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62)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62화(62/273)
오늘은 예선전인 단체 달리기가 있는 날이다.
근 한 달간 기다려왔던 날인 만큼 원래라면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해야 했건만.
헤미스는 아침부터 심기가 좋지 않았다.
불청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니?”
헤미스가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으나, 그건 표면적인 것일 뿐.
목소리에 잔뜩 어린 짜증이 그녀가 화를 참기 위해 억지로 미소 짓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주둥이 펴지? 나라고 좋아서 왔겠냐?”
불청객의 정체는 인간 여성이었다.
이전 군단장 회의에서도 한차례 부딪힌 전력이 있는 여성.
그녀의 마왕군 제4군단의 군단장 박현아였다.
“좋아서 온 게 아니면 당장 돌아 가주겠니? 목을 비틀어버리기 전에 말이야.”“마왕이 보내서 왔어.”
마왕이라는 말에 헤미스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어머, 마왕님께서 보냈다고? 혹시 지난번 일 때문인가?”
한 달 전.
헤미스는 정기 군단장 회의 도중 허가 없이 자리를 이탈했다.
그 이후로 마왕과 냉전 상태였는데, 이번에 박현아를 보낸 것이다.
“이제 와서 그때 일을 문책하시려는 거라면 사람을 잘못 보내셨네. 네까짓 게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오호호호!”
헤미스가 하이톤으로 웃었다.
박현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착각하지 마. 주둥이. 문책이 아니니까. 그때 일은 마왕도 이해한다고 했어.”“그러면 이번 대회 때문이니?”“맞아. 네가 벌인 괴상한 짓에 마왕도 제법 관심이 가는 모양이야.”
박현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덕분에 나만 귀찮게 됐어.”
박현아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나보고 헤미스가 벌이는 대회를 감독하고 오라고?”
헤미스가 연 대회는 마왕군 전체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마왕 또한 예외는 아닌지 대회의 경과가 궁금한 듯했다.
“그걸 왜 내가 하는데.”“헤미스 성격을 버틸 수 있는 건 너뿐이다.”“안 돼. 나도 바쁘다고.”“제4군단은 어차피 부군단장이 모든 일을 처리하지 않나.”
정곡을 찔린 박현아가 인상을 구겼다.
“나, 나도 가끔 하는 일이 있긴 해! 부대 시찰도 하고! 또… 아무튼 진짜 바쁘다니까!?”
“가라. 명령이다.”
“쳇…”
어쨌든 그녀도 마왕군에 소속된 몸.
마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박현아도 절대 좋아서 앙숙이라 할 수 있는 헤미스의 본거지에 찾아온 게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해. 조용히 있다 갈 생각이니까.”
박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미스가 돌아서는 박현아의 등에 말했다.
“그래. 대신 내 눈에 띄지 않게 숨어다니렴. 홧김에 잡아먹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오호호!”“하아, 진짜 짜증나…”쾅!
집무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턱을 쓰다듬던 헤미스가 입을 열었다.
“레이드런. 어떻게 생각해?”“무슨 말씀이신지.”
“저 천박한 년이 했던 말. 너는 믿니?”“…박현아 군단장님께서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그건 맞지. 하지만 마왕님도 그럴까?”
순간 헤미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우리 마왕님도 나이가 들더니 제법 음흉해지셔서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건…”
레이드런은 당황했다.
마왕의 험담을 하는 직속 상관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레이드런은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기억을 지우고 싶군.’
그가 마왕군에 들어온 지 어언 150년.
이제 어엿한 마족으로서 역할을 하게 됐다고 자부했건만.
진짜 어른 마족의 세계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
“읏챠!”
최현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헬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슬슬 가볼까?”
“벌써 가시게요?”
오늘 열리는 예선전 달리기는 정오에 시작된다.
지금은 해가 뜨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
출발하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입술 괴물이 불러서.”
“아하.”
오랜만의 헤미스 호출이다.
아무래도 오늘 열릴 대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 같았다.
“가기 전에…!”
그때 최현석이 품을 뒤적거리더니 스포츠 고글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 들었다.
“어? 결국 사신 거예요?”“응. 전에 쓰던 측정기가 망가졌으니까, 어차피 새로 하나 사야 하긴 했잖아?”
스포츠 고글의 정체는 바로 전투력 측정기였다.
기존에 쓰던 허접한 전투력 측정기가 망가져 새로 구매한 것이다.
‘부서진 게 딱히 아깝지는 않아. 어차피 그건 너무 측정범위가 낮아서 더는 필요 없었으니까.’
추가적으로 용사 포인트를 썼다고 해서 아까울 게 없었다.
어차피 허접한 전투력 측정기의 측정범위는 최대 5만.
툭하면 측정 불가가 떴기에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최현석이 신형 측정기를 살펴봤다.
□ 쓸만한 전투력 측정기 설명 : 전투력 측정기로 바라본 대상의 근력, 체력, 민첩, 마력을 종합하여 전투력을 측정한다.
능력 : 측정 대상의 ‘대략적인’ 전투력을 알 수 있다.
※ 주의 : 전투력을 너무 신뢰하지는 말 것.
필요 용사 포인트 : 150
전체적인 설명은 전과 같다.
‘허접한’에서 ‘쓸만한’으로 수식어가 바뀐 게 전부.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게 달라져 있었다.
“이건 무려 전투력 20만까지 측정이 가능하다고!”
“오오!”
“이 콤팩트하고 트렌디한 디자인을 보라!”
“오오오!”
“가격도 단돈 150 용사 포인트! 이 정도면 혜자 아니냐?”“그러네요! 20만이면 어지간해서 측정 불가가 뜰 일도 없겠어요!”
“그렇지.”
“그런데 디자인이 너무 튀는 거 아니에요?”“괜찮아. 여기 놈들은 이런 사소한 거에 신경 쓰지 않으니까.”
마왕군은 의외로 편견 없는 집단이다.
강하기만 하면 뭐든 인정해 준다.
실제로 인간인 최현석이 조리중대장 노릇을 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런 고글 써도 신경 쓰지 않거나, 멋있다면서 자기도 한번 쓰게 해달라 하는 게 전부겠지 뭐.”“하긴! 마왕군엔 멍청이들뿐이니까요!”
“그렇지!”
대회 당일이었기 때문일까.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인지 텐션을 한껏 끌어올리는 최현석과 라헬이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출발해야지. 늦으면 또 무슨 지랄을 할지 몰라…”
최현석은 서둘러 이동했다.
헤미스와의 약속에 늦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
‘음음, 좋군. 좋아!’
잠시 후.
최현석은 신형 전투력 측정기의 성능에 만족해하며 헤미스의 집무실 근처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대대장들의 전투력은 5만 초반이었어.’
이곳까지 오는 길에 몇몇 대대장들을 확인했다.
그들은 모두 5만에서 7만 사이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레이드런은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네.’
듣기로는 레이드런의 무력이 사단장급에 달한다고 했다.
최현석은 나중에 몰래 확인해보리라 다짐했다.
‘일단은 넣어 둘까.’
성능은 충분히 확인했으니 슬슬 측정기를 집어넣으려 했다.
헤미스와 대화 도중 이런 고글을 쓸 수는 없었으니까.
그 순간.
쾅!
헤미스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어…? 사람? 아니, 여자…!?”
사람이다.
그것도 여자 사람이다.
아벨슨을 제외하고는 몇 달 만에 보는 여자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아벨슨처럼 서양인의 외모가 아닌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여성도 최현석을 발견했다.
“응? 넌 뭐야?”
여성, 박현아가 최현석에게 다가왔다.
‘한국말이다!’
얼마 만에 듣는 한국어인지 모르겠다.
최현석이 반가움에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너. 뭐냐고.”
박현아가 최현석 앞에 서며 말했다.
그 당돌한 기세에 최현석은 조금 당황했다.
“어… 최현석인데…”
“이것 봐라?”
박현아가 피식 웃었다.
동시에 그녀에게서 진득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모, 몸을 못 움직이겠어.’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었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마력이 전신을 옥죄이고 있었다.
“호오? 제법 버티는데?”
박현아가 눈을 더욱 날카롭게 떴다.
사나운 눈매.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착각이 일을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다.
삐빅!
그때 미처 벗지 못한 전투력 측정기가 울렸다.
[ 전투력 : 측정 불가 ]그제야 최현석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시벌… 또 측정 불가냐…?’
흑색 거성에 있는 인간 여성.
무려 20만까지 측정할 수 있는 전투력 측정기에서 측정 불가가 나왔다.
이제 막 산 신품 측정기가 고장 나지 않은 이상…
눈앞의 여성은 반가운 한국인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란 뜻이었다.
“야. 꿀 처먹었냐? 왜 말이 없어.”
“그게…”
“너 뭐냐고. 뭔데 용사들이나 쓰는 전투력 측정기를 쓰고 다니면서 몸에는 마기를 가지고 있는 건데?”
박현아가 점점 가까워진다.
“상판만 보면 어지간한 마족
뺨치기는 하는데… 한국말을 하는 거 보니까 용사는 확실하단 말이지.”
“…”
“그런데 왜 용사가 여기 있고, 왜 마기를 가지고 있는 건데. 엉!?”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들이닥쳤다.
거기에 마력으로 몸이 옥죄이는 상황이라 그런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박현아는 그런 세세한 상황까지 고려해주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해. 어?”
박현아의 키는 160cm 후반으로 190대인 최현석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최현석의 가슴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너 뭐냐고 인마.”
툭.
“대답 안 해?”
툭.
“갈라서 확인해 볼까? 응?”툭.
계속해서 가슴에 이마를 들이받는 박현아를 보며 최현석은 식은땀을 흘렸다.
‘진짜 미친년이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그런데 단순히 미치기만 한 게 아니라, 미치도록 강하기까지 하다.
“저… 그러니까…”
최현석이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입을 벌리던 그때, 몸을 옥죄던 마력이 사라졌다.
동시에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현아 군단장님. 실례지만 비켜주시겠습니까.”
레이드런이 박현아와 최현석 사이로 들어왔다.
“최현석은 지금부터 헤미스님과 면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레이드런의 말에 박현아가 사납게 웃었다.
“호오? 소대가리. 너 얘가 누군지 알아?”“예. 최현석으로 현재 흑색 거성의 조리중대장을 맡고 있습니다.”“그렇단 말이지…”
박현아가 레이드런과 최현석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핥았다.
“네가 알면 당연히 저 안에 있는 주둥이도 알고 있겠고… 이거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마왕군에 인간, 그것도 용사를 들여?”
“…”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일법한 상황이다.
용사 출신의 마왕군 군단장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뭐, 좋아! 내 용건은 끝났으니까 갈게.”
박현아가 이번에는 물러나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다 최현석을 빤히 바라본다.
“너 최현석이라 했나?”
“…”
“조만간 또 보자.”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악귀와도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왔니?”
집무실 문을 열자 여느 때처럼 헤미스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문밖에서 소란이 있길래 레이드런을 보냈어.”
“아, 감사합니다.”
위기에서 구해준 건 다름 아니라 헤미스였다.
최현석은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헤미스에게 감사했다.
“저, 헤미스님…”
“그 천박한 년이 누구인지 묻고 싶은 거지?”
“예…”
헤미스의 공격적인 언사에 최현석이 조금 당황했다.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4군단의 군단장이라고만 알고 있으렴.”
“알겠습니다.”
역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레이드런이 여성에게 군단장님이라고 부른 것이 맞았다.
‘인간. 그것도 용사가 마왕군 군단장이라니…’
만약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저런 모습이 될까?
최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저런 양아치는 되지 말아야지.’
군단장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으나, 양아치는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조리병들이 보기엔 이미 양아치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헤미스가 다가왔다.
“사실 딱히 부른 이유는 없어.”
“…”
“그냥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오랜만에 보니 좋네?”“아… 저도 군단장님 얼굴을 뵈니 좋습니다! 하하!”
“정말이니?”
헤미스가 거대한 입술을 바짝 들이밀었다.
최현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예… 물론입죠…”
“오호호! 그렇다면 다행이고!”
입술이 다시 멀어진다.
최현석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컨디션 조절해야 하는데, 조졌네.’
심장 건강에 좋지 않은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사이에 제법 강해졌네?”“아직 부족합니다만, 최대한 노력했습니다.”“흐응~ 아주 훌륭해.”
평안한 어조와 달리, 헤미스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중대장 수준은 확실히 벗어난 것 같고… 대대장에는 못 미치는 정도인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최현석은 평범한 중대장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하게 중대장의 범주는 벗어나 있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였다.
“역시 너는 항상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좋다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번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겠지?”“맡겨만 주십시오! 하하!”“좋아! 이번에 8등 안에 들지 못하면 2군단 연구소에 보내버리려 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순간 최현석이 눈을 끔뻑였다.
“예?”
“말했잖니? 이번 대회에서 8등 안에 들라고.”
“아…”
최현석이 고장 난 로봇처럼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할 수가 없다.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헤미스가 8등에 들라 했던 건 아주 초창기다.
이렇게 거대 이벤트로 변하기 전이라는 말이다.
규모가 커진 만큼 8등에 드는 건 훨씬 더 힘들어졌을 게 뻔하다.
‘하아,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8등은 그렇다 쳐도, 진짜 중요한 건 다음 내용이었다.
바로 연구소.
“군단장님. 그런데 연구소는…?”“아, 그거? 별거 아니야. 그냥 어떻게 인간이 마력과 마기를 같이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서 말이야.”
“…”
“이쪽 방면으로는 2군단에 아주 유명한 친구가 하나 있거든. 걔가 너를 보면 아주 환장할걸?”
최현석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죽어갔다.
인체 연구에 미친 헤미스의 친구라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지도 몰랐다.
헤미스는 안심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걱정하진 마. 연구소에 간다고 죽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순간 최현석의 눈에 희망이 스쳐 갔다.
“그러면…?”
“팔다리 위치가 바뀔 수는 있겠지. 머리가 하나 더 늘어날 수도 있고. 뭐, 그래도 죽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겠니?”“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최현석은 다짐했다.
‘무조건 8등 안에 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라갈 것이다.
‘실패하면 자살한다.’
죽어도 연구소라는 곳에 보내지기는 싫은 최현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