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ist Running Through Time RAW novel - Chapter (185)
시간을 달리는 소설가 185화
구학준 교수가 부커 인터내셔널 롱리스트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마침 출판업계 종사자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였다.
백학문고 임원으로 승진한 임양욱은 옛 인연을 모아 출판매니지먼트 부서를 확대시켰는데, 내게 그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려 했다.
그래서 소고기 사준대서 쫄래쫄래 나갔더니 양복쟁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어느새 높으신 분이 된 임양욱은 회식자리 상석에 앉아 있었다.
내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룸에 들어온 걸 보자마자, 자기 옆자리 방석을 툭툭 두드린다.
“어어, 왔냐? 여기로 오도록 해.”
“……왜 이렇게 사람이 많나요?”
“내가 고기 사준댔지 회식이 아니라곤 안 했다.”
“또 비열한 술수에 당했군…….”
툴툴거리면서도 못 이기는 척 앉았다. 고기에는 죄가 없었으니까.
임양욱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사람들을 소개시켜줬다.
“여기 이분들은 출매부, 아니, 출매본 직원들이야. 나랑 옛날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있고, 백학엔터에서 새로 보내준 전문인력도 있고.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임양욱은 그 다음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기 이 쪼끄만 고딩은 문인이라고 해. 휴고상을 타왔어.”
“우와아아-! 박수!”
치세의 간신이자 난세의 간신인 김가륭 팀장이 잽싸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사람들은 휴고상 수상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표했다.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기쁘지 않았으니까.
내가 가장 기뻐한 문학상은 옛날에 탔던 백학문학상이다. 그 문학상에는 내 기나긴 실패가 끝났으며, 문단이 나를 정식으로 등단한 소설가로 받아들인다는 인정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휴고상에 담긴 것은 임양욱의 비즈니스 전략, 그리고 미국에서 겪은 기나긴 언론플레이의 피곤함이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그래서.
별다른 감흥 없이 임양욱 옆에서 고기나 구워 먹었다.
다만 때때로 내게 날아오는 질문들에 무난한 대답을 돌려줘야 했는데, 눈치껏 1인 1질문을 했는데도 결코 질문이 적지 않았다.
문득 임양욱이 부하로 부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언제 이렇게 많이 늘어났나 싶다.
“출매본이라… 저번에는 무슨 사내벤처 대표라고 하지 않았어요?”
“출매본이 바로 그 사내벤처야. 서류에는 BH 에이전시라고 쓰고 읽기로는 백학문고 출판매니지먼트본부라고 읽지.”
“복잡하네요.”
“네가 나랏돈을 빼먹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에 대해 뭘 알아!”
“역시 슈킹이었나…….”
고기를 굽던 김가륭 팀장이 진땀을 삐질 흘리던 그때.
테이블 한구석에서 감탄과 경악에 가까운 비명이 들려왔다.
“우아아악-!”
“이크!”
깜짝 놀란 임양욱이 들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렸다.
“신성한 소고기 앞에서 누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 왜? 뭔데?”
“지금 부커상 1차 후보 발표 떴는데… 구학준 작가님이 뽑혔어요!”
흥분은 삽시간에 테이블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들 출판업계 사람인 데다, 구학준은 현재 백학문고와 계약하고 있었으므로 남의 집 경사慶事도 아니었다.
회식 장소는 금세 축제 분위기가 됐다.
그 시끄러운 축제 한복판에서, 임양욱은 간신히 질문 하나를 던졌다.
“뭐가? 뭐가 뽑혔는데?”
부커상은 작가가 아니라 책에게 주는 상이다.
이사의 질문을 받은 직원이 황급히 시선을 핸드폰 액정 속 뉴스로 돌렸다.
그러나, 대답은 내 입에서 먼저 나왔다.
“……실버 문?”
무심코 내뱉은 정답이 소란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내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리고 오디션 프로그램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핸드폰을 든 직원을 응시했다.
“시, 실버 문…! 맞습니다!”
“…!!!”
순식간에 쏟아지는 초롱초롱한 시선.
사람들은 내게서 천재의 편린이라도 엿본 것처럼 눈동자를 반짝였다.
당황한 나머지 임양욱을 붙들었는데…
임양욱의 눈빛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 어케 알았냐…?”
“…….”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도 실버 문>이었으니까 알지.
“……뭐랄까. 그런 느낌이 왔다고나 할까요. 언젠가 큰 상을 탈 작품이라고는 옛날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정말 천재긴 천재구나……!”
EP 11-만종
로또 번호도 모르는 영양가 없는 시간여행자 주제에 간만에 예언자 노릇을 했다.
그렇다.
구학준의 소설 실버 문>이 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건 이미 있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놀라움이 아니라 ‘아 그게 올해였나-’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뒤늦게 놀라움이 느껴진다.
‘이미 일어났던 일이 변하지 않고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다.
“명작은 역시 언젠가 뜨는 건가…….”
명작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얼핏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안다.
백학문학상을 받고 좋아서 방방 뛰던 문학도는 휴고상을 받고서도 무덤덤한 소설가가 되었다.
명예와 영광에 익숙해진 오만한 천재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조차도 허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시데하라 에이사쿠가 부커 국제상 수상에 실패했을 때부터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문학상의 심사위원들마저도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 추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데하라 에이사쿠는 몇 년 더 살았다. 그리고 그 몇 년 동안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했고, 완전히 새로운 소설을 하나 써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나는 시데하라의 마지막 신작을 아직도 끼고 다닌다. 시대가 참 좋아서 핸드폰 안에 넣고 다니면 그리 무겁지도 않다. 스마트폰이 출판업을 죽인 일등공신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변화가 탄생했다.
어째서 탄생이란 단어를 쓰냐면, 내가 일으킨 변화가 변화를 낳고, 그 변화가 새로운 변화를 낳아서다.
그런 변화는 셀 수도 없고,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그야말로 천변만화하는 세상이다.
그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구학준의 ‘실버 문’이 자신의 운명을 되찾았다는 건, 놀랍지 않아 보여도 사실 놀라야 할 일이었다.
나는 뒤늦게나마 놀라기 위해 ‘실버 문’을 재독하기로 했다.
분명 은피증Argyria에 걸려 푸른 피부를 가지게 된 인간을 소재로 삼아 인종 문제를 다룬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명작인 데다가 10년 전 소설이라 내 책장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법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내가 요즘 감금을 당하는 중이라 작업실 책장을 뒤적거리기가 힘들다.
“으음.”
어떡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E북으로 새로 사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데 쓰는 돈은 아까워도 책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구매하고, 독서를 위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서 정좌했다.
정좌正坐란 바른 자세를 뜻하고, 책 읽을 때 바른 자세란 역시 편한 자세다.
그래서 나는 이불을 둘둘 말고서, 핸드폰을 붙잡고 납작 엎드렸다.
방정아 선생님이 보면 ‘허리 나빠진다!’는 잔소리가 줄줄줄 튀어나올 법한 자세였다.
하지만 역시.
감방은 책 읽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인섭아! 학교가자!”
“끄응…….”
새빛늘봄보육원에 감금된 지 3일째.
자꾸 학교에 가자는 문지섭이 곤란하다…….
* * *
올해, 백학예고 문창과 경쟁률이 전국 최상위권을 찍은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적어도 올해는, 백학예고 문창과가 기라성 같은 예술학교들을 전부 제쳐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문인 때문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 소년을 교실에서 만날 기회만 아니었다면, 아이돌 사관학교 취급 받는 백학예고가 기라성 같은 예술학교들을 제칠 수는 없었으리라.
‘문인…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써?’
경기도 안산의 안주희 역시 문인이라는 미끼 상품에 홀려 백학예고로 진학한 문학도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가 품은 감정은 선망이나 동경 따위가 아닌, 불타오르는 호승심이었다.
‘어디 한 번 붙어보자고.’
안주희의 투쟁심은 결코 만용이 아니다. 이는 그녀의 기나긴 수상 실적이 증명한다.
경기도지사배 문학상부터 강원도지사배 백일장에 이르기까지. 전국 팔도의 문학상을 전부 휩쓸고 다닌 안주희의 필력은, 그야말로 도내 최상위 랭크!
어디 이상한 기독교 보육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미친놈 하나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휴고상까지 받아와서 그렇지, 안주희 정도면 S급 유망주가 맞았다.
정말로 문인만 아니었다면 백학예고 문창과 ‘따위’에 원서를 넣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인 것이다.
그런고로 올해 한정으로 경쟁률 1위를 찍은 백학예고 문창과 입시도 안주희의 앞길을 가로막진 못했다.
부족한 필력을 비겁하게 성적으로 대체한 사문난적 문O섭과 달리, 안주희는 문풍당당히 실기 만점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백학예고 문짝 뿌시고 들어간 안주희는…….
당근마켓 프로필 사기를 당한 기분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씨발……’
문인 때매 들어간 학교에 문인이 없다.
* * *
소설가는 성질이 더럽다.
소설가 지망생은 소설가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프로에 가까운 지망생일수록 성질이 더럽다는 논리적 결과가 도출된다.
(경기)도내 최상위 랭크 문학도인 안주희 역시 한성깔 하는 편이었다.
안주희는 이 부당한 현실을 얌전히 참아 넘기지 않았다.
“선생님!”
그녀는 백학예고 문짝 뿌시고 입학한 것처럼 교무실 문짝 뿌실 기세로 찾아갔다.
그리고 왠지 교과서에서 자주 본 것 같이 생긴 담임선생님에게 항의했다.
“이게 교칙상 용납이 되는 일인가요?!”
“되는디?”
된단다.
믿기지 않아서 찾아봤더니 진짜다.
“아니 이게 왜 진짜야?”
그랬다.
이 빌어먹을 삼류 꼴통 학교는 현직 연예인들 뒤치다꺼리하려고 출결 기준을 극한까지 널널하게 풀어 놓은 것이다.
얼마나 교칙이 맛탱이가 갔냐면, 지 멋대로 결석해도 회사에서 서류 하나 띡 보내주면 출석이었다.
괜히 아이돌 사관학교 거리는 게 아니었다. 여긴 진짜로 백학엔터가 파놓은 멀티였다…….
‘자퇴하고 싶네, 젠장…….’
안주희의 자퇴 의욕을 고취시키는 건 허접스러운 교칙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반 애들도 충분한 ‘자퇴 이유’가 되어주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찝어보자면,
옆에 앉은 사내놈이랑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기지배들이 문제다.
이 세 명의 연놈들은 학기 초부터 절친이 되어 시종일관 쉬지 않고 주둥아리를 나불거렸다.
“그러니까 문인 걔가…….”
“문인이 중2 때 저질렀던 사고가 있는데…….”
“인섭이가 옛날에 나한테 뭐라고 그랬었냐면…….”
하필 여자애 둘은 문인의 중학교 동창이고, 남자애는 심지어 문인의 보육원 동창이란다.
세 명이서 그 짜증나는 문인 이야기만 24시간 반복하고 있으니 열불이 안 날 수가 없다.
사실 4명이 같이 앉았는데 혼자만 겉돌고 있으면 본인한테 뭔가 잘못된 점이 있나 살펴야 정상이지만, 안주희는 빼어난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성깔도 빼어나게 더러웠다.
“너희는 문인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니?”
“응?”
“지 잘났다고 학교도 안 오는 애 빨아주는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안 질려?”
표독스러운 이니시에이팅에 두 여학생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기가 세 보이는 여학생은 친구를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를 했고, 유약한 인상의 여학생은 친구 뒤에 숨으면서도 이제부터 문창과에 음습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안주희를 매장시켜 버릴 작정을 했다.
하지만 ‘어딘가 성격 꼬인 녀석이 갑자기 급발진을 박는 일’에 가장 익숙한 것은 새빛늘봄보육원에서 살아남은 문지섭일 수밖에 없다.
보육원생들은 기본적으로 정서 불안과 애정결핍을 패시브로 달고 있다.
말 그대로, 부모님이 선물해준 정신적 질환이다.
그러므로 문지섭은 관심과 친구가 고픈 금쪽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종의 비기秘技다.
이름을 붙이자면…….
문가文家, 태극권太極拳.
“얘들아 주희가 할 말 있대!”
“……?!”
“다들 조용! 안주희님 말씀하신다! 주목!”
공격력은 높지만 방어력은 낮은 안주희는 물 흐르듯 돌아온 반격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니, 나, 나는, 그게…….”
“그게?”
“나는 그, 그, 그으, 한 번도 문인 본 적도 없는데…….”
“없는데?”
“맨날 너희들끼리만 문인 얘기하니까…….”
“문인 말고 다른 이야기로 우리랑 친구가 되고 싶었다?”
“뭐, 뭐래, 아니거든?!”
“그럼 우리랑 친구가 되기 싫다? 원수가 되고 싶다? 싸우자는 거냐?”
“그, 그건 아니고……!”
“그럼 이제부터 우린 친구네?”
“……?”
문지섭은 유려한 언변으로 눈앞의 여학생이 ‘친구 하자’는 말을 ‘니들은 온종일 문인만 처 빨고 있으면 기분이 좋냐?’고 말하는 특이한 병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까칠하게 시비를 걸어온 이상한 녀석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두 여학생도, 의외로 안주희가 패는 맛이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그 정도면 친구가 될 이유로는 충분하다.
그렇게 우연히 둘러앉은 네 명의 고등학생은 문예창작과에서 한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어이, 네놈들. 경기도 안산의 안주희 앞에서 문인 이야기를 꺼내지 마라…….”
“안주희는 언젠가 문인을 꺾을 여자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몇 주가 지났을 때는 그들끼리 안주희가 처음 보여줬던 히스테리를 끄집어내서 놀릴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쌓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타협할 수 없는 논쟁 거리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바로 문인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다.
백학예중 문창과 출신의 두 여학생, 그리고 문지섭과 달리, 안주희는 문인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안주희에게 문인은 그야말로…
“이거 완전 양아치 새끼 아니야?”
불량아였다.
역시나 친문親文 문지섭이 가장 먼저 변호하고 나섰다.
“문인이 학교도 대놓고 째고 선생님 말씀을 개좆으로 알긴 해도 불량아는 아닌데…….”
“넌 네가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점을 못 느끼니?”
안주희가 문인이랑 맞짱 까려고 명문고 포기하고 백학예고 왔다지만, 정말로 그 감정이 단순한 호승심일 수는 없다.
그 호승심의 뒷면에는 당연히 동경도 있고, 의심도 있고, 친해지고 싶은 맘도 있고, 팬심도 살짝 있고, 질투도 있고, 호기심도 있다.
그 복잡한 감정이 문인의 실종으로 인해 증오로 수렴했으니, 어느새 안주희는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반문反文으로 거듭나 버렸다.
“우리 인섭이는 그런 애 아니라니까?!”
“하! 내가 봤을 때 문인 걔가 학교 안 오는 가장 큰 이유는… 우월감 때문이야. 동갑내기들이 아마추어 리그에서 박박 길 때 지 혼자 프로 리그에서 논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문인이 정말 그런 생각을 가졌는진 모르겠는데, 만약 안주희 네가 문인 처지였으면 그런 음습한 생각을 가졌을 거라는 게 뻔해서 기분 나빠.”
“……?!”
안주희가 꼬라지를 부렸을 때 가장 먼저 싸움을 말렸던 게 문지섭이지만, 결국 안주희와 가장 많이 싸우는 것도 문지섭이 되었다.
이래서 정치 이야기는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친문親文과 반문反文의 극한 대결구도가 이어지던 어느 날.
문인이 등교했다.
“내가 인섭이 끌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놀랍게도, 문지섭이 억지로 끌고 왔단다.
무슨 납치를 했다는 둥 허풍을 떨어대는데, 안주희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하, 이제야 귀하신 분 존안이나 좀 보겠네.”
안주희의 입은 삐뚤어진 말을 내뱉었지만, 모가지는 솔직했다.
기린처럼 목을 쭉 뻗고서, 미어캣처럼 도리도리 고개를 돌리며 문인을 스캔한다.
“문하~”
“문하?”
“문인 하이라는 뜻.”
백학예중 출신 여학생들이 문인에게 요상한 인사말을 건네는 동안, 안주희는 TV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문인의 실물을 관찰했다.
실제로 만난 문인은…….
생각보다 더 작고.
생각보다 목소리가 조용하고.
생각보다 담요의 존재감이 신경 쓰이고.
생각보다…….
별것 없어 보였다.
뭐랄까, 교복 걸치고 있으니 그냥 같은 반 남학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천재 작가의 무시무시한 아우라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개겨도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한 안주희는 당당하게 도전장도 던질 겸, 왜 학교 안 나왔느냐며 쏘아붙이기 위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간 친해진 친구들이 눈빛으로 말렸지만, 그걸 얌전히 들으면 안주희가 아니다.
안주희는 둥근 안경으로도 숨길 수 없는 삐쭉한 눈매를 더더욱 날카롭게 찌푸렸다.
그렇게 다가간 순간.
안주희는 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빠짝 얼어버렸다.
그 이유는 대문호나 천재의 명성에서 오는 위압감 같은 게 아니라,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중환자를 볼 때 느껴지는 숙연함에 가까웠다.
TV 화면 너머로는 이 초췌하고 지친 눈동자를 느낄 수 없었다. 문인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정체 모를 절박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대체 왜?
모자란 것 하나 없는 녀석이 대체 왜?
그렇게 안주희가 잠시 주춤거리는 동안, 문인도 자신에게 다가오던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주희?”
지난 몇 주 동안 문인을 향해 이를 갈던 안주희.
문인을 만나면 씹어먹어 버리겠다던 안주희.
그녀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날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