해 주었다.
“왈왈! 왈!”
최현석은 정말 열심히 짖었다.
라헬과 보보는 한심한 표정으로 최현석을 바라봤다.
“용사님. 자괴감 들지 않으세요?”“닥쳐. 나라고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다.
살 수만 있다면 이깟 개 흉내쯤 일 년 내내 할 수도 있었다.
“왈왈왈!”
“크와앙!”
최현석은 정말 열심히 짖었다.
그렇게 보보의 친구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개에서 사람으로 돌아온 최현석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명상을 했다.
“후우…”
매일 아침 하는 명상과 훈련은 이제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어 있었다.
“용사님용사님! 뭐하세요!?”
오늘은 웬일인지 일찍 일어난 라헬이 옆에서 알짱거렸다.
최현석은 무시하고 계속 호흡을 골랐다.
“스읍, 하아…”
“용사님. 개 흉내 내는 거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안 돼요? 어제 보니까 엄청 잘하시던데!”“스으읍… 후우…”
“저는 용사님이 광견병에 걸린 줄 알았다니까요!? 진짜 보보보다 더 개 같았어요!”
“스으읍…”
“용사님용사님용사님!”“정신 사나우니까 좀 꺼져!”
아직은 정신 수양이 부족한 최현석이었다.
“칫.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빨리 조리장이나 가요.”
라헬이 허공에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빨리 가서 오늘도 마수를 때려잡고! 조리병도 때려잡고 해야죠!”“기다려. 가기 전에 해야 할 게 있으니까.”
“뭔데요?”
“용사 상점 업그레이드해야지.”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용사 포인트 : 1,450
이번에 아벨슨을 지키라는 퀘스트를 완료하고 무려 1,000 포인트가 들어왔다.
용사 상점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포인트는 500.
1,450 포인트면 업그레이드를 하고도 무려 950 포인트나 남는다.
“와아, 진짜 인생 한 방이네요. 이게 이렇게 들어오다니.”
“그러게 말이다.”
“그럼 얼른 확인하죠! 묵혀뒀다 뭐 해요?”“그래. 이번에는 쓸만한 게 있었으면 좋겠네.”
말과는 달리, 사실 최현석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당한 전력이 있었으니까.
‘애초에 용사 상점이란 것 자체가 서브라는 느낌이긴 하지.’
용사 상점에서 파는 능력과 아이템은 분명 유용하다.
지금껏 수많은 위기에서 최현석을 구해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사 상점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는 아니다.
단지 어떤 일을 진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정도.
그렇기에 이번 업그레이드로 대단한 변화가 생길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쓸만한 물건이나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상점이 업그레이드되면 좋은 게 잔뜩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뭐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후우, 그럼 간다.”
최현석이 용사 상점 한쪽에 위치한 업그레이드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드디어…’
몇 달을 기다려온 순간이다.
방금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조금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자!”
버튼을 누르자 곧장 반응이 왔다.
빵빠라방~!
고전 예능 프로에서나 나올 법한 팡파르가 울리고, 곧이어 시스템 알림이 떴다.
[초급 용사 상점이 중급으로 업그레이드됩니다!]최현석은 곧바로 업그레이드된 상점을 확인했다.
“으음… 뭐가 바뀐 거지?”
[중급 용사 상점]– 능력
– 아이템
초기 목록은 이전과 같았다.
그저 초급에서 중급으로 바뀐 게 전부.
“어때요!? 뭐 좋은 게 잔뜩 생겼어요!?”“아니. 아직 잘 모르겠네…”
최현석은 우선 아이템부터 확인했다.
“오? 뭐가 바뀌긴 했구나.”
– 아이템
1. 장비
2. 장신구
3. 기타
기존에 아이템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던 것이 세부 항목으로 나뉘었다.
최현석은 먼저 장비부터 확인했다.
‘검, 방패, 갑옷… 이런 것들을 파는구나.’
지구로 치면 고대나 중세에 사용했을 법한 무구들이었다.
최현석도 남자였던지라 이런 장비들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풀 플레이트 갑옷에 검을 휘두르는 기사! 어릴 때 로망이었지.’
멋들어진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한다.
‘잠깐만… 이거 어디서 봤는데?’
생각해보니 최현석은 이미 멋들어진 갑옷을 입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노예장으로 있었을 때 인간들이 쳐들어왔었지.’
레이드런과 요새에서 도망칠 때.
멋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레이드런에게 덤볐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휘황찬란한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마 다섯이서 삼 초 컷이었나?’
결과는 갑옷과 함께 뭉개져 피떡이 되는 것.
압도적인 힘 앞에 갑옷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괜히 입었다가 움직임만 둔해지겠어…’
최현석은 아쉽지만 로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음 항목을 확인했다.
2. 장신구
장신구는 말 그대로 반지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류였다.
‘오, 능력치를 올려주네?’
장신구는 제법 쓸만해 보였다.
게임처럼 능력치를 올려주거나, 간혹 마법이 담겨 있는 종류도 있었다.
최현석은 불꽃을 쏘는 마법이 담긴 반지의 가격을 확인했다.
‘500 용사 포인트라고…?’
도대체 위력이 얼마나 되길래 500 포인트나 한단 말인가.
혹시나 샀다가 별 볼 일 없는 라이터 불이라도 나오면 그대로 포인트를 버리는 셈이었다.
‘다른 것도 대부분 비싸네. 이건 좀 더 보류하자.’
장신구류는 대체적으로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비록 950 용사 포인트가 있긴 해도 낭비를 할 수는 없다.
당장 장신구가 급한 건 아니니 구매를 보류했다.
3. 기타
마지막 3번 기타 항목에는 이전처럼 잡다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오, 새로운 게 많이 추가됐네.’
새로운 물품이 많이 추가됐고, 이전에 있던 상품도 더 개량돼서 나왔다.
그중 전투력 측정기가 최현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쓸만한 전투력 측정기
‘지금 쓰는 허접한 건 5만까지밖에 측정이 안 되는데… 저건 더 나으려나?’
‘허접한’에서 ‘쓸만한’으로 수식어가 바뀌었으니 분명 더 좋기는 할 것이다.
‘가격도 150포인트밖에 안 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전투력 측정기는 간단하게 상대의 힘을 파악할 수 있어 제법 유용했다.
일단은 보류하고 여유가 된다면 사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이템은 대충 둘러봤고, 이제 남은 건 능력인가…’
최현석은 아이템 항목을 나왔다.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능력란에 들어간다.
‘이번에도 똥 참기, 숨 참기 같은 게 나오면 어떡하지.’
처음 용사 상점을 열었던 날.
그때 능력란을 보고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제발 쓸만한 게 있기를!’
기도하며 능력란을 눌렀다.
그러자 아이템처럼 새로이 만들어진 세부 항목이 보였다.
‘이건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
최현석의 눈이 반짝였다.
– 투기 생성
– 마법 생성
투기와 마법을 생성한다.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것들임이 분명했다.
‘좋아. 시작은 이거다.’
최현석은 용사 포인트를 사용할 곳이 바로 이곳임을 직감했다.
그의 손가락이 투기 생성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