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ist Running Through Time RAW novel - Chapter (77)
EP 3 – 마검님! 제발 절 조종해주세요!
“이런 건 웹소설이 아니야아아아악 – !”
민효찬은 존재해선 안 될 물건을 본 것처럼 광기에 휩싸였다.
“이럴 순 없어! 웹소설이 이럴 순 없다고오오 – !”
웹소설.
웹 사이트에 게시된 연재글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일독하는 형태의 소설로, 2010년대 이후로 유행하기 시작한 신문물이다.
20세기 중화권의 구무협을 계승해 한국에서 꽃피기 시작한 신무협과, 20세기 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통해 한국에서 양성화된 일본 라이트노벨을 그 장르적 뿌리로 두고 있다.
하지만 사업 모델 측면에서 따져보자면 웹소설의 직계 선조는 도서대여점 시장으로, 간단한 만화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설을 빌려주는 오프라인 업체다.
그러니 장르적 측면에서나, 사업 모델 측면에서나,
웹소설은 가볍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이른 바 ‘스낵 컬쳐’를 지향하는 문학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나긴 장광설 끝에 민효찬은 단호히 선언했다.
“이건 웹소설이 아니야!”
“흠···”
이번이 첫 웹소설 도전은 아니었다.
‘옛날’이라고 대충 둘러댄 시절에 쓴 웹소설이 아직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동아리 부원들에게 대강 보여줬는데, 이토록 거센 비판에 직면할 줄은 몰랐다.
민효찬 뿐만 아니라 김별과 구유나도 난색을 표했다.
“저건 좀··· 시작부터 숨이 턱 막히는데?”
“제국력 1415년에서 컷이야.”
원래 글쟁이는 성격이 원만한 부류가 아니며, 나도 예외는 아니다.
소설 초반부부터 이렇게 까이니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는 너희들은 대체 웹소설을 얼마나 잘 안다고 그럽니까?”
구유나와 김별이 내 매서운 눈초리를 슬쩍 피했다.
이 시절 구유나는 아빠 몰래 일본 오타쿠 만화 팬픽 쓰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김별에겐 대체 뭐가 있는 거지?
“김 선배, 혹시 웹소설 봐요?”
“뭣?!”
김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딱 걸렸다.
“봐요? 안 봐요?”
“그, 그야··· 쪼끔···?”
“뭐 보는데요?”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5-, 4-, 3-, 2-”
결국 김별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배우물! 배우로 성공하는 소설 가끔 보면서 대리만족한다! 됐냐?!”
“그런 취향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건만, 김별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애써 항변했다.
“그, 그렇게 많이는 안 봤어! 촬영장 이동할 때마다 차에서 심심풀이로 본 거라고! 내, 내가 웹소설 같은 거 보면서 현실도피할 리가 없잖아? 나 김별이야! 김별! 현역 배우라고! 내 인생이 웹소설보다 찬란한데 왜 내가 웹소설 같은 걸···!”
“……”
“……”
“……”
모두가 조용히 김별을 쳐다보고 있으니 김별은 마음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망한 얼굴이 됐다.
그리고 조용히 구유나를 애착인형처럼 껴안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런. 아무래도 망가져버린 모양이다.
그때 민효찬이 나서서 말했다. 무용과 아니랄까봐, 구석에 앉아 있다가 기묘한 탭댄스를 추며 동아리방 가운데로 나와 자신만만하게 스탭을 밟았다. 타닥, 탁!
“웹소설 박사, 등장.”
“민··· 민···”
“민효찬.”
“민효찬 선배 웹소설 잘 알아요?”
“그럼!”
민효찬이 장황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대충 어릴 때부터 웹소설 처돌이었다는 말이었다.
“웹소설을 잘 모르나 본데,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대신 나중에 레피드보이즈 유튜브에 한 번만 나와주라! 제발!”
“지금··· 제 소설 집필을 도와주시겠다고요?”
“그럼! 합방 한 번만 해주면!”
그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순문학도가 소리쳤다.
– 갈! 어디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이돌 메인래퍼 따위가 본좌에게 ‘문학’을 가르치려 드느냐!
그러나 새빛늘봄보육원생 문인섭이 나서서 반박했다.
– 조용히 해. 넌 허섭스레기야. 지금 누리는 명예와 이익 모두 시간을 되돌아 온 것 때문이라구. 이게 다 네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아?
마음 속 순문학도는 장렬히 쓰러졌다. 옛날에 돈 떨어졌을 때도 쓰러지더니, 아무래도 약골인 모양이었다. 밥을 잘 못 챙겨먹어서 그런가보다.
나는 잠시 내적 갈등을 끝마치고서 이렇게 선언했다.
“좋습니다! 모든 조언을 수용해보죠. 이렇게 된 거 과거에 갇혀있기보다는 새롭게 도전을 해보겠습니다. 우리 대중문화··· 무슨무슨 동아리 여러분 모두의 도움이 필요해요.”
구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동인지를 내자는 거야?”
민효찬이 흠칫했다.
“동인지···!”
내가 혀를 쯧 차며 설명했다.
“야한 거 말고요. 문학 동인지요.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드는 책이요.”
“나, 나 이상한 생각 안 했어···”
김별이 잠시 민효찬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 다음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그래도 부장이라서 저번에 동아리 담당쌤한테 불려갔거든? 한 달 뒤에 동아리 발표회인데, 우리 동아리가 허접한 건 알지만, 그래도 뭐라도 내놓아야 한다고 그러시던데? 미리 말해줘야 했는데 깜빡했네.”
“마침 잘 됐네요. 김 선배. 그럼 아예 동아리 명의로 회지를 냅시다. 공동집필진 4명으로 하고···”
“그래도 되겠어? 너 스타작가잖아.”
“이름값보단 글이 더 중요하죠. 이번 기회에 좋은 경험 만들어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가면 그게 더 이익입니다.”
프로 정신을 중요시하는 김별의 마음에 쏙 드는 멘트였는지 김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일이 이렇게 되자, 민효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핑크머리 휘날리며 달려들어 글에 손을 댔다.
“아카데미! 아카데미! 아카데미!”
“그게 뭔데요?”
“학원물로 스타트하라고! 시작부터 제국력 1415년 이지랄하지 말고!”
“말이 좀 심하시네요. 1415년은 아쟁쿠르 전투가 있었던 해로, 중세와 르네상스가 교차하는 시기, 기사도의 종막을 상징하는 전투입니다. 구시대의 가치가 소멸해가는 작중 배경을 은유하기 위해선 꼭 있어야 하는 장치인데···”
“닥쳐!”
“쓰읍···”
구유나도 딱히 관심 없는 척하면서 슬쩍 다가와 글의 구조를 손봤다.
“···시작부터 액자식 구성으로 하면 너무 루즈해져. 웹소설, 특히 판타지 소설은 한 인물의 서사시여야 하니까, 어린 시절부터 계단식으로 배치해. 그런 것도 몰라?”
“그것 말곤 괜찮다는 거지?”
“응···”
김별도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그녀는 우리 중 누구보다 대중들의 일반적인 취향- 커먼 센스에 박학다식한 전문가였다.
“소외된 주인공이 특별한 계기를 만나 성공하는 이야기. 절대 실패하지 않지. 마검을 주인공에게 찾아온 행운으로 설정하는 건 어때?”
“그치만··· 원래 이 소설 ‘마검’은 삶의 주체성을 서서히 상실해가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메인인 소설인데···”
“드라마도 그렇게 쓰면 굶어 죽어.”
한 번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니 조언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러나 저러나, 중학생 즈음의 아이들은 본디 이런 특별한 경험에 환장하는 것이다.
“제목도 좀 이상해. 마검? 이게 웹소설 제목이냐? 문장형으로 바꿔라. 그냥 바꾸라면 바꿔! 이유는 묻지 말고!”
“마검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설정해. 그래야 서술이 아니라 대사로 작중 배경을 설명할 수 있어.”
“학원물로 시작하면 뻔하네. 학교폭력 투입시켜. 무난한 시작이야. 나중에 갚아주는 전개도 뻔하니까, 오히려 기대가 되지···”
* * *
카루스베인 아카데미의 낙제생 요제프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다.
“이 깜둥이 새끼!”
“흐엑!”
요제프의 어머니는 다크엘프 노예였고, 그는 어머니의 흑단처럼 검은 피부를 물려받았다.
그 검은 피부는 요제프가 5살에 카루스베인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무려 10년 동안 이어진 집단 괴롭힘의 원인이었다.
“하하! 한심하기는.”
“빨리 일어나! 이건 대련이잖아! 고작 이거 맞고 뻗어버린 거냐! 이 깜둥아!”
대련을 빙자한 집단 폭행에 시달릴 때마다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자신의 운수다.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백작의 하얀 피부를 물려받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내 검은 피부색만 아니었으면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칼렌, 이 깜둥이 자식 죽은 척하는데?”
“어이, 목검으로 맞고 죽은 거냐?”
“일어날게! 때, 때리지 말아줘…”
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던 요제프가 칼렌과 세르길의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카루스베인 아카데미는 어린 인재들을 모아 성인이 될 때까지 가르치므로, 칼렌과 세르길이 요제프를 괴롭힌 지도 10년이 되었다.
10년은 사람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물며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아동기의 10년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제 요제프는 칼렌과 세르길의 어떤 요구도 거절할 수 없는 인형이었다.
“야, 요제프.”
“히, 히익…!”
“왜 이렇게 몸을 떨어? 우리 친구잖아?”
칼렌의 손이 어깨에 올라오자마자 요제프는 파르르 떨며 자세를 웅크렸다.
다행히 칼렌의 손은 요제프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서 금방 물러났다.
“겁먹기는. 누가 보면 괴롭힌 줄 알겠다? 네가 그 꼴이라서 친구가 없는 거야. 알아?”
“미, 미안해…”
“우리 아니면 대련해주는 사람도 없잖아? 이게 다 네 실력 키워주려고 하는 거야.”
“……”
“어쭈.”
요제프가 대답 없이 입술을 질끈 깨물자, 실실 웃던 칼렌과 세르힐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안 고마운가봐? 특별히 대련해줬는데?”
“야, 대답 안 해?”
“고, 고마워!”
“옳지.”
칼렌과 세르힐은 요제프에게 자기들이 쓰던 목검을 대충 던져 주고 대련장을 떠났다.
요제프는 목검과 보호구를 창고에 정리한 다음,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수업이 있는 교실로 정신 없이 뛰었다.
지각하기 직전이었다. 칼렌과 세르힐은 애초에 그런 시각을 맞춰 요제프를 괴롭힌 것이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복도를 뛰어가는 요제프를 본 학생들이 불쾌한 얼굴로 쑥덕거렸다.
“품위 없게…”
“저 다크엘프는 깨끗하게 다니는 꼴을 못 봤다니까.”
“선배, 저 사람 누군데 복도에서 뛰어요?”
“아, 저놈? 기사학부에서 깜둥이라고 불리는 낙제생인데, 딱히 선배 대접해줄 필요 없으니까 그냥 피해 다녀라.”
대련장에서 본관 1동과 2동, 그리고 중앙마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이르기까지.
허겁지겁 뛰어가는 하프-다크엘프를 본 학생들은 비웃음, 동정, 혹은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무려 10년 동안 따돌림에 시달린 요제프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물 아닌 명물이었다.
당연히 교수들도 이런 상황을 알았지만, 대련이나 마법실험사고 등의 이유로 매년 서너 명씩 죽어나가는 학교에서 왕따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카루스베인 아카데미는 먼 옛날 대전쟁 시기에 세워진 사관학교가 그 시초 아니었던가. 나약한 이는 저절로 도태될 뿐이다.
그러니 뒤늦게 교실에 도착한 요제프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교수의 싸늘한 눈초리.
“늦었군요. 감점입니다.”
그리고 무려 5살 때 만나 10년 동안 함께 지낸 동기들의 조용한 비웃음 뿐.
“…쯧.”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한때는 소꿉친구처럼 지낸 엘프 왕녀 아엔델리븐이 자신을 보며 조용히 혀를 차는 모습이었다.
수업
* * *
이 끝나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요제프는 조용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카데미가 차별을 금지한다지만 개인실은 고위 귀족들에게만 주어졌으므로, 백작의 첩에게서 태어난 요제프는 3인실을 썼다.
“왔냐? 깜둥이?”
“응…”
3인실에서 요제프를 기다리던 건 칼렌과 세르힐.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대여섯 명의 기사학부 후배들.
순식간에 쏟아지는 조롱과 경멸이 섞인 눈빛에 요제프가 저절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칼렌이 요제프를 장난감으로 삼아 괴롭히기보다는 자기네 패거리와 수다나 떨고 싶은 모양이었다.
칼렌이 삐둘어진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야.”
“빵 사올게…!”
“옳지.”
요제프의 몸은 이제 저절로 반응한다.
하프-다크엘프의 신속함으로 순식간에 아카데미 구내상점에 도착한 요제프는 인원수에 맞추어 빵을 집었다.
허나 계산을 하려 동전주머니를 열었을 때, 요제프는 백작의 첩으로 지내는 어머니가 보내준 용돈이 전부 바닥났을을 알게 되었다.
“앗, 아아…”
“뭐야, 돈 없어?”
수염 난 상인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요제프를 째려보았다.
사실 그리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건만. 자신을 향한 공격성에 민감한 요제프는 패닉에 빠져 말을 더듬었다.
“아, 아뇨, 그, 그, 그게…”
그때, 냉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가 대신 계산하죠.”
“아, 예, 공주님.”
엘프 왕국의 아엔델리븐 왕녀, 명예로운 혈통과 그에 걸맞는 재능으로 요제프가 ‘귀쟁이’라고 불리지는 않게 해주는 이였다.
황제가 황태자의 아내로 점찍은 인재를 모욕하는 순간, 카루스베인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물론이고 그 목숨줄에도 지장이 갈 테니까.
요제프는 자기 대신 빵값을 내준 아엔델리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 고, 고맙-”
“똑바로 말해. 더듬거리지 말고.”
“미, 미안-”
냉담하게 대꾸한 아엔델리븐은 요제프의 대답도 듣지 않고서 휙 하고 상점을 나가버렸다.
상점을 나가기 직전 요제프를 돌아본 아엔델리븐의 시선에는,
한때 보석인 줄 알았던 돌멩이를 쳐다보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요제프의 머리 속으로 5살에 처음 만난 아엔델리븐의 해맑은 목소리가 스친다.
‘안녕? 너도 엘프니? 나도 엘프야! 반가워!’
* * *
그날 밤.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고, 귀뚜라미 소리는 밤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고요한 밤.
오랜만에 아엔델리븐과 대화를 해서인지, 기숙사 침대에 누운 요제프는 모처럼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 검은 피부 때문에 배척 당하긴 했어도 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삐뚤어진 관계는 아니었다.
‘야! 깜둥이! 빨리 와!’
‘늦으면 버리고 간다!’
동기들은 항상 뒤처지는 요제프를 비웃기는 했지만 그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줬고, 심지어 칼렌과 세르힐도 짖궂을지언정 친구의 범주에 속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아엔델리븐.
엘프 왕국에서 제국에 보낸 볼모이자 차기 황태자비.
그런 정치적인 중요성이나 혈통의 명예는 아이들의 우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인간 투성이인 제국에서 외로워하던 아엔델리븐은 하프-다크엘프인 요제프의 긴 귀를 보자마자 그를 동포라고 부르며 반가워했다.
보드라운 아엔델리븐의 손을 잡고 아카데미의 교정을 뛰놀던 그 기억은 요제프의 영혼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을 이루는 추억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요제프는 점점 뒤처졌고, 고립되었으며, 괴롭힘에 시달렸다.
소중한 추억은 빛이 바래가고, 시꺼먼 고통이 가슴에 층층이 쌓여만 간다.
괴로움은 슬픔이 되어 눈에서 흘렀다.
“…흐윽.”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눈물이 흐르지만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칼렌과 세르힐을 깨웠다간 더 큰 고통을 맛볼 수 있기에 소리조차 낼 수 없다.
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인지.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아카데미에 어떻게든 집어넣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당부가 그를 아카데미에 남게 했다.
‘명심하세요, 요제프. 가장 안전한 곳은 카루스베인 아카데미입니다. 절대 방학 중에라도 백작령에 돌아오지 마세요.’
‘왜 그런가요, 어머니?’
‘당신의 수많은 형과 누나들은 첩의 자식을 죽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살기 위해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딘다.
오직, 그뿐이었다.
* * *
실습이 있는 날이면 요제프는 일찌감치 일어나 칼렌과 세르힐의 무구를 준비한다.
요제프를 종자보다 못하게 여기는 칼렌과 세르힐이 무구를 받아 나가면, 요제프는 뒤늦게 허겁지겁 준비를 끝내고 뒤따라간다.
“준비 되었나? 제군들!”
“예!”
다행히 오늘은 늦지 않았다.
한쪽 다리가 없는 발데민 경은 전쟁영웅이자 소드마스터, 그리고 카루스베인 아카데미 기사학부의 학부장이었다.
발데민 경은 학생들을 앞에 세워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훈련을 지시했다.
“모의 전투다! 조를 나눠 숲에 진입해라! 다른 조의 깃발을 빼앗을수록 점수가 붙고, 숲에 풀어놓은 몬스터를 사냥해도 점수를 얻는다!”
“예!”
“숲에는 마법이 걸려 있으니 너희를 뒤죽박죽 섞어놓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조원과 떨어지지 말도록!”
“예!”
이렇게 조를 나누는 실습이 있으면 칼렌과 세르힐은 상냥하게 요제프에게 다가온다.
“요제프? 같은 기숙사인데 당연히 우리랑 할 거지?”
“으, 으응…”
당연하게도, 칼렌과 세르힐은 숲에 들어가자마자 요제프의 엉덩이를 걷어차 밀어버렸다.
“어이쿠, 실수!”
“흐에엑!”
“하하! 흐에엑이래, 깜둥이 새끼.”
“이게 다 널 강하게 키워주려는 거라고!”
칼렌과 세르힐, 그리고 그 친구들의 비웃음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죽박죽 뒤집혔다.
경사진 언덕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무에 부딪힌 요제프는, 자신이 어느새 홀로 떨어져 숲 어딘가에 고립되었음을 깨달았다.
“후, 후으으…”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걸음을 옮기니, 나무 저편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온다. 요제프의 길쭉한 귀가 쫑긋거렸다.
‘깜둥이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몰라. 몬스터한테 물려갔겠지.’
‘얘들아. 근데 걔 진짜 죽으면 어떡해?’
‘죽으라지. 우리 아버지도 대전쟁에서 다크엘프한테 죽었어. 애초에 깜둥이가 왜 제국에서 아카데미를 다니는 거야?’
‘아아. 그건 그 녀석 엄마가 전리품으로-’
요제프는 대화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합류하기는커녕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적보다 무서운 아군이라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엄마’라는 단어가 언급된 순간부터 그 대화를 계속 듣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흐윽.”
문득,
아니, 언제나 그렇듯.
요제프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져서 기운이 빠졌다. 차마 걸을 힘조차 없어서 나무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숲의 산들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가지에 달린 잎은 춤을 추며 파스스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 산뜻하게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까지.
하프-다크엘프의 예민한 청력은 자연의 소리를 인간보다 훨씬 풍성하게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오는 청량감도 배가 되었다.
“휴우…”
생각해보니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 모르겠다. 아카데미에서는 복도든, 교실이든, 심지어 쉬어야 할 기숙사까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방어마법이 갖추어진 아카데미보다, 전투 실습장인 데다 몬스터까지 돌아다니는 이 숲에서 더 안정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요제프는 오늘도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괴롭더라도 하루하루를 버텨나가야 한다. 낙제가 더 늘어나면 퇴학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요제프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숲을 돌아다녔다.
그때, 멀리서 전투의 소리가 들려왔다.
요제프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접근했다.
“저 새끼 마법 쓴다!”
“야 이 비겁한 놈아!”
“꼬우면 너희도 복수전공 하던가!”
열 명이 조금 넘는 학생들이 서로의 깃발을 뺏으려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제프를 걷어 차버린 칼렌과 세르힐의 모습도 보였다.
요제프가 저 싸움에 합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흐아악-!”
아엔델리븐! 아엔델리븐의 뺨이 깊게 배여 붉은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요제프는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전장에 뛰어들었다.
“아엔델-!”
요제프는 아엔델리븐의 어릴 적 애칭을 외치며 기습적으로 수풀에서 뛰어나와 아엔델리븐을 둘러싼 두 명을 순식간에 쳐냈다.
칼렌이 모은 이들이었으니 같은 조원이었으나 그걸 신경 쓸 정신도 없다.
최대한 빨리 신호탄을 터뜨려 실습을 중단하고, 아엔델의 부상을 치료해야 했으니까.
“아엔델, 괜찮아?”
요제프가 얼굴이 깊게 베인 아엔델리븐을 돌아본 순간, 아엔델리븐이 망치에 맞은 유리처럼 깨져 버렸다.
환상 마법이었던 것이다.
“아…”
전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칼렌의 조는 갑자기 튀어나온 적 때문에 당황했고, 아엔델리븐의 조는 갑작스레 등장한 아군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에 난입한 이가 누구인지는 그 검은 피부색만 보면 누구나 쉽사리 알 수 있는 이였다.
“…요제프?”
상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 아엔델리븐이 당황스럽게 요제프의 이름을 부른 순간, 모든 상황을 파악한 칼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흐흐… 하하하하하!”
“뭐야. 왜 그래?”
“저 깜둥이 새끼! 아엔델리븐을 지키겠다고 튀어나왔어! 우리 조를 배신하면서 말이야!”
칼렌은 히죽거리며 요제프에게 외쳤다.
“야! 네가 진짜 기사다, 요제프! 레이디를 위해 아군도 배신하고 뛰어들어? 근데 어떡하냐? 네가 지키려는 건 환상이었는데!”
그제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칼렌처럼 웃음보를 터뜨렸고, 아엔델리븐의 하얀 얼굴은 수치심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아, 요제프, 그게···”
“아엔델리븐 공주! 당신의 ‘흑’기사한테 고맙다는 말도 안 하십니까?”
쏟아지는 비웃음 속에서 죄 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던 요제프는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 * *
한참이나 도망치던 요제프는 문득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제자리에 멈춰섰다.
마침 근처에 호숫가가 있어 요제프는 땀에 젖은 머리와 얼굴을 씻어냈다.
세안이 끝나며 파동이 멈춘 호수는 거울처럼 요제프의 얼굴을 비췄고, 요제프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을 직시했다.
“……”
검은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어머니를 닮아 여성적인 얼굴.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체형.
그보다 더 비루한 건 그 어떤 자존감이나 용기도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와 표정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자신이 싫어지는 날이다.
그런 감정이 또 다시 눈물이 되어 호수에 톡 떨어졌다.
하프-다크엘프의 눈물 한 방울은 호수의 표면에 떨어지며 둥근 파도를 만들어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호수에 비친 요제프의 얼굴이 말을 걸었다.
“흐에엑!”
요제프는 괴상한 비명을 질렀지만, 호수의 요제프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긴. 왜 우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겠지. 중요한 건 네가 이미 울고 있다는 거란다.]“누, 누구세요…?”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앞으로는 무력하게 울고 싶지 않은가? 그럴 힘을 원하는가?]만약 요제프가 마법학부에서 기본적인 소환 마법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면, 절대로 차원 너머의 존재와 함부로 문답을 나누지 말라는 지식을 전수 받았겠지만.
호수의 얼굴이 요사스럽게 질문을 쏟아내자 요제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계약은 성립되었다.
호수에 비친 다크엘프가 현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원 너머의 존재가 현실에 간섭했다.
“이, 이게 무슨…!”
터억, 검은 손길이 요제프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그대로 호수 속으로 끌어들였다.
“흐에엑!”
풍덩.
괴상한 비명과 함께 요제프는 호수에 빠졌다.
그러나 요제프가 향한 곳은 호수의 밑바닥이 아닌, 차원의 저편이었다.
* * *
“우, 우욱…”
낮선 천장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딱딱한 돌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숲 속 호숫가에 있었는데…
“흐엑!”
기억이 났다. 호수에 비친 자신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건 살면서 두 번째로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심지어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 아무리 봐도 호수 밑바닥 같지는 않다.
“서, 서, 성모여…”
자리에서 일어난 요제프는 벌벌 떨며 검을 뽑아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낡은 신전처럼 보였다.
성서에 묘사되지 않은 동상들이 늘어서 있었고, 벽면에는 검붉은 검을 든 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신전의 한 가운데에는 돌로 된 제단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검신을 따라 붉은 룬이 새겨진 검은색 검이 꽂혀 있었다.
요제프는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안다.
수많은 전설이 핏빛 역사를 노래했으니.
“마, 마검…!”
타오르듯이 붉은 마력을 내뿜고 있는 검을 바라본 순간,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로 오라…]“흐에엑!”
[나를 뽑아라…]“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차원의 틈새에 봉인된 마검이 속삭였다.
[나는 힘이요 진리다. 네가 나를 가진다면 수만을 베는 힘과 수십만을 거느리는 지혜를 가질 것이나, 그 힘에 취한다면 내가 너를 휘두르게 되겠지…]“당신이… 저를 휘두르신다고요…?”
[힘을 원하는가? 사소한 대가를 바친다면-]“제발 저를 조종해주세요, 마검님!”
[어?]* * *
핑크머리 민효찬이 주먹을 꽉 쥐며 환호했다.
“그렇지! 이거지!”
무표정이 베이스인 구유나도 모처럼 흥미로운 눈치로 감탄했다.
“오오…”
다만 김별은 팔짱을 끼고 아리송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폭력을 넣으라고 한 게 나이긴 한데, 이건 너무 어두운 거 아니야? 묘사도 수상할 정도로 자세하고···”
민효찬이 즉각 반박했다.
“중요한 부분이에요. 나중에 나올 사이다를 더 돋보이게 하는 고구마 파트라고요.”
문인섭은 왜 갑자기 소설 이야기하는데 사이다니 고구마니 하는 음식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그걸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온 몸의 기력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손 끝이 조금씩 떨려왔다.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였다.
“하느님 맙소사···”
지금도 모니터 속에서는 다크엘프와 마검이 촌극을 빚어내고 있었다.
– 제발 저를 조종해주세요! 제 인생을 제발 대신 살아주세요! 마검님!
– 가, 갑자기 왜 이러는데… 진정해라. 네 몸과 영혼을 좀 더 소중히 하란 말이다.
– 수만을 베는 힘과, 수십만을 다스리는 지혜가 있으신 마검님! 제발 저를 조종해주세요! 누가 해도 저보다는 제 인생을 더 잘 살 것 같습니다, 으흑…! 으흐흐흑…!
순문학도로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장면이었지만,
가장 괴로운 건,
이 장면이 본인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냈단 말인가···”