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94)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94화(94/273)
같은 시각.
로타크와 헤미스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저 아래 지상에서 치열한 전투의 소음이 들려왔다.
둘은 자신과 무관한 일인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로를 응시할 뿐이다.
어차피 전장의 승패는 이곳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찍찍! 각오는 됐겠지?”
“각오?”
“찢어 발겨질 각오 말이다. 네년을 갈가리 조각낸 다음 새로운 키메라의 재료로 쓸 생각이다.”“오호호! 우리 로타크 입이 많이 거칠어졌네?”“닥쳐라! 그 불쾌한 입술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로타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가 옆에 서 있던 박현아에게 소리쳤다.
“박현아! 움직인다. 같이 저 괴물 같은 년을 처리하는 거다.”
로타크가 생각하기에, 이미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무려 군단장 둘의 협공이다.
아무리 헤미스가 강하다 한들 군단장 둘을 이길 정도는 아닐 터.
그러나 박현아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는 무언가에 놀라기라도 한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 갑자기 배가 고프네.”
“응?”
“나는 원래 배가 고프면 힘을 못 내는 타입이라.”“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볼일들 봐. 나는 집에 가서 라면 좀 끓여 먹고 와야겠다.”
박현아가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떠나갔다.
로타크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한동안 멍하니 멀어지는 박현아의 등을 바라본다.
“어머? 어떡하니. 지원군이 가버렸네?”
헤미스의 목소리에 웃음기 섞여 있다.
로타크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 년들이 설마…”
“이제 상황 파악이 되니?”“감히 나를 배신해?”“배신한 건 너겠지. 오호호호!”
헤미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로타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뚜둑 하고 끊어졌다.
“끄아아! 박현아!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죽여주마! 죽여버리겠어! 네년들을 전부! 찢어발겨 카펫으로 만들어주마!!!”
로타크의 괴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군단장급 마기가 담긴 외침은 전장의 폭음을 뚫고 모두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벌벌 떨릴 정도의 엄청난 마기.
그러나, 원인의 제공자인 박현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응~ 엿먹어~”
올라가는 가운뎃손가락.
그걸로 끝이었다.
박현아는 사라졌고.
이곳에는 로타크와 헤미스, 둘만이 남게 됐다.
“로타크. 준비는 잘 해왔니?”
헤미스가 히죽 웃고.
로타크는 이빨을 바드득 갈았다.
“아주 여유가 넘치는군. 찍!”“상대가 너인데 긴장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니? 오호호!”
헤미스가 입술을 가리며 하이톤으로 웃는다.
그녀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로타크는 애초에 군단장 중 최약체로 평가받는다.
그에 반해 헤미스는 군단장 중 최강.
그 힘은 마왕에 비견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았다.
긴장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백 년 전과 같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어머. 우리 로타크가 아직 성장기였나? 수염도 희끗희끗해진 게 걸어 다닐 힘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헤미스의 말대로다.
로타크는 이미 노화로 인한 쇠퇴를 겪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위 마족의 성장기는 백 년에서 백오십 년 사이.
그 시기가 끝나면 육체와 마기의 성장은 멈춘다.
그때부터는 기술적인 것을 갈고닦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술이 완숙되고.
삼백 년 정도가 지나면 노화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마족은 더 강해지지 않는다.
내리막길만 남은 것이다.
헤미스처럼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자가 있긴 했으나, 이것은 예외 중의 예외.
로타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나는 늙었다. 괴물 같은 네년과 달리 노화는 피해 갈 수 없었지.”
현재 로타크의 나이는 약 400살.
마족에게 정점이라 할 수 있는 300살은 한참 지났다.
인간으로 치면 70세가 넘은 노령이라 할 수 있었다.
전성기인 300살 무렵에도 헤미스에게 뒤쳐졌던 로타크다.
늙을 대로 늙어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의 그가 헤미스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없다.
“미리 말해두는데, 포기하지 말렴. 항복한다 해도 살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최대한 발악해줘.”
헤미스는 여유로웠다.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크크큭… 여유만만하군. 당연한 일이지. 찍! 늙은 마족이 어떻게 고대의 괴물을 이기겠나.”
로타크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몸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온다.
아무리 쇠퇴기라 해도 군단장에 이르렀던 힘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간의 영웅 정도는 순식간에 갈아 마셔버릴 힘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 사실을 로타크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백 년간 내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마.”
로타크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위이이이잉…!
그의 몸 안에서 복잡한 기계장치들이 돌아간다.
마기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장치.
대륙에서 가장 발달된 마도 공학 기술을 지닌 로타크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정수 그 자체였다.
철컥, 철컥, 철컥!
로타크의 몸 밖으로 온갖 전투 장비들이 뻗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헤미스의 미소가 짙어진다.
“호오~ 재미있어 보이는데?”“이걸 맞고도 재미있어할지 모르겠군.”
로타크의 몸에서 뻗어 나온 무기 중 가장 거대한 것.
흡사 전함의 함포와도 같은 외형을 지닌 곳에서 마기가 폭사됐다.
***
제12사단장 게일다오.
그는 제2군단에서 가장 열렬하게 로타크를 지지하는 사단장이었다.
마왕군에서 핍박받던 그의 일족을 구한 것은 물론, 사단장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이 모두 로타크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로타크를 향한 그의 충성은 일종의 신앙에 가까웠다.
때문에 이번 일이 벌어졌을 때도 그는 일말의 의심 없이 로타크를 따랐다.
오히려 로타크의 작전을 반기기까지 했다.
“붉은 악몽 레이드런이라… 언젠가 부숴보고 싶은 놈이었습니다.”
레이드런의 이름은 인간뿐만 아니라 마왕군 내에도 제법 알려져 있었다.
그 헤미스의 유일한 심복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단장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가 ‘붉은 악몽’이란 이명(異名)을 지니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
이명이란 별명 혹은 별호와도 같은 것.
혁혁한 전과를 세우거나, 누구나 알 법한 강자에게 붙는다.
12사단장인 자신도 없는 이명이 한낱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레이드런에게는 있다.
게일다오는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로타크가 제안을 했을 때 게일다오는 레이드런을 철저히 부셔주리라 다짐했다.
“직접 찾아와 주니 고맙군그래.”
그의 눈앞에 이번 작전의 목표인 레이드런이 서 있었다.
자신이 찾아 나서기 전에 먼저 찾아온 것이다.
“크큭! 붉은 악몽이라. 나 게일다오가 진짜 악몽이 뭔지 보여….”
게일다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레이드런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직! 퍼억! 콱!
“자, 잠깐!”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어디서 뭐가 날아오는지도 알 수 없다.
붉은 악몽은 그저 무심하게 손과 발을 휘두를 뿐이다.
콰앙! 퍽! 뿌드득!
“일단 말을…”
게일다오의 몸이 피떡이 되기 시작했다.
반격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다.
공격에 머리가 진탕돼 도저히 마기를 운용할 수 없었다.
콰득! 칵!
“꺼, 꺼억…”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게일다오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
레이드런은 한 손으로 게일다오의 머리를 집어 들어 올렸다.
“한심하군.”
“사, 살려…”
“감히 헤미스 님께 반기를 든 자. 각오는 됐겠지.”
레이드런이 서서히 게일다오의 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몸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잡아당긴다.
뿌드득…!
척추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게일다오의 눈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머, 멈춰…!”
“멈추란다고 멈추는 멍청이가 존재하나?”파악!
게일다오의 머리가 산채로 뜯어졌다.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흩뿌려진다.
뽑혀 나온 머리 아래쪽으로 척추가 길게 매달려 있었다.
레이드런은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전장에서 붉은 악몽이라 불리던, 레이드런다운 마무리였다.
‘정말 한심한 놈이군.’
사단장급의 마기를 지녔음에도 놈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지닌 힘의 절반도 내지 못한 것이다.
‘실전 경험의 부족, 그리고 지나치게 과분한 능력을 받은 거겠지.’
레이드런의 삶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전장에서 수없이 싸우고 싸워 한계를 깨부쉈다.
그러나 게일다오는 다르다.
로타크의 도움으로 능력을 개발시켜 사단장에 오른 그는, 이후에는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았다.
호가호위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린 것이다.
아무리 강대한 힘이라도 그것을 쓰는 게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마왕군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감히 헤미스에게 반기를 들다니.
그러면서 최소한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
오만함과 멍청함의 대가는 죽음으로써 갚을 뿐이다.
“뭐야. 벌써 끝났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박현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여차하면 도와주려 했더니, 뭐 이렇게 빨리 끝나? 그래도 같은 사단장급인데.”“별거 아닌 놈이었습니다.”“하긴, 너야 워낙 별종이니까.”
박현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빛과 함께 마기가 폭사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헤미스와 로타크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으음…”
레이드런이 침음 했다.
예상보다 로타크의 힘이 더욱 강력했다.
헤미스가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전황도 헤미스가 조금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드런이 박현아를 돌아봤다.
“도와주지 않으시는 겁니까?”“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주둥이가 나서지 말라잖아.”
“그렇습니까…”
“너도 괜히 끼어들 생각 하지 말고 지켜보기나 해. 어차피 네가 들어가 봤자 개죽음이야.”
레이드런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박현아의 말은 정론이었다.
성장한 레이드런이 사단장급 무력을 거머쥐었다고 해도, 군단장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다.
마왕군에 단 다섯뿐인 군단장.
인간으로 치면 영웅을 넘어서 전설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이들의 전력은 일만의 군대를 뛰어넘는다.
걸어 다니는 전략 무기.
상황에 따라서는 단신으로 국가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군단장을 잡기 위해서는 같은 군단장급이 오거나, 혹은 철저한 준비를 마친 뒤 함정에 빠뜨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쥐새끼랑 주둥이가 싸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박현아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녀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군단장 사이에도 엄연히 급이라는 게 존재한다.
군단장 중 최약체인 로타크.
군단장 중 최강인 헤미스.
둘의 싸움은 절대 성립이 되지 않을 것 같았으나, 예상이 빗나갔다.
‘진짜 쥐새끼가 단단히 준비하긴 했네.’
로타크의 전력이 예상외로 너무 강했다.
저 정도면 박현아 자신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것 같았다.
헤미스 다음으로 강하다고 평가받는 제1군단장 도리투그스.
놈과 필적할 수준의 강함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가. 이 정도 준비도 없이 주둥이를 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로타크는 헤미스를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 왔었다.
헤미스의 무력에 대해서라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헤미스를 친다는 판단을 한 건 그만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봤자 부질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박현아가 피식 웃었다.
이러나 저라나 로타크가 패배한다는 것은 정해진 결과였다.
최근 다시 한번 헤미스와 싸운 후 그녀는 확실히 알았다.
헤미스는 강함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수준이다.
로타크가 무슨 준비를 하든 헤미스를 이길 수는 없다.
지금 전황은 헤미스가 지금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틀렸다.
‘저년은 그냥 즐기고 있는 거야.’
로타크가 박현아에게 헤미스를 치자는 제안을 했을 때.
박현아는 역으로 헤미스에게 정보를 흘리고 같이 로타크를 처리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헤미스는 반대했다.
“혼자 먹을 것도 없는데 뭘 나눠 먹니? 그러면 간에 기별도 안 가.”
“미친년…”
헤미스는 유흥거리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로타크가 일으킨 이번 사건은 그녀를 퍽 유쾌하게 만들었다.
‘결국,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거지.’
로타크가 무슨 준비를 했든.
어떤 기상천외한 공격을 하든 상관없다.
저 거대한 입술을 가진 괴물에게는 그저 잠깐의 유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