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ist Running Through Time RAW novel - Chapter (67)
EP 3 – 마검님! 제발 절 조종해주세요!
촬영이 끝나고.
좋은 장면을 건진 PD는 희희낙락 웃으며 스태프를 해산시켰다. MC들도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하지만 4명의 게스트 중 3명은 넋 나간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피드보이즈 메인래퍼 민효찬은 결국 존재감 제로인 상태로 예능 출연 기회를 날려버렸고, 김별도 큰 위기를 수습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촬영 내내 두들겨 맞은 구유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의 원흉인 문인섭은 후련하게 한숨을 내쉬며 태연히 일어났다.
‘통제를 잃었군.’
구유빈을 본 순간 속에서 뭔가 시꺼먼 것들이 울컥한 이후로 잘 기억이 안 난다.
촬영 내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아무말 대잔치다.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수양이 덜 된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곤경을 끼친 구유빈과 김별에게 다가가니, 두 사람 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한다.
왜 이러나 싶어서 당황한 와중, 어느새 다가온 PD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예전에도 한 번 봤던 사람이었다. 보육원에 스태프를 이끌고 찾아왔던 그 사람이다.
PD는 내 어깨를 붙잡아 촬영장의 으슥한 구석탱이로 끌고 가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아···! 오늘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문 작가!”
“아, 네. 감사합니다.”
“크으으···!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가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케미가 확 사네! 정말 독보적인 캐릭터야! 오늘도 편집할 거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하하! 지금 말하는 것도 봐요. 근데 구유빈 작가 소설은 무슨 내용이길래 반응이 저렇게 격렬해요?”
“그건··· 아마 방송에 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PD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말서 한 장인가···”
“예?”
“으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혹시 다른 예능도 나가볼 생각 없어요? 책 홍보도 하고 좋잖아. 내가 선배랑 기획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나는 한참 동안 PD에게 붙잡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풀려난 나를 맞이한 건 백설, 그리고 어느새 촬영장에 찾아온 임양욱이었다.
나는 맥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임 부장님··· 언제 왔어요?”
그러나 임양욱은 평소처럼 느물거리면서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치고선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너스레를 떠는 대신, 간단히 눈인사만 하고 말았다.
뭐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임양욱과 백설 앞에 누군가 있다.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은 아저씨다. 눈이 작아서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처럼 보였다.
정체 모를 중년인이 날 힐끗 보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아! 여기 있었구만, 문인 작가!”
“실례지만, 누구시죠?”
“그야 자네 책 찍어주는 사람이지.”
그게 누군데- 라는 의문이 이어지기 전에 먼저 소개가 나왔다.
그는 내게 명함을 건네며 사람 좋게 미소지었다.
“백학문고 출판사업본부 김상국 본부장이란다. 지금 전국에 깔리는 네 책을 만들고 있는 아저씨지.”
“아, 네··· 안녕하세요.”
“우리 회사의 대들보 같은 작가님을 만나서 정말 반갑구나.”
김상국 본부장이 내 환심을 사려고 하는 중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임양욱은 그걸 보고 역린이라도 찔린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너무 치근덕대시는 것 아닙니까?”
“허허, 이제 다른 회사 사람 됐다고 말을 너무 막하는 게 아닌가? 치근덕이라니.”
김상국은 이렇게 대꾸했다.
“지금 이 상황이 비정상적인 거지. 백학문고 출판사업본부 본부장이 백학문고 작가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 자네가 얼마나 꽁꽁 숨겨놨으면 내가 방송국까지 찾아왔겠나.”
“문 작가가 왜 백학문고 사람입니까?”
“엄밀히 따지면 연예인으로서의 문인은 백학엔터 출판매니지먼트부의 것이고, 작가로서의 문인은 백학문고의 관리 담당이지. 문인 작가의 책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네. 너무 갑작스럽게 온 것 아니냐고 따지진 말게. 그렇게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준 건 자네였으니까.”
“그야···!”
발끈하는 임양욱을 뒷전으로 두고, 김상국 본부장이 내게 말했다.
“문 작가. 지금 자네 책이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팔리는 걸 알고 있나?”
“예?”
당장이라도 끼어들어 나와 김상국을 갈라놓으려던 임양욱이 멈칫했다.
김상국은 그런 임양욱을 보고 싸늘하게 비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임 팀장, 아니, 임 부장은 자네 책을 판매 위탁이 아니라 도매가로 넘기는 계약을 전국 서점과 체결했어. 그리고 그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게 설정했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 문 작가가 받아야 할 돈이 전국 서점에 나눠지고 있다는 말이야.”
“어···”
알음알음 알고는 있는 내용이었다.
백학문고의 양성준 부장이라는 사람은 임양욱과 개인적 원한관계였는데, 그 사람이 책을 못 내게 막는 바람에 책값을 내려서 전국에 풀었다고 들었다.
그럼 그건 백학문고 때문에 생긴 일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김상국 본부장이 말을 이었다.
“물론 본사의 양성준 부장이 임 부장에게 억하심정을 품고 중간에서 이상한 장난을 쳤다는 건 인정하네. 그런데 양성준 부장이 책상을 뺀 지금도 그 계약을 유지하고 있는 건 왜인가? 대체 왜 백학문고의 유통라인에 문인 작가의 책을 넘기지 않는 거지?”
임양욱이 이를 악물었다.
“그건 우리 출판매니지먼트부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래. 출판이 아니라 ‘매니지먼트’부지. 그런데 제대로 된 출판사 쪽인 내가 보기에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서 그렇네. 당장 백학문고에 문인 작가의 책에 대한 사업권을 넘긴다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우리는 출판사인 동시에 가장 커다란 서점이 아닌가?”
김상국은 임양욱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나에게 하는 거였다.
“아아- 혹시··· 문인 작가의 책을 판 돈을 백학문고가 아니라 백학엔터로 넘기는 대신 부장 자리를 딴 건가?”
“···!”
“문인 작가. 한 번 생각해보게. 연예인 만드는 회사와, 책 만드는 회사. 둘 중에 누가 더 책을 잘 팔 것 같나?”
결론은 뻔했다. 김상국은 그 결론을 굳이 거론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백학문고가 아니라 백학엔터를 통해 책을 팔려고 하다니. 작가를 최선으로 관리한다던 사람들이 작가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선택을 하는군, 쯧쯔···”
임양욱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비웃던 김상국은, 마지막에 와서야 날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어떤가 문 작가? 제대로 된 서점에 책을 맡겨보는 건 어떤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백학문고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않겠지? 우린 출판사이지만 서점이기도 하네. 전국에 있는 모든 백학문고 정면 입구에 문인 작가의 책이 진열되는 거야!”
“······”
“뭐··· 원래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겠지만, 임 부장의 고집 때문에 동네 서점에 헐값으로 책을 넘겨주고 있지 않나. 이대로라면 프로모션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네. 왜 백학문고 소속도 아닌 작가의 책에 혜택을 주냐고 우리 쪽 사람들이 항의하거든.”
“······”
“어떤가?”
임양욱이 날 속였다고?
나는 김상국 본부장의 말에 대한 신빙성을 알고 싶었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임양욱의 표정을 보면 된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임양욱은···
자신이 지은 죄를 들킨 사람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합리적인 변명이라면 차고 넘쳤다.
때린 놈이 이제와서 맞은 놈 챙겨준다는 말을 어떻게 믿나. 백학문고가 저지른 짓이 있는데 뭘 믿고 책을 맡길 수 있나. 등등.
다만 백학문고에 가면 훨씬 많은 판매량이 보장될 것이다. 김상국의 말처럼 백학문고는 한국 최대의 출판사이자 서점이었으니까.
흐름에 휩쓸리는 이가 아니라 흐름을 만드는 이. 그야말로 이 업계를 지배하는 이들이다.
그런 백학문고가 작정하고 책을 팔아치우기 시작한다면, 문인에게 지금과는 자릿수가 다른 수준의 인세를 안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임양욱은 그러지 않았다.
당장의 수입은 놓칠지라도, 문인의 스타성이 제대로 발화하려면 백학문고보다는 백학엔터의 도움을 받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성준과의 갈등이 해소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인은 작가일 때보다 스타일 때 더욱 빛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고루한 문학보다도 어린 천재의 존재 자체에 열광하니까!
하지만 김상국의 앞에 서니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능, CF, 등등.
임양욱이 마련한 것들을 전부 거부하던 문인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건가?’
이제는 스스로의 마음마저 헷갈릴 지경이다.
내가 문인 작가를 끝까지 붙잡고 있던 이유가 뭐지? 정말로 백학문고보다 백학엔터가 좋다고 여겨서였나? 아니면 백학문고와 김상국 본부장에게 품은 앙심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천재를 끝까지 옆에 두고 기생충처럼 그 고혈을 빨아먹고 싶어서였나?
임양욱은 심마心魔에 빠졌다.
자신의 마음이 희뿌연 진흙탕처럼 흐려졌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마음은 인간의 원동력이었으므로 임양욱이라는 인간은 지금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됐습니다.”
문인이 말했다. 소년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눈동자 속에 품고 있었다.
“제가 사업은 잘 모르지만, 그런 복잡한 문제를 시시콜콜 따지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어진다는 사실만은 잘 알겠습니다.”
소년에게는 ‘지智’가 없었다. 두 번 사는 인생이건만 여전히 삶이란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세상은 한 사람이 알기에는 너무나도 복잡기괴했다.
소년에게는 ‘덕德’도 없었다. 소설가는 원래 인성이 좋은 편이 아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설가는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그에게 덕을 베푼 적이 없었다.
소년에게는 ‘체體’도 없었다. 운동을 안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자란 보육원의 협객의사俠客義士들은 소년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오직, 의와 도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래도 우리 임양욱 부장님 믿습니다.”
“···!!!”
“사업하다가 쪼끔 애매모호한 상황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간 함께한 의리가 있는데 이대로 백학문고에 홀랑 가버릴 순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임양욱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김상국도 침음성을 내며 한 발 물러섰다.
김상국이 소년에게 물었다.
“···임양욱 부장과 친한가 보구나?”
소년은 떠올렸다.
휘적거리는 발걸음으로 곰팡이 핀 자취방에 대뜸 들어와 대상을 안겨준 대머리 편집자를.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눈을 질끈 감고서 자신의 책을 출판해주던 자신의 열렬한 독자를.
“그야··· 절 처음으로 찾아온 편집자니까요.”
끄응. 김상국 본부장은 무언가 자기 예상에서 벗어난 듯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대화를 끝냈다.
“그래··· 그럴 나이지. 숫자가 아니라 시간이나 순서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
“이번에는 내가 한 발 늦었나··· 그래. 다음엔 좀 더 편한 자리에서 보자꾸나.”
김상국 본부장은 기분 나쁜 눈빛으로 임양욱과 문인섭을 흩어보고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띄고서 그대로 떠나가버렸다.
임양욱과 문인섭, 그리고 백설은 그가 사라진 복도의 어둠 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 * *
영화, ‘사인’이 개봉되었다.
[단편영화답게 흥행은 처참히 실패했지만 그 작품성만은 인정받았다.]그것이 평단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평론가들의 한 줄에 숨겨진 수많은 인생사는 더 많은 일들을 품고 있었다.
흥행이 처참하다는 건 평범한 시각에서의 이야기일 뿐, 극단적으로 제작비를 낮춘 데다 원작 팬들의 존재 덕분에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한참 넘겼다.
백학엔터 영화사업부는 커다란 실적 덕분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또한, 평생토록 작품성을 인정 받지 못한 영화 감독에게도 ‘사인’은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의 형태는 황금색으로 도금된 필름 모양의 조각상이었다.
“……”
국내 유명 영화제에서 수여한 상이 감독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이런 상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바 테이블에 상을 올려둔 감독은 복잡한 심정으로 상패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이나 바에 앉아 있던 감독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어이.”
곰처럼 덩치 큰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감독의 등을 두드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너도 볕들 날이 왔구나!”
그는 웃음기 짙은 얼굴로 감독의 옆에 앉았다.
그러나 감독은 도무지 웃을 기미가 안 보인다.
“뭐야? 왜 그래? 좋은 날에.”
감독의 얼굴은 조금 이상했다. 이제보니 이미 취해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선배님···”
감독이 술기운을 빌려 고백했다.
“사실··· 제가 이 작품에 기여한 건 전혀 없습니다.”
“뭐? 겸손이 너무 과한 거 아냐?”
“농담 아닙니다.”
감독은 그가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아집.
두 천재의 호흡.
마지막 순간, 촬영장이 멈춰버린 듯한 한 장면.
가짜 눈이 진짜 눈으로 변하고, 분장이 인물로 녹아들던 그 순간.
있어야 할 연기가 있어야 할 장면에 담긴 그 완벽한 아름다움.
“거기에··· 전 아무것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
“전부, 두 어린 놈들이··· 두 명의 어린 천재가 해낸 일이죠. 제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
“이 상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감독의 선배가 굳어버렸다.
그가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의 이름은 소태웅.
영화감독. 49세.
칸의 황금종려상, 베니스의 황금사자상과 비견되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의 주인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