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ist Running Through Time RAW novel - Chapter (239)
EP 14 – 미래 >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한 사회의 표준이 된다면 거기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
이를 테면, 연예기획사가 회사 연예인들을 접대에 동원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여기에도 당연히 여러 이유가 있다.
일단 연예계가 암흑가 자본에 상당 부분 잠식된 상태라는 점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고,
방송 업계의 특징상 소수의 권력자가 막대한 이권을 움직이므로 회사가 아닌 개인을 향한 로비가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점 역시도 그러하고,
비단 연예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역시도 부정부패에 관대하여 ‘영업’이란 모름지기 룸싸롱에서 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도 강력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바로-
‘통했으니까’다.」
EP 14 – 미래
「“합격이라고요? 정말요?”
강은채는 자신이 무려 ‘TV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TV에 얼굴을 비춘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전부 이름 없는 단역으로서였을 뿐.
안방극장에 이름을 알리는 건, 그녀에게 너무나도 높아 보이는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고작, 피디들이랑 술 좀 마셨다고.
“그래, 캐스팅 확정 났다. 최 피디가 널 제법 좋게 봐준 모양이야.”
강은채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게 맞나?’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사장은 이 모든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여유롭게 웃으며 계약서를 건넸다.
계약서가 손아귀에 들어왔는데도 강은채는 이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사장이 어리버리한 신병을 비웃는 군대 선임처럼 개구지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드라마 나가기 싫어?”
“아뇨! 절대 아닙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대답에, 사장은 흡족스레 미소지으며 담배를 꼬나물고서 불을 붙였다.
그는 가죽의자에 거만하게 몸을 뉘이며, 콜록거리는 강은채에게 훈계를 아끼지 않았다.
“오디션도 안 보고 들어간 거니까 선배들한테 책 잡히지 않게 인사 빡세게 하고 다녀라. 촬영장 가면 상철이가 어련히 잘 알려주겠지만, 꼴랑 드라마 출연 따냈다고 건방지게 콧대 높이지 말라 이거야. 벼는 익을수록 고갤 숙인다잖냐. 연예인 생활 오래오래 해야지. 응?”
“네! 알겠습니다!”
“이게 다 회사 덕이라는 걸 잊지 말고, 그리고 또 뭐냐······”
강은채의 캐스팅이 그날 단란주점에서 만난 PD들의 입김 덕분이든, 아니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회사의 영업력 덕분이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든 간에, ‘통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 세상은 강자들의 손에 의해 조종되며, 약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실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강자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
그 적나라한 사실을 깨달아버린 강은채는 하루하루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수영극단 12기 강은채입니다!”
촬영장에서 만난 극단 선배에게 적극적으로 인맥을 어필하기도 하고.
“감독님, 많이 피곤하시죠? 이건 별 거 아닌데······”
촬영장 스태프들에게 적극적인 선물 공세를 펼치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신인 주제에 자꾸 설치고 다니는 꼴을 아니꼽게 보던 대선배에게는 먼저 다가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렇게 강은채는 낯선 연예계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갔다.
하루, 하루, 어른이 되어가면서.
순백의 도화지 같던 마음에, 조금씩 조금씩 먹칠을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이 세상의 ‘진짜 어둠’이 그녀에게 밀려왔다.」
* * *
“최 피디가 나한테 몸을 요구하더라고요.”
“······”
“사실 나는, 그 사람들이 제법 젠틀한 편인 줄 알았어요. 어? 이상하다? 내가 아는 소문은 이렇게 건전하지가 않았는데? 보통 룸싸롱 같은 데 가면 성상납은 기본 아닌가? 근데 이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를 안 하네? 친절하네? 착하네? 뭐, 이딴 착각을 했던 거지, 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자, 집 안에는 오로지 침묵만이 가득했다.
째깍, 째깍, 침묵 속에서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진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를 훌쩍 넘겼다.
그러나 졸리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엄밀히 말해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니다.
소설가가 쓰는 건 글자가 아니라 ‘이야기’다.
나는 ‘이야기’에 환장한 인간이고, 그게 너무 좋아서 직접 쓰기까지 하는 광신도다.
심지어 이야기를 쓰기 어려워지면 아무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전철로 달려가, 다른 승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상상하며 자극을 받다가, 애인한테 변태 새끼 같다는 소리도 들었을 정도의 괴짜다.
그런 내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어찌 꺼릴까.
이야기에는 힘이 있고, 힘은 진실된 것에서 나온다.
그리고 사람은 생각보다 진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동물이었으므로,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한 감상의 순간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김별과 그 어머니를 중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지극히 희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이 그녀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맘 같아선 중간 중간에 말을 끊어가며 온갖 질문을 던지고 싶다. (구유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맹세한다.)
하지만 구학준이 내게 심어준 일말의 사회성이 나를 자제시켰고, 따라서 나는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며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허공 너머로 자신의 과거를 쳐다보던 여인이 서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부 다 악질적인 수법이었어요. 처음 보는 여배우에게 성상납을 요구했다가 거절 당하고서 폭로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친절하게 접근해서 온갖 이권을 먼저 안겨주는 거죠. 내가 딱 그렇게 됐잖아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인기가 생기고, 자잘한 CF도 몇 개 들어오고, 극단 선후배들이랑 친분도 한층 두터워지고······”
“······”
“무엇보다, 성공의 맛을 한 번 알아버린 게 가장 컸어요. 잃을 게 생겨버린 거죠. 게다가 술 따르고 받아먹은 게 있으니까 떳떳하게 폭로도 못하고··· 폭로 해봤자 누가 술 한 번 따르고 드라마 캐스팅 됐다는 걸 믿어주겠냐고요. 심지어 그 시절에.”
“······”
“그렇게 사람을 코너까지 몰아놓고서 이렇게 협박을 하더라고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업계에서 매장시켜 버리겠다. 대체 누가 이런 협박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 * *
「어둑한 단란주점의 미러볼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흥겨운 트로트 가락 역시도 들려오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싸늘한 이 사회의 민낯.
어둠 속에선 약자의 비굴함을 요구하는 강자의 오만한 눈빛이 번들거렸고, 방 안을 가득 채운 침묵 속으로는 단란주점 어딘가에서 향락과 알코올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치는 주정뱅이들의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극단 안에서는 한없이 높아 보였던 서은진 역시도, 이 자리에선 한낱 약자에 불과했다. 언제나 자신만 믿고 있으라던 선배는 꼬리 만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서 공손히 모은 다리 위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
그러나, 강은채는 이제 겁 많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들이 그녀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하얀 도화지 같은 마음은 어느새 회색이 되어 있었다.
강은채는 세상의 먼지로 자욱한 바로 그 회색의 마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삐뚤어진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저씨”
“뭐?”
“좆 까세요.”」
* * *
“그건 정말이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 없는 년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어요.”
“아······.”
“그 말 하자마자 매니저가 내 뺨을 후려치더니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악을 쓰며 반항하니까 매니저한테 머리채 붙잡혀서 질질 끌려 나가고··· 깡패 사장한테도 불려가서 뺨 맞고, 재떨이 맞고, 주먹으로 명치도 맞고···”
“우와······”
“당연히 드라마에서도 짤리고, 회사에선 미친년이라고 딱지가 붙고··· 하여간 그때 커리어가 반쯤 작살났다고 봐야죠. 하··· 정말이지 그때 조금만 참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때의 발언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선 짙은 웃음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에 드러났을 삐뚤어진 미소가 말이다.
“하여간 나는··· 그 한 마디가 내 배우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고. 워낙 업계가 좁다 보니까, PD한테 한 번 밉보이고 난 이후로 일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 * *
「네? 아니, 캐스팅 확정 났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취소라니요? 그렇게 통보하시면 곤란하죠. 아니, 이유라도 말씀을 해주셔야···」
* * *
“PD들은 기본적으로 연예인을 도구, 시종, 아랫것으로 생각해요. 자신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물감 같은 개념이죠. 그리고 그게 일정 부분 사실이기 때문에 PD, 감독, 작가의 인성이 어떻든 그 치들 마음에는 오만함이 없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별이한테 무조건 제작자들 앞에선 숙이라고 가르쳤어요. 별이 앞에서 알량거리거나 비굴하게 아첨을 떠는 모습을 숨기지도 않았고요. 그래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 * *
「사장님! 아무리 제가 잘못했다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이 씨발련이 뭘 잘했다고 언성을 높여? 확 씨발 진짜로 강원도 사는 가족들 피바다 보기 싫으면 싸인 해.」
「이러면 전 대체 뭘 먹고 살란 거예요? 제가··· 제가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지은 거예요? 제가 죽을 죄를 지은 거예요? 진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 * *
“연예기획사 놈들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깡패 티를 벗었다곤 해도, 기본적으로 업계의 구조 자체가 사람을 착취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 바닥에 연예인의 편을 들어주는 회사는 없어요.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위선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기획사를 믿으면 안 돼. 무조건 회사가 아니라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찾아야 하고, 없으면 만들어야 해. 그게 제가 별이한테 항상 하던 소리였어요. 한 번 노예계약을 당하는 순간 몇 년 동안 회사에 돈과 건강과 노력을 바치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 * *
「바디가 관리가 안 된 편이네. 살도 쪘고, 마스크도 애매하고··· 모델 일은 좀 힘들겠는데?」
「다, 다이어트는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일정만 알려주세요! 다 맞춰오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따로 준비할 시간을 줄 순 없어요. 준비 된 모델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배우 출신을 쓸 필요는 없잖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자기는 골격부터가 약간 에러야. 아름다움은 원래 태생부터 정해지는 거거든.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해요.」
* * *
“아름다움의 기준 역시도, 대중의 시선만큼이나 냉혹해요. 아름다움을 갖추려면 고문에 가까운 트레이닝이 필요하죠. 별이가 그걸 억압과 학대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미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난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요. 별이가 혼자서 외롭게 고통 받지 않도록, 옆에서 항상 같이 굶고, 같이 먹고, 같이 운동했으니까. 난······ 정말로······”
한참이나 과거에 취해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를 다시 현실로 불러낸 건, 역시나 딸이었다.
김별에 관한 주제가 올라올수록 그녀는 다시 제정신을 되찾았다.
아니, 제정신을 잃어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젊은 시절처럼 이지적이고 또렷했으나.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처한 상황처럼 고독하고 혼란스러워 보였으니까.
“나는······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는지······”
“······”
“모르겠어요······.”
혼란에 빠진 그녀의 모습에서 방금과 같은 냉철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배우’라는 카테고리에서 한 발자국을 벗어난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내가······ 정말로 딸을 학대한 건가?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저기 저 연예 찌라시들에서 막 물어 뜯는 것처럼, 내가 정말로 못할 짓을 한 건가?”
“······”
“매니저를 포섭한 것도, 연기를 가르친 것도, 집에서도 트레이닝을 시킨 것도, 전부 다, 별이를 위해서였는데······”
결국 그녀는 눈가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는 처연하게 들리기보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보이는 처절함으로 들렸다.
나 역시 그녀를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이야기에 깊게 몰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직감은, 이 이야기에 아직 맞춰지지 않은 퍼즐이 존재함을 알아차렸다.
나는 식탁 위로 쓰러져 오열하는 그녀에게, 다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제가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고통을 겪으셨군요. 유감입니다.”
“······아니에요. 내가. 추한, 꼴을-”
“그런데 왜. 딸에게 그 고통스런 길을 걷게 한 겁니까?”
“······”
우뚝-
그녀의 오열이 멈췄다.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형체가 얼음처럼 굳어버리더니, 식탁 위에 엎드려 있던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무표정이었다.
아직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채로, 표정을 굳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는 악령처럼 보였다.
악령이 스르륵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몇 년쯤 지난 뒤였어요.”
자신의 원한을 고백했다.
* * *
「서은진 선배가 죽었다.」
「자살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