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ll Heroes From Earth Are Bad RAW novel - Chapter (98)
세상에 나쁜 용사는 없다-98화(98/273)
“저 개새끼들이!”
최현석이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목책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마력이 느껴졌다.
이제까지는 숨겨 왔는지 모르겠지만, 공격이 시작된 이상 놈들도 더는 마력을 감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찍찍! 뜨겁다! 뜨거워!”
“도망쳐야 한다!”
테포들이 불길을 피해 목책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친 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죽음의 사자다.
그 사실을 아는 최현석은 필사적으로 테포들을 막았다.
“안 돼! 나가면 안 된다고!”“찍찍! 도망쳐라-!”
“살려줘어!”
그러나 이미 이성이 마비된 테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전투와는 거리가 먼, 평화에 찌든 일족이다.
불길이 치솟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옆에 있던 라헬이 발을 동동 굴렀다.
“용사님! 이러다 전부 죽겠어요!”
“나도 알아!”
최현석 혼자서는 사방으로 도망치는 테포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이 사태를 일으킨 인간을 잡아 족치면 된다.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혼란이 찾아왔다.
‘뭐가 옳은 거지?’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저들은 최현석이나 아벨슨을 노리고 온 게 아니라, 마족을 사냥하기 위해 왔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본분을 다 하는 것이고, 최현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발! 모르겠다!”
최현석이 땅을 박찼다.
한가하게 사색에 잠겨있을 여유 따윈 없다.
인간과 마족을 떠나서 이런 학살극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일단 움직인다.
‘일일이 잡아서는 끝이 없어. 지휘관을 잡아 족친다.’
모여든 인간은 얼추 오백.
대대 규모였다.
전체 인구가 고작 200명도 되지 않는 테포는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사방에 테포의 비명과 피가 끊이질 않았다.
“죽여라!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
최현석의 눈이 빛났다.
저놈이다.
저기서 칼을 들고 소리 지르는 남자가 지휘관이다.
느껴지는 마력도 단연코 압도적이었다.
‘쉽지 않겠어. 제압은커녕 이기는 것도 힘들겠는데…’
남자의 마력은 최현석의 마기 총량과 엇비슷했다.
싸워서 질 것 같진 않았지만,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불필요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하하하! 마족을 죽여! 모조리 불태우고 썰어…!”
소리치던 지휘관이 덜컥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2.5m가 넘어가는 거대한 근육질의 소대가리가 서 있었다.
“어…?”
들어본 적 있다.
붉은 피부.
거대한 근육.
머리 위로 솟은 뿔에서는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붉은 악몽…”
파앙!
레이드런의 주먹질에 지휘관의 상반신이 터져나간다.
허리 위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휘관이 털썩 쓰러지고.
이후로 또 다른 학살이 시작됐다.
“끄아아악! 도망쳐!”
“붉은 악몽이다!”
“사, 살려… 컥!”
레이드런은 무자비하게 적들을 학살했다.
팔을 잡아 부서뜨리고, 머리를 몸통에서 뜯어낸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은 붉은 악몽 레이드런이었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우드득!
한 병사의 머리통을 악력으로 쥐어 부스는 레이드런.
그의 손짓에는 드물게 분노가 어려 있었다.
항상 기계처럼 학살을 자행하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살려주십쇼!”
“너는 마족을 살려두나?”
“그건…!”
“원망하지 마라. 나도 너희를 원망하지 않으니.”
그날, 산에서 살아나간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
날이 밝았다.
테포 일족이 머물던 작은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처참하네…”
살아남은 테포 일족은 채 스물이 되지 않았다.
이백 마리에 가까웠던 일족
대부분이 몰살당한 것이다.
물론, 인간 측에서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저 죽음과 죽음.
남은 것은 시체뿐이었다.
“…”
아벨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오백에 달하는 인간의 죽음보다 마족
이백의 죽음이 더욱 슬펐기에.
아벨슨 마리어트가 감정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최현석은 레이드런, 로이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아직 여기는 마왕군의 영역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최전방은 마왕군과 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어제는 마왕군의 요새가 다음날은 인간의 요새로 변모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최전방과 가깝긴 해도, 아직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군대가 이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놈들은 이런 작전에 익숙한 듯 보였습니다.”
로이거가 말했다.
그 말대로 인간의 군대는 이런 포위 섬멸 작전에 제법 능숙했다.
즉, 이런 학살극을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곳에 최현석 일행이 없었다면 필시 테포 일족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몰살당했으리라.
‘이해할 수 없군. 8사단은 뭘 하고 있는 거지?’
레이드런 또한 상황이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8사단 관할 구역 중에서도 가장 후방이다.
즉, 8사단이 사라지지 않은 이상 인간이 이런 후방까지 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정말 8사단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인가?’
일주일 동안 도보로 이동하느라 부대와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작 일주일 사이에 사단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당장 가드락 성으로 간다.”
결국, 답은 하나다.
제8사단 본부 가드락 성.
그곳에 가 보면 진실일 알 수 있을 터였다.
***
분노한 일행은 한달음에 가드락 성까지 달려갔다.
당장에라도 8사단장을 만나 따져들 기세였으나, 막상 가드락 성에 도착하니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
“용사님. 여기 분위기 뭔가 으슬으슬하지 않아요?”
라헬이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가드락 성은 위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거대한 성과 그를 둘러싼 두꺼운 성벽.
그곳에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까아아악-!”
전장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일행을 가로막았다.
“들어간다.”
먼저 나선 건 레이드런이었다.
그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문 앞에 섰다.
“누구냐!”
“레이드런이다. 문을 열어라.”
통과 절차는 예상외로 간단했다.
레이드런을 알아본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간단한 통과 의례를 거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의외의 인물이 일행을 맞이했다.
제8사단장 그라트.
그가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크다…’
최현석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8사단장 그라트는 엄청난 거구였다.
레이드런을 압도하는 키와 덩치.
거기에 주둥이가 긴 악어 머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었다.
심지어 한쪽 눈에 칼자국이 길게 나 있는 애꾸였는데, 초점 없는 하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레이드런이 일행을 대표해 앞으로 나섰다.
“제8사단장님을 뵙습니다.”“레이드런.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군.”
그라트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봐도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레이드런 뒤쪽에 있는 일행을 훑었다.
‘용사님. 대놓고 미움받는 것 같은데요?’
머릿속에서 라헬의 음성이 들려왔다.
최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그라트는 제법 불만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최현석과 아벨슨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젠 뭐 놀랍지도 않다.’
최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디를 가든 적의를 가진 이들이 넘쳐났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악어 대가리가 사단장이라는 것이고.
최현석이 살기 위해서는 놈의 눈밖에 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레이드런. 네가 이곳에는 웬일이냐. 뒤에 인간까지 주렁주렁 달고.”
그라트가 말했다.
“군단장님의 명령입니다.”
“명령?”
“예. 자세한 건 따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내 집무실로 와라.”
그라트가 돌아섰다.
곧바로 집무실로 향할 생각인 듯했다.
레이드런이 일행을 돌아봤다.
“잠시 기다려라. 사단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올 테니.”
***
그라트의 집무실.
레이드런의 분위기는 어딘가 미묘했다.
항상 예의를 중시해 상관에게 깍듯한 모습만 보이던 그였으나, 지금은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령에 관해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레이드런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라트를 바라봤다.
“오늘 길에 인간의 군대와 마주쳤습니다.”
“그런가.”
“곳곳에서 마을이 불타고 군인이 아닌 주민들이 죽고 있더군요.”“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라트의 표정은 덤덤했다.
“제8사단은 뭘 하는 겁니까.”“가드락 성을 지키고 있지.”“인간이 집 안마당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막지 않는 겁니까.”“막을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버티는 게 고작이야.”
그라트의 태도는 당당했다.
얼굴에서는 한 점의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태연함이 레이드런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유가 뭡니까.”
“이유? 이유라고 했나? 하하하!”
순간 그라트가 큰 소리로 웃는다.
“재미있군. 네가 한번 맞춰봐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정확히 8일 전이다. 인간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됐지.”
8일 전이라는 말에 레이드런의 얼굴이 굳었다.
반대로 그라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눈치챘나?”
“설마… 흑색 거성에서의 전투 때문입니까.”“그래. 8일 전 인간의 공습이 시작되고, 동시에 제2군단에서 오던 보급과 지원이 끊어졌다.”
레이드런은 상황을 파악했다.
8일 전이라면 헤미스가 제2군단장인 로타크를 죽인 날이다.
군단의 핵심인 로타크와 스케빈 일족이 몰살됐으니, 제2군단은 마비됐을 것이고.
그 틈을 노려 인간이 진군했다.
레이드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첩자가 어디까지 들어와 있단 말인가…!’
로타크가 죽은 게 영원한 비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다.
로타크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군한 것.
미리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해도 이 남자는 여전하군.’
레이드런이 눈앞의 그라트를 응시했다.
군에 300년간 종사하며 사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이 마족은 모순적이게도 전혀 마족답지 않았다.
겉으로는 호쾌한 전사인 듯 보이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늙은 여우다.
전황이 불리해지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가드락 성에 처박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마왕군 지휘관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적과 싸웠을 것이다.
“전황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지. 지금은 그 명령이라는 걸 듣고 싶은데.”
그라트가 말했다.
그는 처음 레이드런이 명령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드런이 품에서 명령서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가드락 성을 제3군단의 임시 본부로 사용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라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이냐?”
가드락 성은 제8사단의 본부다.
그곳을 제3군단 본부로 사용한다면 8사단은 갈 곳이 없다.
“혹시 사단 본부와 군단 본부가 합쳐지는 건가?”“아닙니다. 사단장님께서는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 본부를 마련하시면 됩니다.”“그게 무슨 헛소리냐!”
참다못한 그라트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단 본부를 써야겠으니 떠나라니.
아무리 상급 부대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인간의 칼날이 턱밑까지 다가온 상황.
제8사단 전체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 이 가드락 성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헤미스 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거기에 대해서는 헤미스 님께서 미리 남겨두신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지금부터 할 말은 제가 아니라 헤미스 님의 말을 그대로 읊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레이드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악어 대가리. 내가 찾아갈 때까지 가드락 성에 눌어붙어 있으면 각오해.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가방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레이드런은 정말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순간 레이드런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라트의 얼굴이 점차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레이드런. 너 이 새끼…”“이른 시일 내에 가드락 성을 비워주시길 바랍니다. 그라트 사단장님.”
레이드런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떠나갔다.
***
레이드런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우르르 다가왔다.
최현석이 대표로 나서 물었다.
“이야기는 잘 되셨습니까?”
레이드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간략하게 그라트와 나눴던 대화를 전달했다.
“8사단장은 여우 같은 자다. 쉽지 않을 거야.”
“그렇군요…”
“최현석. 혹시 헤모른 요새를 기억하고 있나?”
최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모른 요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가 처음으로 이세계에 떨어져 노예 생활을 하던 곳이었으니까.
“그때 우리 마왕군은 대패하고, 지휘관만 살아 겨우 도망쳤지. 덕분에 헤모른 요새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인간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어… 설마…?”
“그래. 그때 전투를 지휘한 지휘관이 제8사단장 그라트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흑색 거성에서 헤미스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이런 말을 했었다.
“8사단장. 그 악어 대가리가 염치도 없이 살아 돌아왔더라고?”“그래서 가죽 백(bag)으로 만들어줄 생각이야. 요즘은 악어 대가리로 만든 게 유행이거든. 호호.”
무심코 흘려들었던 말인데, 이런 내막이 있는지 몰랐다.
“그럼 앞으로 어떡합니까?”“그라트 사단장이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달렸지. 아마 순순히 떠날 것 같지는 않다.”
제8사단장은 머리가 영민한 자다.
안전한 이 가드락 성에서 떠나지 않으려 할 게 분명했다.
“만약 그가 떠나지 않는다면…”“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레이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석의 말처럼 그는 전투를 각오하고 있다.
늘 마왕과 군에 복종하는 레이드런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그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무능한 지휘관은 사라져야 한다.’
헤미스에게 주입식 교육을 받은 레이드런.
그는 자신의 상관 헤미스처럼 무능한 지휘관을 끔찍이도 혐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