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90)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90화(90/273)
최현석이 마기 앰플을 마시는 미친 짓을 벌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지닌 유일한 무기를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 무기란 바로 목숨 그 자체.
로타크는 최현석을 상대로 실험을 벌이고 싶어 했고, 더군다나 마의 맹약으로 묶여있기까지 한 상황.
즉, 지금은 최현석이 무슨 짓을 해도 그를 죽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현석과 라헬은 선택했다.
“맞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자.”
로타크의 연구에 필요한 핵심 재료인 마기 앰플을 삼킨다.
그래서 연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이 지닌 가치를 더욱 올린다.
로타크가 미치지 않고서야 귀중한 앰플을 소화한 최현석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더불어 잘만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과연 마기 앰플을 마시고 나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죽으면 모든 게 허사다.
자신이 겪어온 경험과 능력. 그리고 로타크의 수술 실력을 믿기는 했으나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반쯤은 도박이었다.
“몰라! 성공하면 되는 거 아냐!?”
최현석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치고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최현석은 그 선택을 조금은 후회했다.
“꺼, 꺼어어어…!”
온몸이 뒤틀린다.
뼈가 마디마디 조각나는 것 같다.
피부가 난도질당하고 장기가 내부에서부터 불타는 감각이다.
누군가 머리통을 열어 뇌를 주물럭거리면 이런 느낌일까.
어지간한 고통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최현석이었건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 겪어온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격통.
‘정신을 잃으면 끝이야. 어떻게든 마기를 통제해…!’
이러한 상황에서도 최현석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날뛰는 마기를 억눌렀다.
지금까지 그가 익혀온 마기 제어.
여기에 더해 마력과 마기를 융합하고 다스리는 방법.
어떤 것이든 좋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움직였다.
‘괜찮아진 건가…?’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길고 긴 고통이 끝난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분 같기도 하고, 몇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다.
최현석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여기는…”
갈라지고 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목이 완전히 메말랐다.
‘처음 보는 장소야.’
보이는 것은 낯선 것들 뿐이었다.
자신의 몸에는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잔뜩 꽂혀 있었고.
바닥에는 기이한 마법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용사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라헬이 보였다.
“라헬?”
“쉬이이잇…!”
라헬이 검지를 코앞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작게 속삭인다.
“문밖에 쥐새끼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아직 용사님이 깨어난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아…”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여기가 어딘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자신의 몸은 괜찮은 건지.
이러한 최현석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라헬이 묻기도 전에 설명했다.
“여기는 마공탑 상부에 있는 특수 치료실이에요. 듣기로는 엄청 고위 간부들한테만 제공되는 장소래요.”“오… 나 출세했네…”“그러게요. 이 귀한 장소에 무려 사흘 동안이나 누워 계셨으니까요.”
“사흘이라고…?”
최현석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3일이나 지나다니.
정신줄을 놓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용사님이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계속 마기를 통제했다나 봐요. 여기 놈들이 신기하다면서 자기들끼리 계속 떠들어 댔거든요.”
“아…”
“그거 보더니 열 받아서 날뛰던 실험쥐도 웃더라구요. 앞으로가 기대된다나 뭐라나.”
실험쥐는 라헬이 로타크를 부르는 말이었다.
혼자만 새하얀 게 꼭 실험용 쥐 같다고 한다.
아무튼, 화가 나서 날뛰던 로타크가 잠잠해졌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계획이 거의 성공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용사님.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그럭저럭. 견딜 만해.”
“다행이네요.”
“이 정도면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는 게….”
“쉿!”
갑자기 라헬이 최현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와요. 이건…”
입구를 바라보던 그녀가 돌연 사라졌다.
최현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으음, 군단장님?”
나타난 것은 제2군단장 로타크.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것은…
“군단장님!?”
제3군단장 헤미스였다.
***
“오랜만이야~ 최현석. 신수가 훤하네?”
“감사합니다…”
헤미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최현석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입술 괴물이 왜 여기를…’
헤미스가 이곳에 찾아올 이유가 뭘까.
설마 자신을 걱정해서?
아니, 애초에 헤미스는 마공탑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
최현석이 쓰러진 사실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죽은 게 아닌 이상에야 굳이 헤미스를 찾아가서 말할 이유가 없지.’
로타크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최현석에 관한 걸 꼬박꼬박 보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숨기려 들었으면 모를까.
그렇다면 헤미스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설마 꿈을 꾸는 건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니?”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최현석은 말을 끌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헤미스의 뒤에는 로타크가 서 있었다.
표정이 구린 게 잘못 말했다간 큰일 날 것 같다.
‘아직 로타크가 직접적으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거야.’
여기서 로타크가 헤미스를 치려 한다는 계획을 말하는 건 좋지 않다.
증거도 없이 주절주절 떠벌릴 수는 없었으니.
어쨌거나 상대는 군단장이다.
헤미스의 장난감인 자신과 마왕군의 군단장인 로타크.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묻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최현석은 그냥 무지성(無知性) 돌격 작전을 강행했다.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강해져?”
“예! 어차피 로타크 군단장님은 마의 맹약으로 묶여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치료해주실 테니… 이참에 제대로 한번 뽑아먹어 보자 싶었습니다!”
최현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되는대로 저지르기는 했는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행히 합격이었다.
“오호호호!”
헤미스가 하이톤으로 웃는다.
그 뒤에 서 있는 로타크의 표정은 한층 더 구겨졌다.
‘표정 진짜 살벌하네…’
로타크의 시뻘건 눈알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만 같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최현석은 벌써 수십 번은 죽었으리라.
“맹약이 끝난 뒤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뭐… 당장 오늘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인데, 그렇게 뒤까지 고민해보지는 않았습니다!”“그래. 그렇단 말이지.”
헤미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입술이 주욱 찢어졌다.
벌어진 입술은 거의 귀에 닿을 정도였다.
“확실히 재미있긴 해.”
헤미스가 최현석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헤미스의 손이 맞닿은 부분에서 거대한 칼날 같은 것이 솟아났다.
“으어어…!?”
자신의 눈앞에서 솟아낸 칼날을 보며 최현석이 깜짝 놀랐다.
“아직 네 상태가 어떤지 체감이 안 되나 보지?”
“…”
“흐응~ 그건 앞으로 차차 알려주면 되겠지.”
헤미스가 다시 손을 쳤다.
그러자 칼날은 언제 솟았냐는 듯 그대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몸에서 쇳덩이 같은 것이 자라났다가 사라졌다.
이건 기존에 겪었던 신체 변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최현석은 혼란스러웠으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슬슬 돌아갈까?”
“예?”
“흑색 거성으로 가야지.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이니?”“군단장님. 저 치료가 아직…”“그건 걱정하지 마. 대충 자리는 잡힌 것 같으니까.”
헤미스는 문제 될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쩌어억!
입술이 벌어지고 그녀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자, 여기.”
입에서 나온 것은 마의 맹약서였다.
맹약서를 로타크에게 던졌다.
로타크는 떨떠름한 얼굴로 맹약서를 받았다.
“이건 네가 알아서 해.”
“예…”
“그럼 간다.”
그걸로 끝이었다.
헤미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료실을 나서고, 최현석 또한 그 뒤를 쫓아 따라갔다.
“…”
혼자 남게 된 로타크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맹약서를 들어 지긋이 바라본다.
순간 그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토해져 나왔다.
부우욱! 부욱! 촤좌좌좌좌!
맹약서가 갈기갈기 찢긴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찢긴 맹약서가 허공에 휘날렸다.
로타크가 악귀와도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끄아아아! 헤미스!!!”
분했다.
너무 분했다.
지금껏 보살피고, 귀중한 재료를 먹어 죽기 직전까지 간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살려놨더니!
냉큼 와서 최현석을 데려간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부에 박쥐 새끼가 있군.”
첩자를 심어놓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헤미스가 갑자기 마공탑에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로타크가 짜증스럽게 문을 박차고 나섰다.
“상관없다. 어차피 전부 내 손으로 돌아올 테니까…”
지금 첩자를 색출하는 건 무리다.
시간이 걸릴뿐더러 도대체 누가 첩자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기다려라. 그 입술을 찢어발겨 주지.”
헤미스의 목을 친다.
마왕의 허락 따위 필요 없다.
오히려 마왕에게 접촉하는 순간 정보가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거사를 치른다.
뒷수습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너희들의 몸을 엮어서 최고의 키메라를 만들어 주마!”
로타크의 붉은색 눈알에서는 더 이상 이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
최현석은 헤미스를 따라 이동했다.
흑색 거성으로 돌아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간이동 게이트가 복구됐기에 채 30분이 흐르기도 전에 최현석은 흑색 거성 광장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럼 가봐. 아직은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
헤미스가 손을 흔들었다.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려는 듯했다.
최현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헤미스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니?”
“로타크 군단장 있지 않습니까?”
최현석의 입에서 ‘로타크’란 이름이 나오자 헤미스가 히죽 웃었다.
“로타크가 왜?”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오호~ 눈치챈 거야?”
“예?”
“제법이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헤미스의 반응은 마치 로타크가 벌일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참 야속해. 그렇지 않니? 다들 나이가 들면 잔머리만 늘어서 후회할 선택을 한다니까.”
“…”
“로타크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미 알고 있거든. 오히려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네.”
헤미스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요즘 들어서 재미있는 일이 정말 많이 벌어진다니까! 이게 전부 네 덕분이야. 최현석.”“하하하… 그렇습니까?”“당연하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헤미스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요청한 것이다.
최현석은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새하얗고 길게 뻗은 손가락.
손만 보면 절세 미녀의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최현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악마랑 계약한 느낌이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