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78)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78화(78/273)
최현석은 피곤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가를 살짝 찌푸린다.
‘아… 진짜 죽을 것 같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플로모트의 사용이 끝나고, 어느새 머리의 뿔도 사라진 상황.
최현석은 밀려오는 무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라헬이 다가와 최현석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용사님. 괜찮으세요?”
“아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라헬은 평소처럼 장난치지 않았다.
최현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우웅…
그녀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최현석의 상처들이 저절로 봉합되며 아물어갔다.
하지만, 금세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마력이 부족해…”
라헬과 최현석은 마력을 공유한다.
그 말은, 최현석의 마력이 떨어지면 라헬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다.
최현석은 연이은 전투로 마력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그를 치료할 마력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라헬이 조급한 표정으로 최현석을 바라봤다.
“용사님. 어떡하죠…?”“됐어. 어차피 마력이 있었어도 치료는 힘들었을 거야.”
최현석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상태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치료해서 될 수준이 아니야.’
온몸의 장기들이 모두 파열됐다.
라헬이 치료를 해준다 한들 미봉책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만한 상처를 치료하려면 아벨슨이 있어야 했다.
‘어차피 게이트는 부서졌고. 아벨슨 씨가 여기 올 일은 없으니 꼼짝없이 죽겠네…’
최현석은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게 가기는 싫은데…’
점차 의식이 희미해진다.
눈에 초점이 풀리고.
정신이 까마득해지기 직전.
“용사님! 정신 차려요!”콱!
라헬이 최현석의 콧잔등을 후려쳤다.
“시발! 무슨 짓이야!?”“됐고. 이것 좀 마셔봐요!”
라헬이 유리병 같은 것을 들이밀었다.
막무가내로 입에 가져다 대는 통에 최현석은 하는 수 없이 밀려오는 액체를 삼켰다.
‘우엑, 더럽게 맛없네.’
어릴 때 먹던 딸기 맛 시럽 감기약 같은 맛이다.
최현석은 억지로 한 병을 비워내고는 입가를 훔쳤다.
“크으…! 이 역한 건 뭐야?”
“포션이요!”
“포션? 그 게임에 나오는 치료약?”“네! 여기 한 병 더 있으니까 이것도 마셔요.”
라헬이 또 다른 병을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 든 최현석은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 상급 치유 포션
설명 : 한 병이면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소문의 포션. 실제로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하지만, 제법 뛰어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능력 : 상처를 치유하고, 마력을 소량 회복한다.
필요 용사 포인트 : 500
아이템 가격을 본 최현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 오백 포인트!? 방금 내가 마신 것도 이거야?”“네. 딱 두 개 있더라구요. 그것도 얼른 마셔요.”“이렇게 비싼 걸 어떻게…”“지금 죽게 생겼는데 그깟 용사 포인트가 중요해요!?”
“아, 그러네.”
최현석은 포션을 벌컥 들이켰다.
500포인트라고 하니 왠지 맛도 더 고급스러워진 느낌이다.
딸기 맛 시럽 감기약은 어느새 딸기 맛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맛으로 변해있었다.
역시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다.
“크으으…! 역시 몸에 좋은 게 맛도 좋다니까!”
무려 500포인트짜리를 두 병이나 마셔서일까.
벌써 반응이 오는 느낌이다.
최현석은 한결 가벼워진 호흡으로 빈 병을 내려놨다.
“라헬. 이건 어디서 놨어?”“죽은 용사들한테서 찾았어요.”
“죽은 용사?”
“네.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던 놈들이 있었던 것 같더라구요.”
인벤토리.
박현아가 용사 상점에서 구입하면 좋다고 추천한 능력이다.
최현석은 아직 없었는데, 적 중에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나 보다.
“아, 그러고 보니 죽을 때 가끔 뭐가 우수수 떨어지긴 하더라.”
“그랬어요?”
“어. 죽으면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을 전부 토해내는 시스템이었나 보네.”
전투 도중 가끔 뭔가 떨어진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인벤토리인 줄은 몰랐다.
최현석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몇몇 용사의 시체 근처에 제법 많은 아이템이 쌓여있는 게 보였다.
“용사 시스템이라는 거. 굉장히 잔인하네.”
“왜요?”
“그렇잖아. 같은 용사를 죽여도 레벨이 오르고, 이렇게 아이템까지 주다니. 꼭 서로 죽이라고 조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음,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라헬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때 최현석이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좀 살만해졌으니 움직여야겠네.”
최현석이 시체 쪽으로 걸어간다.
라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용사님. 설마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시는 건가…?’
최현석은 이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전에도 마수나 마족을 죽인 적은 많지만,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사실상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무덤을 만들어 주려는 걸지도 몰라.’
몸도 성치 않은데 무덤을 만들려 하다니.
라헬은 마음이 짠해져서 눈가를 훔쳤다.
“용사님. 그만두세요. 저들은 어차피 악당이에요.”“응? 무슨 소리야?”
“그렇게 애쓰실 필요 없다구요.”
라헬의 말에 최현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아무리 악당이라도 아이템은 챙겨야지.”
“네?”
“저 귀한 거 전부 다 가져가야 할 거 아니야!”
“…”
“이참에 갑옷 같은 것도 벗겨서 챙기고 무기도 전부 들고 가자. 얘들 장비 장난 아니더만!”
라헬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용사님. 방금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시스템이 잔인하니 뭐니 하지 않았어요?”“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
잠시라도 저 용사의 탈을 쓴 악마를 걱정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다 죽어가면서도 장비와 아이템을 챙길 생각을 하다니.
진짜 잔인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용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서 있는 라헬을 보며 최현석이 닦달했다.
“라헬. 뭘 멍하니 서 있어? 장비 안 챙길 거야?”
라헬이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요! 반지 하나 남겨두지 말고 싸그리 긁어가죠!”“좋아. 전부 담아보자고!”
사실 라헬은 애초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용사야 죽든 말든!
최현석만 살아있으면 그만이다.
단지 최현석이 심적 고통을 느낄까 봐 잠시 걱정했던 것뿐.
“오호, 용사님! 이것 봐요! 이 반지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
시체에서 반지를 빼낸 라헬이 환하게 웃었다.
***
아이템을 모으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용사들의 장비를 모두 벗겨내고, 그들의 인벤토리에서 떨어진 아이템까지 싹싹 긁어모으니 작은 언덕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휘유~ 많이도 모였네요.”“그러게. 토일렛인가 뭔가 하는 놈이 최고였어.”“맞아요. 그 자식은 완전히 보물창고던데요?”
테일러 앤드류는 가장 강한 용사답게 굉장히 많은 아이템을 지니고 있었다.
전체 아이템 중 무려 절반가량이 그의 인벤토리에서 나왔을 정도.
“뭐, 보물창고라기엔 잡템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최현석이 아이템을 대충 뒤적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용사님.”
“왜?”
“이거 어떻게 옮길 거예요? 용사님은 인벤토리가 없잖아요.”
최현석은 인벤토리가 없다.
즉, 이 많은 물건을 가지고 이동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라헬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참에 하나 사죠! 용사 상점에서 인벤토리 안 팔아요?”“찾아봤는데 안보이더라고, 아무래도 업그레이드를 한 번 더 해야 하는 것 같아.”“으음, 그럼 어떡해요?”“괜찮아. 이게 있으니까.”
최현석이 거무튀튀한 배낭을 내밀었다.
“이건…?”
“아까 필요할 거 같아서 따로 챙겨 뒀어.”
□ 뛰어난 마법 배낭
설명 : 가방 안의 부피는 100배, 내용물의 무게는 10분의 1로 줄여주는 마법의 배낭이다.
능력 : 부피 100배 확장, 무게 10분의 1 감소.
필요 용사 포인트 : 500
“아, 공간 확장 배낭이면 거의 다 담을 수 있겠네요.”
라헬은 배낭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봤다.
용사들에게서 받은(?) 마법 배낭은 총 3개.
이 정도면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가지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방만 있으면 인벤토리는 필요 없지 않아?”
“네?”
“가방이 500포인트면 인벤토리는 훨씬 더 비쌀 거 아니야.”“그렇겠죠. 아마 몇천 포인트는 하지 않을까요?”“그러면 굳이 비싼 포인트 주고 살 필요가 있어? 그냥 배낭만 쓰면 될걸.”“아니죠아니죠. 인벤토리는 차원이 다르다구요! 공간도 엄청 넓고, 무게도 아예 안 느껴지고. 영구보존기능까지!”
라헬은 열정적으로 인벤토리의 기능에 대해 설명했다.
“게다가 이건 가방을 도둑맞으면 전 재산이 다 털리는 거잖아요. 그에 비해 인벤토리는 죽는 그날까지 내 품에 지니고 있을 수 있다구요.”“으음, 듣고 보니 그러네.”
설명을 듣고 보니 여러모로 인벤토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용사 생활을 오래 한 박현아가 가장 먼저 추천한 게 인벤토리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 끝났다.”
“고생하셨어요.”
잠시 후.
최현석과 라헬은 3개의 배낭에 나눠 아이템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정리가 끝난 듯 보이자, 옆에서 대기하던 로이거가 다가왔다.
“좋아 보이는군.”
“예. 든든하네요! 하하.”
아이템을 잔뜩 챙겨 기분이 좋아진 최현석이 밝게 웃었다.
“몸은 괜찮나?”
“이 친구들이 비싼 포션을 많이 선물해 줘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좋은 상태는 아니다.
흑색 거성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아벨슨의 치료를 받아야 할 수준.
아이템을 줍는 동안에는 엔도르핀이 팍팍 돌아서인지 괜찮았지만, 정리가 끝나고 나니 다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이제 곧 흑색 거성으로 돌아갈 테니 상관없겠지.’
최현석은 참기로 했다.
조금만 있으면 아벨슨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별것 아니다. 오히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군.”
로이거는 플로모트의 부작용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때문에 최현석이 아이템 정리하는 것을 돕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본인이 미안해할 이유는 없는데…’
솔직히 최현석은 로이거가 이 아이템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했다.
애초애 로이거는 상급자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전혀 마왕군답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이랄까.
기분이 이상해진 최현석은 괜히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흠흠, 아무튼 이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돌아가다니?”
“흑색 거성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현석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투로 물었다.
“못 돌아간다.”
“예?”
“게이트가 부서졌지 않나.”“아, 그럼 혹시 걸어가야 합니까…?”“이곳에서 흑색 거성까지는 거리는 500km가 넘는다. 하루 종일 달린다고 해도 삼 일은 걸릴 거다.”
최현석이 입을 꾹 닫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데, 500km를 넘게 뛰어가라?
심지어 중간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건 그냥 죽으라는 뜻이었다.
“어어… 뭔가 방법 없습니까?”
“없어.”
로이거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흑색 거성의 지원을 기다리는 게…”“흑색 거성에서 오는 지원보다 적이 더 빠를 수도 있다.”“그럼 어떡합니까?”
“흑색 거성으로 가야지. 뛰어서.”
최현석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겨우 살아남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죽는 거야?’
절대 무리다.
지금 몸 상태로는 500km는커녕 50km도 힘들 것이다.
최현석이 절망에 빠져있던 그때.
저 멀리서 모래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현석과 로이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서 일어나는 모래폭풍을 바라봤다.
“저거 보이십니까?”
“그래.
“뭔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그렇게 보이는군.”
모래폭풍이 점점 가까워진다.
이내 희미한 소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점차 가까워지는 모래폭풍.
소음의 크기도 커진다.
“어어, 뭡니까 저거!?”“뭔지 몰라도, 전투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최현석이 로이거를 바라봤다.
“연대장님.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못 도망친다. 내가 전력으로 뛰어도 저 속도는 무리야.”
“그럼…?”
“저게 우리 편 이길 기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