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68)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68화(68/273)
헤미스가 뿌린 어둠이 걷혔다.
하늘을 향하던 모템의 시선도 내려와 전방을 향한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군께서 노하셨군.”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다.
헤미스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모템. 들리니?
그때 모템의 머릿속에 음성이 들려왔다.
헤미스였다.
“예. 주군. 말씀하십시오.”-봐줄 필요 없어. 죽어도 상관없으니 인정사정없이 밟아버려.
“알겠습니다.”
-으음, 대신 적당히 센스가 괜찮아 보이는 놈들이 있으면 슬쩍 깃발을 넘겨.
“일부러 깃발을 건네주란 말씀이십니까?”-그래. 어차피 그놈들이 단체로 덤벼든다 해도 너한테서 깃발을 뺏는 건 무리겠지.
헤미스의 말대로다.
참가자들은 형별을 면하기 위해 모두가 합심해서 덤벼들겠지만.
모템은 자신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단 하나의 깃발도 넘기지 않으리라.
-통과하는 놈이 하나도 없으면 안 되니까. 적당히 괜찮다 싶으면 깃발을 넘겨주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래. 한 시간만 더 수고해.
헤미스의 음성이 끊어졌다.
모템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건 나름 재미있겠군.’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다르다.
아마 100명의 참가자가 모두 합세해 죽을 각오로 덤벼들 것이다.
반면에 모템은 그들이 죽지 않도록 신경 쓰며 싸워야 한다.
‘과연 어떨까…’
자신에게서 깃발을 가져갈 만한 존재가 있을까.
헤미스가 당부한 대로 정말 괜찮은 센스를 보여주는 자가 있다면 깃발을 넘겨줄 생각이다.
허나, 자신의 인정을 받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이런 놈들은 탈락이지.”
모템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는 어느새 마족의 목을 움켜쥔 상태였다.
“커, 커헉…!”
“이걸 기습이라고 한 건가?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군.”
모템이 손아귀에 쥔 마족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직!
머리가 반쯤 지면에 틀어박힌 마족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나, 상관없다.
개의치 말고 인정사정없이 밟아버리라는 게 주군의 명이니.
이런 한심한 놈 한둘쯤 죽어도 괜찮으리라.
“죽여라!”
“깃발을 뺏어! 놈은 혼자다!”
첫 공격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사방에서 마족이 달려든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십.
지금껏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리던 참가자들이 한꺼번에 덤벼든 것이었다.
갑옷 속에 가려진 모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와라.’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든다.
모두 피할 수는 없다.
어지간한 공격은 몸으로 때운다.
콰직, 콰악!
모템이 등에 걸린 대검은 여전히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묵직한 손과 발을 휘둘러 차근차근 참가자들을 부숴나갔다.
***
최현석은 가라앉는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직이야. 기다려.”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동작을 취하던 팀원들이 움찔하며 멈춰 선다.
“지금 들어가 봤자 싸움에 휘말리기만 할 뿐이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선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이다.
참가자들은 하나하나가 대대장에 준하는 이들.
그런 강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를 벌이는 만큼, 그 여파가 무시무시했다.
숲이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는 좀 더 기다린다.”“언제까지 기다리는 거냐. 이제 시간이 10분도 남지 않았다.”
홀고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하늘에 표기된 상황판에서 실시간으로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 9:45 ]남은 시간은 약 10분.
그 안에 깃발을 가져오지 못하면 모든 게 끝이다.
“인고형을 받기는 싫다…”
지네 마족
페디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딱딱한 목소리에서 진득한 공포가 묻어났다.
항상 천진난만하게 흙을 가지고 놀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만큼 마족에게 있어 인고형이란 두려운 형벌이었다.
“참아. 기회는 한 번뿐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
전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참가자들은 마구잡이로 마법을 날려댔다.
모두 모템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갑옷한테 쓰러지는 것보다 자기들이 사용한 마법에 당하는 숫자가 더 많아.’
대부분의 마법은 모템에게 적중하지 못했다.
다른 참가자의 마법에 맞아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런 상황에 들어가면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수가 많아 봤자 서로 방해만 될 뿐이야. 깃발을 쥘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을 기다린다.’
최현석의 기다림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존재했다.
‘놈은 한 번 빼앗긴 깃발을 다시 되찾으려 하지 않았어.’
모템은 깃발을 사수하기만 할 뿐, 빼앗긴 깃발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즉, 어떻게든 깃발을 손에 쥐기만 하면 승리는 확정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이제 곧 타이밍이 온다.”
팀원들을 다독이는 최현석 또한 조급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 3:23 ]어느새 4분도 남지 않았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는 거냐! 이러다 경기가 끝나겠다!”
홀고트가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순간 최현석이 눈을 빛냈다.
‘지금…!’
기다리고 기다렸다.
불안하지만 참았다.
최적의 타이밍을 위해서.
그리고 지금.
최현석은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다! 움직여!”
외침과 동시에 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나갔다.
최현석은 또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홀고트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홀고트! 날려!”
“명령하지 마라!”
짜증 어린 대답과 달리, 홀고트는 착실하게 준비한 마법을 사용했다.
“레인 오브 비즈!”
이전에 최현석을 상대로 사용한 적이 있는 마법.
폭발력을 지닌 작은 구슬을 광범위하게 날리는 마법이었다.
“죽어라!”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기는 그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홀고트는 생존을 위해 전력으로 마기를 쏟아부었다.
구슬이 지상에 닿자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광!
그 위력을 본 최현석이 눈을 빛냈다.
‘얼핏 보면 타격이 있을 것 같지만, 검은 갑옷은 멀쩡할 거야.’
지금껏 참가자들이 날린 마법 중에는, 이것보다 강한 위력을 지닌 마법도 비일비재했다.
이 정도는 검은 갑옷, 모템에게 가렵지도 않으리라.
그럼에도 최현석이 이 마법을 사용하라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퓨슈우우…
폭발로 인해 일대에 시커먼 연기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일순간 연막탄이 터진 것처럼 가려진 시야.
최현석이 다시 소리쳤다.
“이키글리!”
하늘에 떠 있던 이키글리가 빠르게 지상으로 낙하했다.
최현석이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엄청난 속도였다.
“낚아!”
이키글리가 흙먼지를 뚫고 모템 앞에 당도했다.
그의 눈은 모템의 등에 꽂힌 깃발에 고정돼 있었다.
‘제발!’
이키글리가 빠르게 손을 뻗는다.
턱!
하지만 그보다 모템의 손이 한 발 더 빨랐다.
모템이 이키글리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커헉…!”
고통에 버둥거리는 이키글리를 보며 최현석이 눈을 빛냈다.
‘지금이다.’
어차피 여기까지는 예상 범주 안이다.
최현석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이키글리가 성공하면 좋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으니까.
고로, 진짜는 지금이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공격을 시작했다.
레이드런식 격투술
제3형 – 맹돌격(猛突擊)
최현석이 엄청난 속도로 치고 나갔다.
달려가는 그의 뒤로 검은 불길이 일었다.
목표는 모템의 등.
뒤에서 덮쳐 깃발을 빼앗을 생각이다.
순간 마기를 느낀 것인지 모템이 돌아섰다.
최현석과의 거리는 불과 십여 미터.
제법 먼 거리처럼 보여도, 이 정도면 눈 한번 깜빡일 시간 안에 도달한다.
허나, 모템은 괴물 같은 반응속도를 보여주었다.
‘역시 피하려 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이 연달아 몰아치는 급박한 상황.
그 속에서도 모템은 몸을 틀어 최현석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걸렸어.’
순간 최현석이 씨익 웃었다.
동시에 땅에서 솟아난 페디센이 모템의 발목을 붙잡았다.
불쑥!
“이런…”
모템의 입에서 처음으로 당황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콰아앙!
최현석과 모템이 격돌했다.
***
대대장급 무력을 지닌 마족이 무려 100명.
그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모템은 여유로웠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지루했다.
‘대부분 수준 이하군.’
100년 만에 다시 나온 세상에 들떴건만.
금방 차게 식어버렸다.
이놈들은 모두 쓰레기다.
가진 힘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
마치 제어할 수 없는 과분한 힘을 지닌 어린아이와 싸우는 느낌이다.
‘이 시대의 마족은 이렇게까지 나약해진 건가.’
모템이 활약했던 시대의 마족은 이렇지 않았다.
그때의 마족은 하나하나가 진정한 전사였다.
그렇게도 강인했던 마족이 지금은 힘만 센 멍청이가 돼 있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째서 마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가.
모템은 우울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분노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0분. 더 이상 깃발을 줄 놈은 없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깃발을 넘긴 마족은 총 다섯.
사실 그마저도 주지 않으려 했으나, 헤미스의 명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넘긴 것이다.
자신이 고의로 깃발을 넘겨준 줄도 모르고 신이 난 멍청이들이 눈에서 아른거렸다.
‘안타깝군. 안타까워…’
모템이 속으로 침음을 흘리던 그 순간.
최현석과 팀원들이 움직였다.
“레인 오브 비즈!”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기 구슬.
폭발력이 담겨 있다.
‘형편없군.’
겉보기엔 요란하나 실속이 없다.
이런 마법에 당하는 건 수준 이하의 잔챙이밖에 없을 것이다.
콰과과광!
모템의 근처에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고, 이내 먼지에 휩싸였다.
‘음,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였나?’
이제 보니 본 목적은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마기가 느껴졌다.
‘속도는 제법. 하지만 너무 정직하다.’
모템은 보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마치 자석에 빨려 들어가듯 모템의 손아귀에 이키글리의 목이 들어온다.
고통의 버둥거리는 이키글리.
마무리하려던 그때 등 뒤에서 접근하는 마기가 느껴졌다.
‘오호, 또 뭔가 남았나?’
뒤로 돌아서자 악귀 같은 표정을 한 인간이 보였다.
‘주군께서 말씀하신 인간이 저놈인가.’
최현석에 대해서는 이미 언질을 들었다.
“아, 경기 도중에 인간도 하나 보일 거야.”“인간도 참가하는 겁니까?”“응. 제법 재미있는 놈이니까 기대해도 좋아.”
무려 헤미스가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 인간.
모템은 다가오는 최현석을 빤히 바라봤다.
‘투기 자체는 제법 훌륭하다만, 다루는 사용자가 미숙하군… 아니, 마기의 양을 생각하면 오히려 뛰어난 건가.’
인간이 어째서 마기를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기를 운용하는 실력 자체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가진 마기 대부분을 쏟아 넣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진 마기의 총량이 100이라 했을 때, 투기에 사용되는 마기는 5 수준이다.
10만 되어도 난이도가 엄청나게 상승하며 신체에 강한 부하가 걸린다.
그런데 눈앞에서 달려오는 인간은 가진 마기의 절반에 가까운 양을 쏟아 넣어 투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뛰어난 능력이긴 하다만, 이게 끝이라면 조금 실망스럽군.’
단순히 마기를 쏟아부어 투기를 쓴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저 인간은 기술을 쓴 대가로 쓰러질 것이고.
자신은 여전히 서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켜봤음에도 내 실력을 파악하지 못한 건가.’
모템은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땅에서 솟아 난 다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런…”
이게 진짜였나.
땅속에 있었다곤 해도 전혀 마기를 느끼지 못했다.
아주 짧은 당황과 함께 최현석 어깨가 모템의 허리에 진격했다.
‘으음!’
위력이 제법이다.
인간이 지닌 마기의 총량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가진 마기 대부분을 쏟아 넣은 탓이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허나, 모템에게 피해를 입히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 순간 최현석의 몸에서 ‘마기’가 아닌 ‘마력’이 움직였다.
“마폭식!”
마폭식(魔爆式).
마력과 마기를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는 기술.
투기 ‘레이드런식 격투술 변형’의 근간이 되는 기술이었다.
공격에 당한 모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기운.’
분명 마기임에도 모템이 알던 마기와는 다르다.
난폭하고 불규칙적으로 날뛰는 마기가 모템의 내부로 밀려 들어왔다.
‘막을 수 없다. 그저 견디는 게 다인가.’
몇 번 비슷한 공격을 겪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견디는 게 최선이다.
최현석의 마기가 모템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모템은 속이 살짝 메스꺼워졌다.
‘짜증 나는군.’
그저 놀이 상대로만 생각했던 인간에게 당한 탓일까.
저도 모르게 눈이 날카로워진다.
모템이 최현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건방진 인간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릴 생각이었다.
‘음?’
허나 모템의 손은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최현석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허억… 허억…”
바닥에 드러누운 최현석은 어느새 손에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가 모템을 올려다봤다.
씨익 올라간 입꼬리.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모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놈이…!’
잠깐 어울려줬더니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 한다.
그때 최현석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위.”
모템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모템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누워있는 최현석에게로 향했다.
최현석은 힘이 다했는지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중지가 천천히 올라간다.
“만나서 개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그렇게 두 번째 경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